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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유목민처럼 떠나는 글 여행

김동식·문학평론가

“저에게는 고향이 없습니다.”

1999년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후 인터뷰에서 김영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생물학적인 출생지는 강원도 화천이지만,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해마다 이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10살 때 연탄가스를 마신 이후로는 유년기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다고 한다. “제 유년의 기억은 대부분 주위 가족들의 기억에 기초해 재조립된 것입니다. 어머니나 아버지의 기억, 또는 몇 장 되지 않는 사진에 근거하고 있는 아주 허약한 것이죠. 더 냉혹하게 말하자면 텍스트에서 추출된 기억입니다.”

고향과 유년에 관한 기억이 없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로서 김영하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떠나올 고향도 없고 되돌아갈 유년도 없다는 것은 김영하 소설에 드리워진 운명적인 표정이다. 고향이나 유년에 대해서는 글을 쓸 수 없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기억을 찾아서 글쓰기의 공간을 헤매야 하는 게임을 벌이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하에게 소설이란 기억의 부재에서 출발하는 여행이며, 돌아갈 고향이 없는 유목민(nomad)의 발걸음이다. 이를 두고 탈낭만화된 유목민의 서사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김영하의 작품들은 분량과는 상관없이 매우 다층적으로 읽힌다. 작은 지면에서 한꺼번에 이야기하기에는 적지 않은 무리가 따른다. 욕심을 줄이고 김영하 소설의 전반적인 흐름을 가늠할 수 있는 세 가지의 장면만 살펴보는 것이 어떨까.

 

첫 번째 장면은 정체성과 사실성에 대한 전복적인 태도이다. 일반적으로 거울은 정체성의 상상적인 근거이며 리얼리즘의 은유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데뷔작 ‘거울에 대한 명상’은 거울이 보장하는 정체성과 사실성은 결국 허구와 환상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리얼리즘 전통과의 결별을 상징적으로 선언한 셈이다. 그렇다면 거울을 깨뜨리든지 아니면 거울에 속아왔던 자신을 징벌해야 하지 않겠는가. 첫 장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서는 새로운 자아를 생성하고자 하는 파괴적 욕망이 꿈틀거린다.

두 번째의 장면은 몸의 발견과 관련된다. “몸을 바꿔야 해”라는 매력적인 속삭임이 등장하는 단편 ‘도마뱀’에 의하면, 새로운 자아는 환상과 욕망에 둘러싸인 몸으로부터 태어난다. 김영하의 소설에서 몸은 하나의 통일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자신의 경계를 넘나드는 몸이며 스스로 변신하거나 둔갑하는 몸이다. 소설집 ‘호출’과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에 수록된 여러 단편소설들에서 몸은 욕망과 억압, 환상과 현실, 질서와 무질서가 공존하는 분열증적인 공간으로 제시된다.

세 번째의 장면은 소설의 몸을 바꾸는 일과 관련된다. 장편 ‘아랑은 왜’는 아랑전설에 대한 고쳐쓰기를 통해서 역사와 허구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메타소설과 양방향소설의 기법을 도입함으로써, 전근대적인 이야기는 근대적인 추리소설로 변신했다가 탈근대적인 판타지로 탈바꿈한다. 또한 장편 ‘검은꽃’에서는 역사소설의 주인공을 영웅에서 ‘개인’으로 바꾸어 놓는다. 1905년 멕시코의 농장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을 통해서 근대적 개인이 탄생하는 과정을 그려내며, 역사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 버린 개인들의 운명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올해 초에 발표된 소설집 ‘오빠가 돌아왔다’ 역시 일상의 배후를 예리하게 포착하며 삶의 아이러니를 다채롭게 펼쳐 보인다. 표제작 ‘오빠가 돌아왔다’는 어느 콩가루 집안의 이야기이다. 가출했던 오빠가 돌아와 아버지를 때려눕히고 어린 여자아이와 살림을 차린다. 놀라운 것은 개망나니 오빠의 귀환 이후로 가족의 꼴을 갖추어간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오빠는 폭력을 앞세워 무질서를 끌어들였지만, 동시에 애정의 교환이 가능한 최소 단위의 관계(질서)도 도입했기 때문이다. 오빠와 여자아이가 등장한 이후로 아빠와 엄마, 경선이와 고양이라는 관계들이 새롭게 형성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혈연의 신성성이라는 상투적인 전제를 무시하고, 무질서와 질서(교환가능한 관계)의 차원에서 가족을 새롭게 사유하는 유쾌한 소설이다.

 
최근에 김영하는 어느 인터뷰에서 “뉴욕이나 파리의 주요 서점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책을 내는 작가”가 자신의 꿈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세계적인 작가가 되겠다는 의욕의 표현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가 문제삼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한국문학의 숙명과도 같은 지방성(locality)이고, 다른 하나는 ‘고통의 문학’으로 요약되는 한국문학의 편향성이다. 그는 지방성을 넘어서는 즐거운 문학을 욕망하고 있는 것이다. 당돌하게도 그는 한국근대문학의 새로운 기원을 꿈꾼다. 한국문학의 현재와 미래를 묻는 사람이 있다면 김영하의 작품을 손에 쥐어주게 될 것 같다. 바로 그 당돌한 꿈 때문에 말이다. 고향이 없는 자는 원하는 곳을 고향으로 삼을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그의 작품이 도달하는 곳이 고향이다. 고향은 어디에나 있다.

<2004.8.7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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