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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엘리위젤 지음, 김기수 옮김 / 햇빛출판사 / 1986년 10월
평점 :
품절
여러분은, 혹,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는가?
세 명이 똑같은 순간에 교수대에 올라갔다. 세 명의 목에 똑같이 올가미가 씌워졌다. 두 명은 어른이고 한 명은 어린아이다. 두 명의 어른은 “자유 만세!”라고 외쳤다. 그러나 아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누군가 외쳤다. “하느님은 어디 있는가? 그분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라고….
수용소 소장의 신호가 떨어지자 세 개의 의자가 동시에 쓰러졌다. 수용소 전역에 정적이 쫙 깔렸다. 두 어른은 이미 살아있지 않았다. 그들의 늘어진 혀는 부어오른 채 푸른 색깔로 변해있었다. 그러나 세 번째 줄에 매달린 소년은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혀는 여전히 붉었고, 두 눈도 아직 생생했다. 누군가가 또 외쳤다. “하느님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때 나는 나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어떤 음성을 들었다. “그분이 어디 있느냐고? 그분은 여기 있어! 여기 저 교수대에 매달려있어….”(123-4쪽)
이 이야기가 적혀있는 책이 바로 <밤>이다. 이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의 소제목은 ‘천사의 교수형’이다. 천사의 교수형이라, 이야기의 내용에 더 충실하게 하자면 ‘하느님의 교수형’이 아닐지…. 15세 소년의 눈에 비친 또 다른 소년의 교수형은 하느님의 교수형에 다름 아니었으니.
1928년 태어난 유태인 엘리 비젤(Ellie Wiesel)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들어갈 당시 15살 소년이었다. 그는 수용소에서의 첫날밤에 대하여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수용소에서의 그 첫날밤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인생을 하나의 길고 긴 밤으로 만들어버리고, 일곱 번 저주받고 일곱 번 봉인한 그날 밤을 나는 결코 못 잊을 것 같다. 또한 그 연기를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고요하고 푸른 하늘 아래 뭉클 솟아오르는 연기로 변해버린 어린아기들의 그 작은 얼굴들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신앙을 영원히 소멸시켜버린 그 불길들을. 살고 싶은 욕망을 내게서 영원히 앗아가버린 그날 밤의 그 침묵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의 하느님과 내 영혼을 죽이고, 나의 꿈을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한 그 순간들을 못 잊을 것이다. 하느님처럼 오래 살아야 할 운명이 되더라도, 나는 이 모든 것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74쪽)
연합군의 전선이 옭죄어오자 독일군들이 수용소에 있는 유태인들에게 이동을 지시한다. 그것은 죽음의 행군이었다.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행군에 참여하였다. 행군에 참여하지 못해 남은 환자들은 모두 몰살될 것이라는 소문이 횡행하였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행군대열에서 누락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한편 <안네의 일기> 속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건강이 너무 나빠져 죽음의 행군에 참여하지 못했는데, 바로 그랬기 때문에 살아날 수 있었다.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1945년, 16살에 비젤은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는 그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다.
거울 저쪽에서 하나의 해골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를 노려본 그 해골의 눈초리를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다.(206쪽)
내가 나 자신(유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수용소에 잡혀들어가야 하고, 내가 나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고난을 겪어야 한다면 나는, 인생에 대한 나의 신앙을 지킬 수 있을까?
비젤은 수용소에서의 첫날밤, 그날 이전까지의 신앙을 소멸시켜버린 그날 밤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 첫날밤 이후로 그에게 하느님은, 기분이 좋아지면 인간들에게 ‘이른바 삼박자 축복’을 하사하는 요술쟁이 할아버지 따위는 아니었을 것이다. 간결하고 담백한 문장으로 비젤은 하느님의 죽음을 서술한다.
그리고 그는 교수형당한 하느님의 부활을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다. 섣부르게 희망을 읊조리지도 않는다. 그는 하느님의 죽음, 하느님의 부재를 말하면서 책을 맺는다. 이제 읽는이는 ‘하느님의 죽음, 하느님의 부재’가 우리들이 언제든 불러들일 수 있는 현실이 됨을 느끼며 정신을 번쩍 차리게 된다.
나치가 유태인들에게 저지른 일은, 그리고 그러한 나치에 협력하는 일은 ‘그들’만이 행할 수 있었던 짓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너/나’를 날카롭게 구별하고, 그 ‘너’들을 무시하거나 미워하면서 ‘나’와 다른 ‘너’는 필요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현실(하느님의 죽음, 하느님의 부재)은 바로 우리 곁에 성큼 내려앉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