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속도를 늦춰라
카이 롬하르트 지음, 송소민 옮김 / 황금비늘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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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카이 롬하르트의 책 <삶의 속도를 늦춰라>는 성공을 지향하는 사람, 성숙을 지향하는 사람에게 제각각 ‘달리’ 읽힐 만한 소지가 있는 책이다.


성공(success/achievement)지향의 사람들은,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야말로 인지상정이라고까지 확언하기도 한다. 사실 성공 자체는 나쁜 게 아닐 것이다. 성공은 가시적 성과물을 낸다. 그래서 분명해 보인다. 성공의 지점(목표)을 설정하여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면 되니까 (능력이 어느 정도 받쳐주기만 한다면) 간단한 측면이 있기도 하다.


반면 성숙(growth)에는 목표지점 따위가 없다. 그저 과정마다, 매순간마다 깊어지고 넓어지고, 자라고 있는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아는 사람이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했다고 하자. “학위논문 잘 쓰고 무사히 졸업해서 교수자리 잘 얻길 바래”라는 말보다 “공부하는 것을 맘껏 즐겨”라고 축하해준다면 성숙지향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롬하르트의 책 겉장을 보면 ‘삶을 진정한 성공으로 이끄는 여유의 심리학’이라는 작은 제목이 달려있다. 우리나라 책에만 부제가 붙어있다. 겉장에서부터 어쩐지 성공지향의 냄새가 풍긴다. 물론 그 성공에 ‘진정한’이라는 한계를 지어놓았지만. 


<삶의 속도를 늦춰라>에서 롬하르트는, 현대인들의 강박적 삶의 속도를 이렇게 진단한다. 


우리는 하루를 보내면서 행위의 수백 가지 면에서 자신을 잃어버린다. 우리는 앉으면서 벌써 일어설 것을 생각하고, 일어서면 이미 가는 것을 생각하고, 가면서 벌써 도착한 것을 생각한다.(165쪽)


이 책을 읽는 성공지향의 사람들은 ‘삶의 속도를 늦추기’란 새 프로젝트가 눈앞에 놓여있음을 볼 것이다. 잃어버린 자신의 리듬을 되찾아 자연의 리듬을 회복해야 한다는 걸 알았는데, 바로 그 순간부터 자기자신에게로 눈 돌릴 시간 없이 프로젝트에 매달린다. 롬하르트가 새 프로젝트의 성공비법들로 제안한 것들을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분야의 대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라(142쪽). 일의 선호도 순서를 없애라(186쪽). 전화기가 울릴 때 곧바로 받지 말고 세 번 정도 울릴 때까지 기다려라. 스스로에게 그리고 전화를 건 사람에게 한 번 웃고 숨을 가다듬어라(80쪽). 여가의 날을 정하라(201쪽) 등등…. 이럴 때는 이렇게 하고, 저럴 때는 저렇게 하라는 사뭇 명령조의 말들이 이어진다. 물론 다 좋은 제안이고 의미있지만, 이 제안들을 다 그대로 이행하려고 한다면 무리가 따를 수 있다. 어찌 보면, 암기력보다 창의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 창의력 증진에 필요한 요인들을 암기하고 있는 사태처럼 보인다.


그러면, 성숙지향의 사람은 어떤 길을 갈까? 자기자신이 느린 사람인지, 빠른 사람인지를 먼저 생각해볼 것이다. 그러면서 “느림이든 빠름이든 모든 속도의 이상화는 명령이며 불안을 동반한다”(179쪽)는 사실을 깨닫는다. 빠른 치타가 있는 반면 느린 달팽이도 있음을 이해한다. 빠름이 이상화된다고 하여 이 세상에서 달팽이를 제거(!)할 수 없고 제거해서도 안되면, 느림을 칭송한다 해서 잽싸게 달려가는 치타를 주저앉힐 수 없음도 간파한다. 


책은, 정말로, 책에 쓰인 글자 자체의 뜻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래서, 글쓴이와 읽는이가 책을 통해 상호작용(interaction)한다고 하는가 보다.


롬하르트의 책 <삶의 속도를 늦춰라>은 ‘독자의 성향에 따라’ 아주 다른 독후감을 산출한다. 따라서 이 책은 성공을 안내하는 지침일 수도 있고, 성공중심 사고방식을 접고 성숙을 탐색하는 명상일 수도 있다.


