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사상 21 - 논쟁의 사회학
강준만 지음 / 개마고원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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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의 사회학'이라는 테마에서 알 수 있듯이 강준만은 이번호에서 작년 언론개혁 논쟁에서 촉발된 지식인의 역할 및 논쟁문제 등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논쟁이 죽은 사회, 제대로 된 논쟁 한번 없었던 사회. 강준만이 내리는 진단은 바로 이것이다. 그의 말 속에서 인용해본다면,

< TV토론을 시청하노라면 발언 기회를 얻는 방청객이나 시청자가 토론자들이 너무 싸운다고 꾸짖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특히 정치인들이 출연하면 꼭 그런 욕을 먹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정치인이 정치인처럼 발언하는 게 옳지 성직자처럼 발언하는 게 옳단 말인가? 구경하는 사람이 싸우는 양쪽의 주장을 들어보고 각자 판단을 내리면 되는 것이지 왜 말싸움조차 하지 말라고 윽박질러야 한단 말인가? >

논쟁이 없는 사회는 곧, 논리와 설득력보다, 권위와 권력이 큰 힘을 발휘하는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에서는 권위와 권력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권위와 권력의 정당성을 점검하고 따져볼 기회가 제공되지 않는다는데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앞서 강준만이 인용한 '꾸짖는 시청자'의 경우, 이러한 사회적 상황의 감염자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 감염대상에서는 진보영역도 제외될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가 '건수'를 발견하고 '세상 공부에 큰 도움'을 받았다는 민주노동당 위원장들과의 논쟁에서 그는 권위와 권력이 앞서는 이러한 무논쟁 사회의 특징을 똑같이 발견해낸다. '대학교수라는 편안한 직업을 가지고 글이나 쓰는 주제에 감히 풍찬노숙하며 의병을 일으킨 사람에게 결코 해서는 안 될 말까지 하고...'라는 주대환의 공격에 대해 강준만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 그런 식의 논쟁 방식은 민주노동당 안에서도 그대로 재생산된다. 누가 더 감옥 생활을 오래했으며 누가 더 험난한 투쟁을 했고 누가 더 고통을 많이 겪었는가가 논쟁에서의 우위를 점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당원들의 조직 위상을 결정하는 건 타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내부 논쟁에서의 우위를 점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엔 동의할 수 없다. 민주노동당이 자폐적인 정당이 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

이 글 <노무현에 대한 '비판적 지지' 논쟁 - 민주노동당 위원장들과의 논쟁 전말기>에서 민주노동당 당원(비록 당비만 내고 이름만 걸어놓은 '유령당원'이긴 하지만)인 나는 민주노동당에 대한 강준만의 '애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애정을 말 그대로 '애정'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사기극'으로 받아들일 것인가는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개인적으로 이번 호에서 가장 눈여겨 볼만한 글은 <'모난 보수'와 '둥근 진보' - 연세대 교수 김호기의 이중성>이었던 것 같다. 강준만은 김호기를 '둥근 진보'로, 유석춘을 '모난 보수'로 설정하여 이 둘을 다음과 같이 대조시키면서 논지를 전개해 나간다.

< 유석춘은 자신이 비판하는 대상에 대해 '악령'이라는 말까지 쓸 정도로 과격하고 난폭한 면이 있다. 그러나 유석춘은 자기 책임하에 싸움을 하는 것이다. 나는 이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국 사회엔 제대로 된 싸움이 없는 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제대로 된 싸움만 이루어지면 한국 사회가 지금처럼 극우적이고 보수적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

'보수'와 '진보'의 경계선을 명확히 하고, '진보'의 입지를 강화해 나가는 것. 그것은 우리의 명확한 목표이다. 그러나, 그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논쟁과 성찰적 글쓰기라는 명확한 전제과정을 거쳐야 한다. 강준만의 글은 바로 이에 대한 필요성이 더욱 절실함을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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