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플레져 > 박상우 - 마천야록

<경향신문 매거진X 내 소설 속의 사랑>

2004년 6월5일, 나는 네 번째 소설집을 출간했다. 제목을 ‘사랑보다 낯선’이라고 붙였다. 하지만 책을 내기 전, 나는 제목을 놓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애초에 내가 마음에 두고 있던 제목이 ‘마천야록’이기 때문이었다. 그 작품에 대한 나의 애착과 그것에 들인 나름대로의 공력, 작품을 읽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 등이 합성작용을 일으킨 결과였다. 하지만 작품의 내용에 대한 반응과 책 제목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일맥상통하는 게 아니었다. 내용은 좋지만 책 제목으로서는 아니올시다, 하는 반응을 보인 때문이었다.

책 제목을 놓고 나는 두 달을 고심했다. 하지만 제목은 도무지 낙착되지 않았다. 출판사에 모든 걸 넘겨야 하는 마지막 날 아침, 나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제목을 결정했다. 여섯 장의 포스트잇에 소설 제목을 적어 넣고 그것을 뒤섞어 공중에 던졌다. 그리고 추첨을 하듯 눈을 감고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것이 ‘사랑보다 낯선’이다. 나는 더 이상 갈등하지 않기 위해 그것을 책 제목으로 결정해 출판사에 넘겨버렸다. 수록된 작품 중에 내가 가장 아끼던 ‘마천야록’이 제목에서 밀려나는 순간이었다.

‘마천야록’의 의미를 풀면 ‘마천동 밤의 기록’이다. 아시다시피 서울 송파구에 마천동이라는 실제 지명이 있다. 하지만 나는 소설의 소재를 처음 접하던 2001년 겨울까지 서울에 마천동이라는 동네가 있는지 몰랐다. 그것을 나에게 처음 들려준 사람은 60대 택시기사였다. 자정이 지난 시간,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로 내려선 두 명의 여자 취객에게 그는 상스런 욕을 해댔다. 저런 년들은 그냥….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기사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가 룸미러로 나를 보며 멋쩍은 표정으로 엉뚱한 말을 해댔다. 얼마 전, 마천동에서 내가 저런 년 하나를 길에다 버리고 왔거든요.

“폭설이 내린 29일 오전 일곱 시경, 서울 송파구 마천동 갈보리교회 마당에 눈에 덮인 채 숨져 있는 윤모양(26)을 이 교회 신도인 김모씨(57·여)가 새벽 기도를 마치고 나오다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숨진 윤양이 교회 뒤쪽의 다세대 주택 2층에 여동생과 함께 세들어 사는 룸살롱 접대부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사인을 규명 중이다. 일단 만취한 채 동사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이나 얼굴에 말라붙은 코피와 멍 등으로 미루어 다른 의혹의 소지도 있어 보인다. 경찰은 우범자들의 소행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인근 주민을 상대로 목격자를 찾고 있다.(서울=연합뉴스 오영도기자)”

소설 ‘마천야록’은 기사 인용으로부터 시작된다. 폭설이 내린 겨울 밤, 얼굴에 멍이 들고 코피가 말라붙은 룸살롱 접대부 윤소진이 교회 마당에서 동사체로 발견되었다는 것이 소설의 화두이다. 소설의 내용은 철저하게 타인들의 입을 빌려 그녀의 죽음을 우회된 방식으로 드러낸다.

그녀는 아버지의 노름빚을 탕감하기 위해 늙은 고리대금업자와 삼 년을 살았고, 병든 아비와 여동생을 부양하기 위해 룸살롱 접대부로 일하다 죽음을 맞았다. 아무도 그녀를 죽이지 않았지만 소설에는 다섯 명의 진술자가 등장한다. 36세의 인터넷 쇼핑몰 상무이사 남상필, 23세의 룸살롱 접대부 정아영, 38세의 경찰 노정석, 55세의 택시기사 방인철, 23세의 극장 매표원 윤인애가 각각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며 죽은 윤소진과 자신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소설의 사건 시점은 윤소진의 아버지가 죽은 뒤 일년이 지난 첫 번째 제삿날에 맞춰져 있다. 그날 그녀는 말년을 불행하게 보낸 아버지가 안쓰러워 어떻게든 제사를 지내고 싶어한다. 시장에 가 제물을 준비하고, 룸살롱에 출근했다가 얼굴만 보이고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 제사를 지내려 한다. 함께 사는 여동생은 아버지를 원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어도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며 언니인 소진을 괴롭힌다.

룸살롱에 출근했던 소진은 지배인의 강요로 쇼핑몰 상무이사 남상필의 술자리에 불려가고, 그의 요구로 2차까지 끌려가 결국 아버지의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된다.

자포자기한 그녀는 룸살롱 후배 정아영을 불러내 폭음을 하고 정신을 잃는다. 정아영은 술에 취한 소진과 택시를 타고 마천동으로 가다가 동거하는 남자의 전화를 받고 중간에서 내린다.