그런데, 잠깐! 롬하르트는 정작 무얼 의도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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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위젤 지음, 김기수 옮김 / 햇빛출판사 / 198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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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혹,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는가?


세 명이 똑같은 순간에 교수대에 올라갔다. 세 명의 목에 똑같이 올가미가 씌워졌다. 두 명은 어른이고 한 명은 어린아이다. 두 명의 어른은 “자유 만세!”라고 외쳤다. 그러나 아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누군가 외쳤다. “하느님은 어디 있는가? 그분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라고….


수용소 소장의 신호가 떨어지자 세 개의 의자가 동시에 쓰러졌다. 수용소 전역에 정적이 쫙 깔렸다. 두 어른은 이미 살아있지 않았다. 그들의 늘어진 혀는 부어오른 채 푸른 색깔로 변해있었다. 그러나 세 번째 줄에 매달린 소년은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혀는 여전히 붉었고, 두 눈도 아직 생생했다. 누군가가 또 외쳤다. “하느님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때 나는 나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어떤 음성을 들었다. “그분이 어디 있느냐고? 그분은 여기 있어! 여기 저 교수대에 매달려있어….”(123-4쪽)


이 이야기가 적혀있는 책이 바로 <밤>이다. 이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의 소제목은 ‘천사의 교수형’이다. 천사의 교수형이라, 이야기의 내용에 더 충실하게 하자면 ‘하느님의 교수형’이 아닐지…. 15세 소년의 눈에 비친 또 다른 소년의 교수형은 하느님의 교수형에 다름 아니었으니.


1928년 태어난 유태인 엘리 비젤(Ellie Wiesel)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들어갈 당시 15살 소년이었다. 그는 수용소에서의 첫날밤에 대하여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수용소에서의 그 첫날밤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인생을 하나의 길고 긴 밤으로 만들어버리고, 일곱 번 저주받고 일곱 번 봉인한 그날 밤을 나는 결코 못 잊을 것 같다. 또한 그 연기를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고요하고 푸른 하늘 아래 뭉클 솟아오르는 연기로 변해버린 어린아기들의 그 작은 얼굴들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신앙을 영원히 소멸시켜버린 그 불길들을. 살고 싶은 욕망을 내게서 영원히 앗아가버린 그날 밤의 그 침묵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의 하느님과 내 영혼을 죽이고, 나의 꿈을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한 그 순간들을 못 잊을 것이다. 하느님처럼 오래 살아야 할 운명이 되더라도, 나는 이 모든 것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74쪽)


연합군의 전선이 옭죄어오자 독일군들이 수용소에 있는 유태인들에게 이동을 지시한다. 그것은 죽음의 행군이었다.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행군에 참여하였다. 행군에 참여하지 못해 남은 환자들은 모두 몰살될 것이라는 소문이 횡행하였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행군대열에서 누락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한편 <안네의 일기> 속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건강이 너무 나빠져 죽음의 행군에 참여하지 못했는데, 바로 그랬기 때문에 살아날 수 있었다.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1945년, 16살에 비젤은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는 그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다.


거울 저쪽에서 하나의 해골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를 노려본 그 해골의 눈초리를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다.(206쪽)


내가 나 자신(유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수용소에 잡혀들어가야 하고, 내가 나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고난을 겪어야 한다면 나는, 인생에 대한 나의 신앙을 지킬 수 있을까?


비젤은 수용소에서의 첫날밤, 그날 이전까지의 신앙을 소멸시켜버린 그날 밤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 첫날밤 이후로 그에게 하느님은, 기분이 좋아지면 인간들에게 ‘이른바 삼박자 축복’을 하사하는 요술쟁이 할아버지 따위는 아니었을 것이다. 간결하고 담백한 문장으로 비젤은 하느님의 죽음을 서술한다.


그리고 그는 교수형당한 하느님의 부활을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다. 섣부르게 희망을 읊조리지도 않는다. 그는 하느님의 죽음, 하느님의 부재를 말하면서 책을 맺는다. 이제 읽는이는 ‘하느님의 죽음, 하느님의 부재’가 우리들이 언제든 불러들일 수 있는 현실이 됨을 느끼며 정신을 번쩍 차리게 된다.  


