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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에 갇힌 여자 ㅣ 스토리콜렉터 63
로버트 브린자 지음, 서지희 옮김 / 북로드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한 겨울, 런던의 한 박물관 호수에서 젊은 여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희생자는 뉴스 매체에서 헤드라인으로 다툴만한 지체 높은 귀족의 딸 앤드리아 - 더글러스 브라운으로, 아버지 사이먼 더글러스 브라운은 이라크 전쟁 당시 정부의 군수 책임자로 활동했던 내각의 정치적 거물이다. 나흘 전 실종된 그녀는 교살된 흔적을 남긴 채 시체로 돌아왔다. 그녀의 시체가 발견된 지역을 관할하는 루이셤 경찰서의 마쉬 총경은 이 복잡하고 까다로운(?) 사건을 해결할 사람으로 맨체스터 경찰국의 에리카 포스터 경감을 불러 온다.
"그의 둘째 딸인 앤드리아 더글러스-브라운이 내 구역에서 실종됐고, 더글러스-브라운 경은 엄청난 압력을 가해 사건 해결을 종용하고 있지. 누굴 고용하고 자를지, 우리 경찰을 손에 쥐고 멋대로 주무를 수 있는 사람이야. 오늘 아침에도 치안감님과 그 빌어먹을 내각 사무처 직원을 차례로 만났는데……."
"그럼 이 일이 총경님 경력에 관련이 있다는 건가요?"
마쉬가 에리카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일단은 그 시신과 용의자의 신원을 파악하게. 지금 당장!"
"네, 총경님. 그런데 왜 저를 택하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혹시 저를 첫번째 희생양으로 쓰실 생각이십니까?"
에리카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앤드리아의 어머니가 슬로바키아 출신이야. 자네처럼……. 난 그 여자가 동질감을 느낄 만한 부하 직원이 있으면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고."
힘의 정치랑은 무관한, 오로지 사건 해결을 목표로 삼는 에리카는 앤드리아를 죽인 살인범을 찾기 위해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를 들쑤신다. 그러나 그녀의 수사는 번번히 방해에 부딪치게 된다. 외부에서 온 인사때문에 수사의 지휘권을 빼앗긴 스팍스 경감의 시기부터 동네의 정보망을 담당하는 대가로 경찰들과 협력하고 있는 술집 주인과의 마찰, 상류층의 의문사에 신이 난 언론, 수사 방향이 마음에 안 들면 수시로 상사에게 직통 전화를 날리는 재수없는 금수저 사이먼 경의 진상짓까지... 그녀의 수사가 이루어지는 과정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든 런던 남부의 인간 생태계는 그야말로 권력의 도가니탕이다.
이 사건에 진정 흥미로운 점은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인물들의 대다수가 진실한 그녀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보여주고 싶은 앤드리아를 멋들어진 말로 포장해 새로운 인물로 도출해 진술한다. 그녀의 약혼녀였던 자일스 오스본, 그녀의 부모인 더글러스 부부의 진술이 에리카가 발견하는 앤드리아의 모습과 상반된 묘사가 서술되면서 진정한 앤드리아는 누구인지, 그녀의 인간관계는 어떠했는지에 대한 허상이 폭로된다.
"저는 사람들이 앤드리아를 생전 모습 그대로 기억해주길 바라요. 아름답고, 젊고, 순수하고, 착실하고 앞날이 창창했던 죄 없는 앤드리아를요……." - 약혼자 자일스 오스본의 진술.
"앤드리아는 예쁜 아이였어요. 그냥 예쁜 걸 넘어서 그 애가 들어오면 방 안이 환해졌습니다. 예쁘고, 연약하고, 또…… 또…….
이제 우리의 삶에 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 아버지 사이먼 경의 진술.
"난 앤드리아가 왜 강 건너에까지 간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그 애가 누군가한테 끌려가 죽임을 당하다니, 우리 아기…… 내 아기, 앤드리아가 죽다니!" - 어머니 다이애나의 진술.
217쪽에 달하는 자료에는 풋풋한 열네 살의 앤드리아부터 관능미 넘치는 스물세 살의 여인이 된 앤드리아까지, 구 년여의 기록이 담겨 있었다. 초기에는 다소 수수했던 옷차림이 남자들이 등장한 뒤로는 도발적으로 변했다.
앤드리아가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들은 거의 대부분 초점이 흔들린 파티 사진과 셀카였다. 잘생긴 남자들과 모델 같은 여자들 사진이 수백 장 있었는데, 그 중 같은 사람이 여러 번 등장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클럽들은 사전 예약을 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고, 테이블 위에는 수많은 샴페인 병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파티광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호화로운 삶을 누렸던 모양이다.
그러나 페이스북상에서 언니 린다와 남동생 데이비드와 교류한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린다와 데이비드가 몇몇 포스팅에 '좋아요'를 누리긴 했다. 하지만 매년 더글러스-브라운 가족이 그리스나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에 있는 빌라로 함께 떠난 휴가 포스팅에 한정됐다.
