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계절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
도나 타트 지음, 이윤기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스릴러 신성의 데뷔작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어디선가 주워 듣고 보았다. 

어릴 때부터 글을 썼고 인정을 받았고 뛰어난 두뇌로 좋은 학벌까지 가진, 과연 천재라고 할 만한 작가의 프로필이 일단은 눈에 띄었다. 뭐 그거야 만나봐야 아는 거지만 일단은 천재라고 하니까 그렇게 믿고. 그 천재가 처음으로 완성시킨 첫 데뷔작이 엄청나게 많이 팔리고 극찬을 받으며 스릴러의 전설 중의 한 권으로 남았다는 데.. 기대를 아예 안하고 볼 순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은 너무 길었다. 두꺼운 책이 두 권이나 된단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천재'의 '레전드'급 소설이라는데 뒤로 가면 재밌겠지, 좀 읽다보면 속도가 붙겠지, 이거 다음엔 깜짝 놀랄만한 내용이 이어질거야, 하면서 계속 읽어나가다가 1권을 겨우 읽고 2권에 이르러서는 그동안 읽었던게 아까워서 계속 읽었다.  

즉 이 책은 쉽게 읽히지도 않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속도감도 없으며 이것 저것 머리를 짜내고 궁리해볼 만한 단서 같은 것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게 무슨 스릴러의 전설이냐 하고 욕할 정도로 이상한 책은 아니다.  

현실적으론 무언가 꿍꿍이가 상당히 있을 것 같지만 자신만의 성전같은 공간에선 독특한 지위와 위엄을 갖고 카리스마를 내뿜는 교수와, 5명의 특색있는 제자들은 시공간이 현재의 나와는 상당히 동떨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외계 이야기를 듣는 듯한 거리감은 없었다.  

오히려 실제로 자신만의 세계에 들어오는 것을 꺼리지만 신비롭고 매력있는 줄리앙 교수, 까만 옷을 입고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헨리, 부드러운 머리칼을 지녔을 것 같은 상냥하고 아름다운 쌍둥이 남매, 희생양 버니, 괴짜 이미지의 프랜시스, 그리고 평범하지만 으레 주인공이 그렇듯 많은 일의 중심에 서있는 리차드. 그 모든 인물들이 어디선가 실제로 살고 있다고 해도 전혀 놀라지 않을 정도의 무게감을 갖고 있었다. 즉 소설속 인물들 뿐만 아니라 그 장소, 건물, 시대, 약간 느슨한 공기와 분위기까지 현실에 없으면서도 정말 있었을 법한 완벽한 '세계'를 창조해냈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9년인가 암튼 오랫동안 구상하고 쓴 소설이라는데 그래서 그렇게 완벽한건지. 쓸쓸하고 약간은 잿빛 이미지, 하지만 어딘가 여유롭고 따스한 느낌이 드는 그 분위기가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이야기의 전개와 결말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말이다. 마치 선선하고 모기 몇 마리가 간혹 보이는 늦여름밤, 스르르 잠이 올락 말락 하는 상태에서 개봉한지 20년은 된 <토요명화> 같은 프로그램에서 방영해 줄 법한 영화를 보고는 마치 그 시대로 시간 여행을 간 느낌, 그 잔상들이 머릿 속에 계속 남아있는 듯한 느낌. 지금 바로 해야할 과제라든가 저녁밥 반찬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그 세계 속에 발을 걸치고 있는 아련한 느낌이 들었다.    

결말 부분도 약간 오래된 영화의 극적인 장면 같긴 했지만, 쌍둥이 남매의 여자(이름이 기억 안난다.)가 주인공의 마음을 듣고 자신의 마음을 청아한 말투로 단언하는 장면은 이상하게 고전적이지만 너무너무 아름다웠다. 회색빛 거리에 갈색 나뭇잎 한 장 뒹구는 그런 날과 상당히 어울리는, 깊은 구덩이를 파듯 시공간을 뒤흔드는 힘이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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