나치가 유태인들에게 저지른 일은, 그리고 그러한 나치에 협력하는 일은 ‘그들’만이 행할 수 있었던 짓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너/나’를 날카롭게 구별하고, 그 ‘너’들을 무시하거나 미워하면서 ‘나’와 다른 ‘너’는 필요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현실(하느님의 죽음, 하느님의 부재)은 바로 우리 곁에 성큼 내려앉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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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손길 - 어린이 성폭력 예방을 돕는 이야기 내인생의책 그림책 2
샌디 클레븐 지음, 조디 버그스마 그림, 이승숙 옮김 / 내인생의책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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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명백히 다정하지 않은 손길에 대해서는 잘 거부한다. 때리기, 쥐어박기, 물어뜯기, 밀치기, 걷어차기, 꼬집기 등의 행위를 당하면 울거나 짜증내거나 똑같은 행위로 보복(!)을 하기도 한다.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것을 즐기는 아이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군가 부드럽게 아이 몸을 쓰다듬고 간질이다가 불쑥 아이의 팬티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다면 그 아이는 즉시 “안돼요!”라고 거부할 수 있을까? 동네 아저씨가 상냥하게 웃으면서 아이 손을 잡아 끌어 아저씨의 성기를 만져보라고 한다면 그 아이는 금방 “싫어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정한 손길>은 어린이 성폭력을 다룬 동화책이다. 책표지에는 ‘엄마가 소리내어 함께 읽는 어린이 성폭력 예방을 돕는 이야기’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심각하고 재미없는 동화책일 거라고? 그렇지 않다. 매 장마다 펼쳐지는 조디 버그스마의 부드럽고 앙증맞은 그림은 성폭력이라는 심각한 주제에 불편함 없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해준다.


<다정한 손길>의 원제목은 ‘The Right Touch’다. 이 책은 ‘세심하게 교육한다면’ 어린이들이 올바른 접촉과 올바르지 않은 접촉을 구분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책에 등장하는 지미의 엄마는 지미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많은 아이들이 안전하지 않을 때는 조심하라는 위험신호를 느낀단다. 위험신호가 올 때는 불안하기도 하고 배가 아프기도 해. …(중략)…. 간지럽고 따끔따끔한 느낌일 수도 있고.”(23쪽)


다시 말해 자기의 느낌에 충실하라는 얘기다. 상대방이 아무리 어른이고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더라도 자기의 느낌이 그 순간 ‘이건 아니다’라면 저 어른의 말을 따를 것이 아니라, 자기의 느낌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지미의 엄마가 설명해주는 위험신호는 저 멀리 신호등에 불이 켜지는 것으로 확인되는 것도 아니고 지나가는 딴 어른이 알려주는 것도 아니다. 위험신호는 오로지 자기자신의 느낌일 뿐이다. 그러자 지미는 말한다.


“난 뽀뽀도, 안아주는 것도 좋아해요. 하지만 내가 ‘싫어요! 안돼요!’하고 말하면 날 만지지 마세요.”(32쪽)


사랑하는 마음으로 뽀뽀하고 안아주는 것, 성적 쾌락의 도구로 뽀뽀하거나 안아주려 하는 것을 아이가 구분 못하면 어떡하냐고? 혹 그렇더라도 그건 그 아이의 잘못이 아니다. 지미의 엄마는 “네게 그런 일이 일어나면 무서워도 엄마에게 꼭 말해야 해. 아무리 비밀이라고 했어도 엄마에게 말하렴. 그건 절대 지미 네 잘못이 아니란다”라고 당부한다.


어린 소녀가 잘못하여 임신하면 다른 사람들한테는 다 자기고민을 털어놓고 상담하면서도 절대로 자기 엄마한테는 얘기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는 경우를 가끔 보곤 한다. 엄마가 자기를 창피해할 것 같다면서…. 또, 자기를 야단칠 것 같다면서….


그래서, 아이들에게 올바른 접촉과 올바르지 않은 접촉을 구분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기 전에 먼저 나는, 엄마들에게 이렇게 물어보고 싶다. “아이의 말을 믿으세요? 아이의 느낌을 존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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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나도록 용서하라
제럴드 잼폴스키 / 한국경제신문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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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진심으로, 이 책의 제목대로 ‘눈물이 나도록’ 용서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면 그 사람이 똑같은 상처를 또 줄까 봐 용서하기가 어렵다. 내게 피해를 입힌 사람을 용서하면 그 사람의 가해행위가 옳고 멍청히 피해를 입은 내가 틀렸다고 자인하는 것 같아서, 용서하기가 어렵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용서하면 그 사람의 부당행위를 정당화해주는 듯하고 그러면 내가 억울해지니까, 또 용서하기가 어렵다.


