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황병기
저는 가끔 근무하는 직장으로부터 차를 몰고 나가 한 10여 분 거리에 있는 헌 책방에 들르곤 합니다. 그곳에서 만나는 책들은 특별한 경우(출판사가 망했거나, 재고 처분을 위해 새 책을 그냥 출고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가 누군가의 손때 묻은 것들입니다. 가령 얼마 전에 제가 구입한 책은 문화평론가 김창남 선생의 것이었는데 그 책 속지에는 이런 낙서가 있더군요. "김창남과 나는 동갑이다. 그런데 나는 대관절 뭘 하고 있는 거지." 문화와 예술을 주로 다루고 있는 망명지의 성격 탓이 크겠지만, 이곳에는 현재 예술을 배우는 예술학도와 현업에 종사하고 있는 분들도 몇 분 있습니다. 그러나 연극배우부터 유학생까지 그리고 저처럼 예술에 대한 문외한으로 이제 막 입문과정의 사람들까지 즐길 수 있기 때문에 또한 문화와 예술이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이제부터 소개하는 글은 우리나라 국악계의 존경받는 스승이자 훌륭한 가야금 연주자인 황병기 선생의 것입니다. 두 달쯤 전에 헌 책방에 갔다가 발견한 책인데 황병기 선생이 그간 써왔던 짤막한 글들을 편집해 출판한 것입니다. 가끔 글과 문장이 가진 힘에 대해 생각해보곤 합니다. 이 책에 수록된 황병기 선생의 글을 읽으면서 현학적이거나 조금도 멋을 부리지 않은 문장이지만 글에서 풍기는 고졸(古拙)한 멋에 취하게 됩니다. 이런 순간은 정말 글이 곧 사람이라는 말이 맞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일전 게시판에 '열 명창에 고수 한 명'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명창(名唱) 열 명 나오긴 쉬워도 훌륭한 고수(鼓手) 한 명 나오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며 어째서 그런지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꼭 국악을 전공하는 이가 아니더라도 그 길이 어찌 여러 갈래이겠습니까. 전공자분들은 전공자들대로 감상자들은 감상자들대로 나름의 여운이 남으리라 생각하며 군말을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더불어 취해보시길 바랍니다.
고법(鼓法)의 7단계
황병기
얼마전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날에, 학기말 시험 감독을 하고 연구실로 돌아오니, 전주에서 송영주 선생이 곶감 한 접을 갖고 와 기다리고 계셨다. 몇 해 동안이나 뵙지 못했기 때문에 참으로 반가웠다.
점심 대접을 해야 할 텐데….
"선생님, 점심에 설렁탕 어떻겠습니까?"
"그 참 좋지요, 설렁탕!"
신촌역 근처의 '연세 설렁탕집'에 가서 수육 한 접시와 설렁탕을 맛있게 먹고 일어서는데 송선생이 벌써 돈을 꺼내 들고 카운터로 다가간다.
나는 여하한 일이 있어도(송선생이 나보다 먼저 돈을 냈더라도 이를 다시 물려서라도) 내가 꼭 점심 값을 치르겠다는 각오로 송선생 뒤를 바짝 쫓아가면서 허겁지겁 호주머니에 손을 찌른 순간 정신이 아찔했다.
지갑을 집에 두고 나와서 무일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송선생한테 지갑이 없어서 돈을 못 내겠다고 밝히면 변명은커녕 오히려 우스운 꼴만 될 것 같아서, "다음 번엔 꼭 제가 사겠습니다."라고 어설픈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집으로 모시고 와 다과를 들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하는데, 화제는 거개가 판소리와 북에 대한 것이었다.
올해 71세인 송선생은 현재 판소리 북의 대가이지만, 지금까지 무대 출연을 하지 않고 북을 치고 돈을 받지도 않는 순수한 한량이다. 음악을 누구보다도 사랑하지만 음악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을 수 없다는 철저한 조선조의 선비 정신을 지닌 분이다.
그는 음악을 한다는 것, 특히 북을 치는 것이 그의 인생의 도를 닦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지난 60여 년간 북을 치고 또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북에 정진하는 길에 일곱 가지 단계가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첫째 입문, 둘째 초보, 셋째 수련, 넷째 화합, 다섯째 지휘, 여섯째 예술, 일곱째 무아의 단계라는 것이다.
입문에서 수련까지는 북연주자로서 필요한 온갖 기교를 갖추기 위한 단계이며, 화합은 찾아(唱者)와 조화를 이루는 단계, 지휘는 창자를 이끌고 북돋아 주는 단계, 예술은 예술적으로 완성시키는 단계라고 한다. 그런데 연주자로서 최고의 단계를 예술의 단계를 넘어선 '무아의 단계'로 생각하는 점이 재미있다. 송선생의 설명에 의하면, 자기도 무아의 단계에 이르지 못했지만 이따금 그러한 경지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북을 치고 있노라면 때로 자신이 북을 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무아의 경지에 달할 때가 없지 않은데, 아마도 그것이 연주가로서 최고의 단계가 아니겠느냐고 한다.
우리는 어떤 일을 혼신의 힘을 기울여 절실하게 해야 될 때가 많다. 그러한 일들이 있기 때문에 인생이 살맛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에 우리는 모든 것을 잊고 전신투구를 해야 되기 때문에, 고도의 흥분 상태에서 가장 주관적으로 되어야 할 것 같으면서도 실은 가장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되어야 하는 것이 참 묘한 일이다.
