1776년 7월 독립이 선포되자마자 식민지들은 새로운 헌법을 작성DIELNE POMP하기 시작했다. 버지니아에서 토머스 제퍼슨(1743~1826)이 제안한 한구절은 비준을 통과하지 못했다. "모든 사람은 종교적 의견에 관한 완전하고 자유로운 권리를 지닌다. 누구도 어떤 종교 제도에 참여하거나 그것을 지지하도록 강요받지 않는다.46) 이 말은 종교에 대한 자유와 종교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했다. 그러나 제퍼슨의 ‘종교‘ 개념은 근대 초기의 두 가지 혁신에 기초를 두었으며, 그의 동포 대부분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는 종교를 ‘믿음‘과 ‘의견‘으로 환원한 것이다. - P413
제퍼슨과 매디슨의 두번째 가정은 종교가 기본적으로 정치와 분리된 자율적이고 개인적인 인간 활동이며, 그 둘을 섞는 것은 큰 일탈이라는 것이었다. - P414
우리는 프랑스 혁명을 실패로 보는 것이 아니라 긴 과정의 폭발적 출발로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수천 년의 전제 정치를 뒤집은 그런 엄청난 사회적, 정치적 변화는 하룻밤 새에 이루어질 수 없다. 혁명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귀족 체제가 아주 깊이 뿌리를 내려 계속 유지되던 유럽의 몇몇 다른 나라와는 달리, 프랑스는 비록 제한적인 형태로나마 결국 세속 공화국을 이루어냈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일어난혁명들, 예를 들어 이란, 이집트, 튀니지의 혁명들을 실패라고 속단하기 전에 오랫동안 끌어온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 P429
농경 국가의 억압은 산업화의 구조적 폭력으로 대체되었다.
더 자비로운 국가 이데올로기가 발전하고 그 어느 때보다많은 사람이 전에는 오직 귀족에게만 가능했던 안락을 누리게 되지만
일부 정치가들의 최선을 다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건널 수 없는 간극이 늘 부자와 빈자를 갈라놓는다.
관용, 독립, 민주주의, 지적 자유라는 계몽주의의 이상은 이제 고상한 갈망이 아니라 실제적인 필수품이 되었다. - P430
국가(정부 기관)는 세속적인 것으로 여겨지지만, 민족(사람들)은 유사 종교적 감정을일으킨다는 모순이었다.
국가는 폭력을 억제하기 위해 고안되었으나, 이제 민족은 폭력을 방출하는 데 이용되고 있었다. - P444
서양 근대성은 그것이 처음 잉태된 장소에 두 가지 축복을 내렸다. 정치 독립과 기술 혁신이었다. 그러나 중동에서 근대성은 식민지 예속으로 찾아왔으며 혁신의 잠재력이 거의 없었다. - P476
종교적 극단주의는 종종 적의에 찬 공격적 세속주의와 공생 관계로 발전한다. - P48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