아니, 아니다. 용서하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용서하리라 ‘마음먹는’ 게 어렵다. 실제로 용서를 여러 번 해보고 “어렵다 어려워”하고 투덜거리는 게 아니라 ‘이다지도 용서할 마음이 안 생기는 것은 그만큼 용서하는 게 어렵기 때문이지’라고 지레짐작해왔던 것은 아닐까.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용서가 잘못된 사태에 대하여 ‘묵인하거나 없던 일로 덮어두는’ 게 아니라는 점. 


전세계에 태도치유센터를 설립하고 운영해나가고 있는 정신과 의사인 제럴드 G. 잼폴스키는 우리가 용서하려는 마음을 먹지 못하는 이유는 ‘에고의 목소리’를 듣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에고의 목소리가 언제나 두려움에서 나온다고 강조한다. 에고의 목소리는, 용서해서는 안 될 이유들을 수시로 알려준다.


“그 사람이 너한테 상처를 입혔어. 네가 화내고 벌주는 게 당연해.”

“네가 용서하면 그 사람은 똑같은 짓을 반복해서 저지를 거야.”

“용서해주면 그 사람이 옳고 네가 틀렸다고 자인하는 거랑 똑같다구!”

“너에게 상처입힌 사람과 거리를 유지하려면 용서하지 않는 게 최선이야.”

“용서하지 말고 그냥 있어. 복수하는 좋은 방법이 그거니까. 그래야 기분이 좋다구.”

“용서하지 않으면 네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힘을 휘두르게 돼.”

“용서는 나쁜 행실을 묵과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상대방이 진심으로 사과하는 경우에만 용서해.”

“맨날 다른 사람이 잘못하는데 용서는 왜 네가 해?”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그가 네 안의 참을 수 없는 점을 똑같이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절대 믿지 마.” (85-87쪽)  


인간관계에서 타인이 원망스럽고 미울 때 우리 마음 속은 이런 말들로 가득 차곤 한다. 용서하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거라는 두려움은 평화를 밀어낸다. 두려움은 용서하지 말자는 고집센 마음상태를 유지하도록 이끈다. ‘용서 안 하기’를 지속하기 위한 에너지 소모(상대방을 비판하기 위한 논리 구축)가, 용서했을 때 생길 파장보다 적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용서가 무비판적으로 그 사람의 뜻에 동의한다는 표시이거나, 상처주는 그 사람의 행동을 묵인하겠다는 표현이 아니라는 점이다.


내 친구가,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한테 “넌 왜 한글을 제대로 못 읽냐?”고 불같이 화를 낸 적이 있다고 한다. 몇 시간 지난 뒤 내 친구가 아이한테 “화내서 미안해. 엄마를 용서해줄래?”하고 말을 건넸다. 그랬더니 그 아이가 엄마를 빤히 쳐다보며 빙그레 웃으며 하는 말, “난 엄마를, 아까 벌써 용서했어!” 내 친구는 아이의 그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다 한다.


진심으로 용서해본 사람은 용서가 잘못에 대한 동의, 나쁜 행동에 대한 묵인이 아님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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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탄생
캐롤 길리건 지음, 박상은 옮김 / 도서출판빗살무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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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피드(에로스)는 사랑의 신이다. 프쉬케는 아름다운 사람(여성)이다. 프쉬케의 미모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에 필적할 만하였고, 사람인 프쉬케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느라 사람들은 여신에게 소홀해졌다. 아프로디테가 발끈했다. 그녀는 아들 큐피드에게, 프쉬케가 흉측한 괴물과 사랑에 빠지도록 하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큐피드는 어머니의 명령을 수행하던 중 프쉬케를 사랑하게 된다. 그는 그녀와 큰 성에서 밤마다 만나 사랑을 키워가지만, 프쉬케에게는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금한다. 그러나 연인의 얼굴에 호기심이 생긴 프쉬케는 금기를 어기고 큐피드의 얼굴 가까이로 등불을 갖다댄다.  