며칠 전에 WBC 라이트 플라이급 타이틀 경기의 실황을 TV로 보았다. 아나운서와 해설자는 이구동성으로 우리나라의 장정구 선수가 잘 싸우기는 하지만 멕시코의 움베르토 곤살레스 선수가 너무나 잘하기 때문에 역부족이라고 하면서, 곤살레스를 칭찬할 때마다 "참으로 냉정하군요"를 연발했다.
4각의 링에서 싸우는 권투 선수처럼 죽음까지 각오하고 혼신의 힘을 다하는 사람도 드물겠지만, 그러한 사람이기 때문에 오히려 냉정을 잃지 않고 가장 객관적으로 되어야 한다.
음악은 작곡, 연주, 감상의 세 가지 행위로 이루어지는데, 이중에서 유독 연주는 스포츠와 흡사한 성질을 갖고 있다. 사전에 고도의 육체적인 훈련을 쌓아야 하고, 현장에서 일순도 우물거리거나 뒤로 미루지 못하고 모든 행위를 일회적으로 끝내야 하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자신이 져야 하는 등.
야사 하이페츠가 연주자는 곡예사와 같은 기교, 투우사와 같은 신경, 그러면서도 술집 마담과 같은 배짱을 지녀야 한다고 한 말은 뼈 있는 농담이라 하겠다.
흔히 좋은 연주를 하려면 가슴에서 우러나는 연주를 해야 한다고 한다. 음악은 결코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고 주장했던 형식주의 미학의 교조였던 한슬릭조차도 연주자는 "마음속으로 느끼고 있는 격렬한 흥분, 열정적인 열렬함, 활력과 기쁨을 연주에서 발산해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연주자가 진정으로 감정있는 연주를 하기 위해서는 사력을 다해서 싸우는 권투 선수의 경우처럼 냉정해져야 함은 물론이다.
서양의 고전음악에서처럼 작곡과 연주가 엄격히 나누어진 경우에는 연주자에게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임무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작품을 냉정하게 재현하는 것이다. 특히 스트라빈스키 같은 작곡가는 자기의 작품을 완성된 종에 비유하면서, 연주자는 일체의 주관을 버리고 흡사 종지기가 종을 치듯이 자기의 작품을 객관적으로 연주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서양음악에서 아무리 즉물주의적인 연주법을 강조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참다운 연주가 악보를 기계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즉 연주자는 필연적으로 작품을 자신의 연주 행위에 의하여 재창조함으로써 객관적인 진실과 주관적 진실을 통합시켜야만 한다.
스트라빈스키가 말로는 연주를 종 치듯이 객관적으로 해야 된다고 하면서도, 자신이 실제로 지휘할 때는 오히려 누구보다도 주관적으로 했음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우리의 민속음악은 작품이 악보로 전해 온 것이 아니라 연주자들의 귀에 의하여 전해져 왔다. 즉 작품은 연주자의 귀 속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연주자들은 서양음악에서보다 훨씬 주관적인 연주를 하게 된다.
게다가 판소리의 북 반주처럼 완전히 즉흥 연주를 할 경우에는 더욱 주관적인 연주를 하게 된다. 그러나 연주자의 주관이 극치에 달하여 무아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자신을 벗어나서 새로운 객관성을 얻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음악의 객관성이 철저한 주관성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공자가 인생의 최고 단계라고 설파한"마음이 하고자 하는 것대로 하여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경지와 상통한다고 하겠다.
완전히 즉흥적이면서 주관적으로 뜨겁게 연주하는 듯이 보이는 판소리의 북 반주는 사실은 철저하게 법도에 맞게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연주라는 무아의 단계에까지 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판소리 북을 유달리 '판소리 고법(鼓法)'이라고 부르면서 법(法)자를 강조하는 것이 일리가 있는 것 같다.
1990. 1.
<출전/ 깊은 밤, 그 가야금 소리/ 황병기 지음/ 풀빛/ 1994년 초판 1쇄>
* 저처럼 헌책을 구입해서 읽어 본 경험들은 다들 있을 겁니다. 이웃한 일본만 하더라도 이런 도서 유통 시스템이 매우 효율적으로 구축되어서 책의 수명이 매우 길지만 우리나라 도서 유통 시스템의 난맥상이란 몇 마디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가장 안타까운 사실은 대개의 출판사들이 초판 3~5,000여부를 제작해 대형 서점들이나 대학천이라고 불리는 도서 도매상들을 통해 전국으로 유통됩니다. 제 직업도 직업이려니와 그간 책과 함께 보내며 지켜본 바에 의하면 신간 도서들 중 미디어를 통해 주목받지 못한 대개의 도서들은 서점에서 독자들과 변변히 대면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합니다. 원인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은 우리나라의 독서 시장 규모가 작은 데다가(한 마디로 책 읽는 독자가 적다는 뜻이죠.), 그 질 자체도 일부 베스트셀러나 가벼운 위안서(慰安書) 중심으로 짜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덧붙여 한 해 출판되는 도서의 양을 감당할만한 서점 규모가 형성되어 있지 못하고, 그나마 동네 서점은 참고서 위주의 문방구를 함께 판매하는 소규모 영세업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독자들로 하여금 책을 가까이 할 수 없도록 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헌 책방은커녕 서점조차 귀해지고 있습니다. 올 가을엔 책 한 권 구입해 읽어보시길 권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