마천동에 당도한 택시기사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소진을 파출소에 맡긴다. 파출소에 근무하던 경찰은 그녀를 당직실에서 성폭행하고, 나중에 그녀를 데리러 온 택시기사는 어둠이 가득 들어찬 시내버스 차고지에서 그녀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다시 성폭행한다. 이후 그녀가 어떻게 갈보리교회 마당에서 눈에 덮인 채 동사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소설의 내용에는 죽은 윤소진의 진술이 전혀 없다. 그녀가 죽음으로 내몰린 문제의 그날 밤, 그녀와 결부됐던 다섯 사람의 진술이 진행될 뿐이다.

하지만 그녀가 죽음으로 몰려가게 된 과정도 집중적으로 거론되지는 않는다. 진술자들은 모두 각자의 인생과 시련에 대해 언급한다. 윤소진의 사인과 자신들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인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각자가 진술하는 삶의 파노라마를 통해 그녀의 죽음은 역으로 두드러진다.

‘마천야록’은 2001년 겨울, 60대 택시기사가 나에게 들려준 짧은 실화에서 영감을 얻은 소설이다. 기사가 나에게 자랑삼아 늘어놓던 성추행과 그녀를 길바닥에 버린 얘기는 오래오래 나의 마음에 남아 마천동이라는 이름 자체가 소설의 공간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결국 2002년 겨울, 나는 소설 취재를 위해 마천동을 찾아갔다. 택시기사가 룸살롱 접대부를 성추행하고 버렸다는 언덕과 버스종점, 마천동과 거여동의 스산한 골목을 누비며 나는 윤소진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일에 몰두했다. 파출소에도 들어가 몇 가지 취재를 했다. 두 번의 취재를 끝내고 나는 지하골방에 나를 가두고 한 달 동안 ‘마천야록’을 썼다.

다섯 명의 진술이 이루어지는 동안 나는 ‘가해자 없는 살인’이 완성되는 과정을 경험했다. 그것이 우리 시대가 낳은 새로운 살인의 방식이라는 자각에 여러 번 몸서리를 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다섯 명의 인간 중 어느 누구에게도 윤소진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살인자라는 낙인을 찍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서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의 초상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자기본위의 삶, 타인에 대한 무관심, 물질에 대한 광신적 믿음…. 그것이 살인자 없는 살인을 부르는 새로운 시대의 가해 방식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를 끝없이 찌르며 살아가는 가해자로서의 삶,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로부터 끝없이 찔리며 살아가는 피해자로서의 삶. ‘마천야록’은 내가 쓴 게 아니라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할 수 없는 기이한 시대가 창출한 작품이다.

2003년 봄, 문학계간지에 ‘마천야록’은 발표되었다. 폭우가 내리던 어느 봄날 오후, 나는 모 일간지의 편집국에 근무하는 국장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아주 어눌한 어조로 그는 방금 전 자신이 ‘마천야록’을 읽었노라고 말했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어떻게 해야 하죠, 이걸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뜬금없이 물었다. 나는 아무 응대도 하지 못했다.

윤소진에 대한 연민 때문에 자기 감정을 어떻게 추슬러야 할지 모르겠다며 그는 비 내리는 날씨를 원망하기도 했다.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그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인 제가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자 그가 작가를 만나 윤소진 얘기를 하며 그녀를 위로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음날 나는 윤소진의 죽음을 아파하는 사람을 만나 코가 비뚤어질 정도로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며 불쌍한 윤소진의 삶에 대해서, 우리 시대의 비정에 대해서, 사라져버린 인간미에 대해서 함께 아파하고 또한 분노했다. 그리고 윤소진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인간들, 결국 우리 모두의 일그러진 초상에 대해 그와 나는 함께 욕하고 또한 자조했다.

중간 중간 필름이 끊어졌지만 어쩌다 한 번씩 눈을 뜨면 그와 나는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럼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마천동, 하고 중얼거리곤 했다. 술 마시는 내내 그와 내가 마천동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마천동, 영혼의 집을 잃고 떠도는 자들의 현주소.

***

소설 ‘마천야록’은 지난달 출간된 박상우(44)의 4번째 소설 ‘사랑보다 낯선(민음사 간)’에 수록된 작품이다. 이 소설은 어느 겨울 새벽 서울 외곽 마천동의 한 교회 마당에서 동사체로 발견된 룸살롱 접대부 윤소진을 둘러싼 이야기이다. 소설은 그녀가 죽기 전날 밤 그녀와 만나고 헤어졌던 다섯 사람이 돌아가면서 진술하는 내용을 옮겨 놓는 방식을 취했다.

경찰에서 사건 관련자로서 진술을 하는 특이한 형식에 힘입어 글 읽는 재미가 상당한 소설이다. 다섯 인물은 윤소진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면서 자기 인생에 대해 고백하고, 변명하며, 또한 항변한다. ‘사랑보다 낯선’에는 ‘마천야록’ 이외에도 첫 사랑에 대한 낭만적 회고담을 담은 ‘삼십 세 비망록’ 등 6개의 중·단편 소설이 묶여 있다.

박상우는 1988년 ‘스러지지 않는 빛’이 문예중앙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독산동 천사의 시’ 등을 펴냈다. 99년 ‘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23회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김용석기자 kimy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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