그 즉시 큐피드는 프쉬케를 떠나는데 프쉬케는 큐피드의 다리에 매달린다. 매달린 프쉬케를 떨쳐버리고 도망가는 큐피드, 그러나 프쉬케는 큐피드와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마침내 그녀는 아프로디테가 명령하는 어려운 시험까지 모두 겪어낸다(주위의 도움도 적절히 받아가면서). 마침내 프쉬케는 프쉬케는 큐피드와의 사랑을 이루어내고 만다. 그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딸의 이름이 ‘기쁨’이다. 자기 마음이 이끄는 대로 정직하게 사랑을 따라 움직였던 프쉬케의 사랑이 기쁨을 낳은 것이다.  


보통은, 떠나는 남자의 바짓가랭이에 매달리는 여자를 못났다고 여기거나 구질구질하다고 느끼기 쉽다. 그러나 시선을 달리 해보자. 프쉬케는 자신의 사랑에 끝까지 책임지고 자신의 사랑에 솔직한 사람으로 보인다. 반면 큐피드는 금기를 어기면 헤어져야 한다고 했던 자신의 말에 일관성을 갖추기 위해 사랑하는 그녀를 버린 남자다. 그는 사랑을 따르지 않았다.  


길리간은 이 신화와 연관하여 우리 현실의 남성과 여성을 분석한다. 유치원에 다니는 남자아이들과 그 아이의 아버지들, 그리고 사춘기에 다다른 여자아이들을 심층면담하고 부부상담을 하면서 일련의 결론들을 얻어낸다.


길리간은, 남자아이들이 네다섯 살 때 부모로부터 분리독립하면서 사랑을 따르지 않게 되는 ‘남성다움’을 학습하게 된다고 본다. 감성도 풍부하고 눈물도 많고, 무엇보다도 엄마 아빠와 감정교류를 자유롭고 풍부하게 했던 남자아이들이 점차 이른바 ‘남자다움’을 익히면서 감정교류를 차단하고 장난감총을 잡는다. 어느덧 남자는 자기자신의 독립성과 일관성의 훼손을 염려하며 사랑에서 도망치려고 하는 경향을 갖게 된다(큐피드처럼).


반면 여자아이들은 사춘기에 이르러 사랑하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의 목소리를 숨기다가, 결국은 잃어버린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녀들이 자기의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보다 더 어려워지는 양상을 보인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연구(1895년)>에서, 사랑하는 이를 보거나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지당한 수많은 ‘프쉬케’들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는 여성들의 편에 서서 그녀들의 목소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마치 여자들처럼, 외롭고 힘들게 자기주장을 펴나갔다. 그러나 <꿈의 해석(1900)>에 이르렀을 때 그는 더 이상 푸쉬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는 오이디푸스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길리간의 해석에 의하면 오이디푸스 신화는 가부장제(권력, 통제, 위계질서 등)로 향하는 길을 보여준다. 이오카스테(오이디푸스의 어머니이자 아내)는 자신의 비극적 상황을 깨달았을 때 자살한다.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이오카스테와 오이디푸스의 사랑은 금기시되어있으며 명확하게 표현될 수 없다.    

  

프쉬케와 큐피드의 사랑 이야기는 보다 혁신적이다. 프쉬케와 큐피드의 이야기에 나타난 남녀 간의 공정하고 합법적이며 평등한 관계는 가부장제의 종말을 선언하고 기쁨(프쉬케와 큐피드 사이에 태어난 딸의 이름)의 탄생은 새로운 사회질서가 시작됨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33쪽)


일상생활의 질서를 위협할 때 기쁨은 위험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 위험성은 부풀려져 혼돈과 소요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중략)…. 가부장제를 버리고 사랑과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처럼 여겨지며 환영할 만한 일로 생각되지만 실은 정치뿐만 아니라 심리면에 있어서도 모험적인 일이다. 최소한 처음에는 권력과 통제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비칠 것이기 때문이다.(300쪽) 


길리간의 결론은 이러하다. 사랑과 민주주의가, 권력과 통제로 유지되는 견고한 가부장제를 뒤흔들 것이라고…. 그게 불가능할 것 같더라도 바로 그 길이 생명과 기쁨으로 가는 길이니 그 길을 택하라고…. 그 길을 가는 데에는 지도(map)가 필요한데, 우리한테는 그 지도가 있다고…. 그 지도란 다름 아닌 ‘사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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