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기적이다 - 현대의 미신에 대한 반박
웬델 베리 지음, 박경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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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기적이다. "Life is a miracle." 삶 중에서 기이한 일, 특별한 일, 초자연적인 일이 아니고 '그냥 삶'이 기적이다. 먹고 자고 씻고, 출근하거나 등교하거나 집안일하거나 공부하거나 일터에서 일하거나 놀거나 하는 것, 그런 일상이 바로 기적이다. 그럴 만도 하다. 자동차는 쌩쌩 달리지, 범죄자들은 수두룩하지….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이 풍진 세상, 별 탈 없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 아니면 달리 무엇이 기적이랴.


그런데, 그런 것 모두를 기적이라고 부르자니, (솔직히 말해) 기적이 좀 시시해지는 느낌도 없지 않다. '까'놓고 말해, 일상사를 기적이라고 부르면 '기적'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신비스러움이 어쩐지 반감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어째서 그럴까?


우리는 일상의 삶을 '다 안다'고 생각하고, 또 일상사를 신비롭다고 여기지 않는다. 먹고 마시고 울고 웃고 다투고…, 이런 일들이 신비롭다? 어떻든지 간에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게 사실이다.


헌데, 지금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한 번 깊이 생각해보자. '과연 나는 일상의 삶에 대해 다 알고 있는가?' 웬델 베리는 우리가 삶에 대해 '안다'고 착각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기적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그리하여 그의 책 <삶은 기적이다>는 '알지 못함(1장의 제목)'으로 시작한다.


삶을 경험한다는 것은 뭔가를 "알아내거나"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고통 받는 것이며, 동시에 있는 그대로 삶을 기뻐하는 것이다. 고통 받으면서, 또 있는 그대로 기뻐하면서 우리는 삶을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18쪽


베리의 책 <삶은 기적이다>는 에드워드 윌슨의 책 <통섭>이 바탕하고 있는 환원주의적 세계관에 대항한다. <통섭>을 다 읽어보지 못한 내가 이해하기로 환원주의적 세계관은, 모든 것을 기계로 보고 이해가능·설명가능한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일컫는다고 할 수 있다. 베리는 <통섭>의 저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물론 나는 윌슨의 과학적 지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아마도 그의 지식은 인간이 알아낸 지식으로서 위대하고 경탄할 만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그가 보여주는 태도이다. - 42쪽




우리는 삶을 알려고 하고 그 알아낸 지식으로 기대하고 예측하며 유형화하고 싶어 한다. 그렇게 해서 삶을 더 쉽게 살고자 하고 덜 힘들게 살고자 한다. 그런데 삶을 대상화하여 알아내도 우리의 투덜거림은 변함이 없다.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든 거야!"


우리는 신비 안에서, 기적에 의해 살아있다. 에르빈 샤르가프는 "삶은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71쪽


삶을 기적으로 보면 우리는 죽음도 기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죽음은 단지 건강함의 종착역이자 불건강함의 표지가 아닌 것이다. 암환자가 건강하지 않아서(암세포 때문에) 죽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녀)가 죽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베리는, 죽음을 건강의 일부분으로만이 아니라 '신비'로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212쪽)고 역설한다. 베리의 말처럼, 죽음에 대한 과학적 영웅주의의 표현으로 의료산업이 발달했겠지만,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삶은 기적이다. 그리고 죽음도 기적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맛보는 삶과 죽음 안에 있는 우리는 기적 안에 있다. 그런데 이 말, 가만히 묵상해보니, 참 신비롭다. 기적은 인간이 아닌 신의 작용이므로 '우리가 신 안에서 살고 있다'는 고백을 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 월간<새가정>, 오마이뉴스, 에큐메니안 등에도 같은 글이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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