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좋은 책을 쓰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라던 남편은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실어증
환자로 생각했다. 증오하는 돈도 죽어라 하고 벌었으나 남은 것은 빚뿐이었다. 부모의 병을 고쳐
주지도 못하면서 병원은 그가 죽어라 하고 벌어들이는 액수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돈을 늘
요구했다. 아버지가 돌아갔을 때 그에게는 울 힘조차 없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위로하면서
오랫동안 살아온 종로 청진동 집을 팔아 빚을 갚았다. 나머지로 이 변두리에 작은 집을 샀다. 그런데
물이 나오지 않았다. p 29
.
남편은 신문을 놓지 않았다. 그는 직장에서, 지하도 속에서,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그리고 숱한 배기 가스 속에서 쫓기며 몸둘 바를 몰라하는 자신을 느낀다고 말했었다. 그는 또
출퇴근길의 만원 버스 속에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몇 대씩 줄을 지어 달려나가는 시청 쓰레기차를
본다고도 말했었다. 신애는 남편의 말을 알아듣는다. 얼마나 많은 정신이 날마다 시청 쓰레기차에
실려나가 버려지는가. 그러나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p 30
 
지배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할 일을 준다는 것,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문명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일, 그들이 목적 없이 공허하고 황량한 삶의 주위를 방황하지 않게 할 어떤
일을 준다는 것이다. p 95
.
배를 잃은 늙은 수부가 바다에 떠 있었다. 물 가운데서 그는 목말라했다. p 109
.
「이 병에서는 안이 곧 밖이고 밖이 곧 안입니다. 안팎이 없기 때문에 내부를 막았다고 할 수 없고
여기서는 갇힌다는 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벽만 따라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죠. 따라서 이
세계에서는 갇혔다는 그 자체가 착각예요」p 228
.
「자주 가는 산봉우리에서 그들을 만났다. 내가 방금 안주머니에서 꺼낸 이 작은 지도가
그들에게서 받은 HR도이다. 내가 갈 혹성은 이 지도의 왼쪽 위에서 바른쪽 아래로 내려가 구부러진
대각선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 그곳 혹성인들은 식물처럼 무기물에서 유기물을 합성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 이상 좋은 소식을 제군은 들어본 적이 있는가?」 p 276

 

[북리뷰]

영희가 영하 3도의 기숙사에서 겨울을 보내는 동안, 나는 돈 1만 원을 주고 고친 기름 보일러로 별
탈없이 또 한 겨울을 났다. 서울의 겨울은 쩡ㅡ 소리가 난다며 외풍심한 내 단칸방을 걱정하던
모모씨는 어느 날인가 종이 문풍지를 사와 창문 구석구석을 막았고, 나는 6인용 식탁보를 창문에
걸어놓고는 천연덕스럽게 거기에 창문이 있다는 사실을 내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잊혀진 창문에서는 더 이상 외풍이 스며들지 않았다.
_
모모씨는 언제나 4킬로짜리 쌀을 사다 먹는다. 그는 그것이 야반도주의 기본자세라고 말했고,
나는 그 자그마한 쌀 봉다리에서 쌀을 풀 때마다 금방이라도 쌀이 바닥날 것 같아 가슴이 설렁ㅡ
내려앉는다고 말했다. 과거의 안쓰러운 기억. 쌀 바가지가 쌀통의 빝 바닥을 훑고 지나가는 소리같은
것 말이다. 가난은 그것이 이미 지나가 버렸을 때에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가난한
사람은 아무도 '가난'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 않는다. 모모씨는 구김살없는 미소로 환하게 웃으며
그럼 앞으로는 8킬로짜리 쌀을 사다먹어야겠네ㅡ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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