가족조차도 제대로 모르는 앤드리아의 마지막 흔적에 총력을 기울인 에리카는 드디어 지역 내 허름한 술집에서 그녀를 봤다는 목격자를 찾아낸다. 술집의 바텐더인 여자는 앤드리아가 살해된 날 밤 자신이 일하는 술집에서 짙은색 머리 남자와 금발의 여자와 함께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러나 목격자는 상류층 사건의 증언을 거부하고 사라진다. 목격자를 찾기 위해 추적하나 목격자의 흔적조차 사라진다. 이름도, 사는 곳도, 다 가짜였다. 목격자가 범인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영국 내 불법체류자였다. 바텐더가 일한 술집은 불법 체류자들에게 일자리를 알선한 혐의와 매춘부의 소굴로 알려진 곳이었다. 그런 곳에 상류층 여성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게 좋을 리가 있나. 앤드리아의 포장된 이미지를 지키기 위한 윗선의 압력은 결국 에리카를 수사팀에서 쫓겨나게 만든다.
결국 개인적으로 사건을 파헤치는 에리카의 수사는 제한이 생겼지만 보다 자유로웠다. 부검의 아이작으로부터 몰래 앤드리아의 죽음과 비슷한 3건의 살인 사건이 최근 2년 간 벌어졌음을 알게 된 에리카는 그 실마리를 추적한다. 3건의 살인 사건의 피해자는 모두 찢어지게 가난한 동유럽 출신의 매춘부들이었다. 상류층 여성과 비슷한 방식으로 살해된 매춘부들에게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 걸까. 에리카가 그들의 연관성을 찾는 동안, 서서히 그녀에게 뻗어오는 검은 손길도 같이 움직이게 된다.
<얼음에 갇힌 여자>는 진실에 접근할 수록 더 위험해지는 에리카의 위태로운 상황을 사건이 클라이맥스로 치닫도록 빠르게 녹여낸다. 목숨을 건 형사의 직감과 능력이 살인자를 밝혀내는 결정적 단서가 되어 끝끝내 간발의 차이로 진실을 알게 되는 집약된 소설의 구조도 주목할만 하다.
언론에 실린 사망 보도는 대략적이었고, 희생자를 무시하는 것 같기도 했다.
또 세 여자에 관해 언급한 어느 기사에서는 그들이 오페어(영국에서 아이들을 돌봐주는 대가로 숙식 및 급여를 제공받는 일)로 취업하러 영국에 왔다가 매춘의 길로 '빠지게 됐다.'라고 전했다. 에리카는 정말 그렇게 점진적으로 변했을지 궁금해졌다.
더 나은 삶, 좋은 직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에 혹해서 영국에 왔던 걸까? 아니면 영어를 배우려고?
에리카 역시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오페어 자리를 구하러 슬로바키아를 떠나왔다. 당시에는 영어도 할 줄 몰랐다. 그녀는 으스스한 11월 아침, 브라티슬라바의 버스 정류장을 떠나 영국 맨체스터로 왔다.
무너지기 일보직전인 브라티슬라바의 버스 터미널과 줄줄이 이어져 있는 버스 승강장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각 승강장마다 녹이 슨 쇠기둥이 끝도 없이 긴 지붕을 받치고 있던 그곳은 상당히 습했다.
에리카는 아름다운 조국을 떠나 외국으로 나가는 것만이 유일한 성공의 길이라 믿는 모든 십 대들의 눈물로 그곳이 습해진 건 아닌지 생각했다.
그 아이들이 런던에 도착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쩌다 매춘부가 된 걸까?
특히나 요즘 추리 소설에서 계속 등장하는 불법 체류자들, 반 이민 정책에 대한 현실적인 상황들이 사회상으로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것이 인상깊다. 브리티쉬 드림을 안고 오는 이민자들이 결국 매춘부로 전락하고, 영국정부의 복지 정책 실패와 그들을 향한 빈번한 탄압이 진행되고, 이민자들과의 경쟁에서 진 영국인들이 느끼는 불안함 등이 소설을 더 정밀하고 역동적으로 만든다. <얼음에 갇힌 여자>가 반영하고 있는 사회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계급사회로 인한 인간 혐오와 경제불황에 맞닿아 있다. 각박하고 우울한 현실이 이 소설을 더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역설적인 이익을 가져다준다니. 오묘한 기분이 든다.
원제목이 궁금해서 찾아보니 The Girl in the Ice. 북로드 출판사가 원제를 존중해서 그대로 번역했다. 그러나 소설 전반을 이끄는 앤드리아의 사건으로 제목을 정하기엔 제목이 많이 단순한 느낌이 들었다. 살인범과의 연계성도 가려진 건 두 말할 것도 없고. 부제로 녹슨 꿈이나, 허상의 오발탄이라고 붙여 버리면 원작을 많이 파괴하는 걸까. 굉장히 기대할만한 시리즈인데.
오랜만에 문장을 음미하며 읽는 재미를 선사해 준 책이다. 3시간 몰입해서 읽고 누가 잠든 사이 내 목을 조를까봐 무서워서 1시간이나 늦게 자버리게 만든 이야기의 힘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