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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읽기 전 주의- 스포일 다수 포함, 스크롤의 압박)

 사랑이란 무엇일까. 삶이란 무엇일까. 나는 누구일까. 이것은 소설가에게 있어서 영원한 화두이자 끝없는 창작의 샘터이다. 19세기 본격적인 소설의 시대가 펼쳐진 이후로 수많은 소설에서 이 화두가 회자되고 또 회자 되었다. 당장 당신의 책장에 있는 소설을 쭉 훑어 보시라. 고개를 끄덕끄덕 거릴 수 밖에 없다. 삶과 자아와 사랑을 빼고 나면 사람에게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말이다.

 당신은 기계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기실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느낄 수 있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같은 시간에 밥을 먹고 같은 시간에 잠을 자고 그 과정에 있어서 조금의 오차는 있을지언정 아마 떠올리면 다 엇비슷 할 것이다. 심지어 사회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때에도 항상 같은 일과를 하고 만다. 당신의 취미가 독서라면 그 시간엔 책만 다르겠지만 독서를 할 것이고 텔레비전 시청이라면 프로그램은 다르겠지만 텔레비전 시청을 할 것이다. 시간이 바뀌고  대상이 바뀌어도 행위 자체는 같은 것이다.

 주인공이 딱 그런 사람이다. 그는 학교 선생이다. 학생들을 가르친다. 취미는 수학이다. 집에 와서는 수학을 푼다. 점심은 도시락이다. 항상 같은 도시락 가게에서 도시락을 산다. 

 위에서 당신의 삶이 그렇게 무한정 반복되는 삶처럼 느낀다면, 또 하나 물어 보고 싶다. 당신은 죽고 싶은가? 인생에 목적이 없는가? 이것에 대해서는 천차만별의 이유와 변명으로 대답이 달라질 것이다.

 주인공은 죽고 싶어했다. 인생에 목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반복된 행위에 대해서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죽으려 했다. 집에서 목을 매려고 하는 그 순간에 누군가 찾아 왔다. 그 적막하고도 심지어는 죽음의 기운마저 감도는 슬픔보다는 고적한 그 곳에 누군가 찾아 왔다. 그 때 주인공은 느끼고 만 것이다. 찬란한 생의 반짝임을 말이다. 그리고 그는 계획을 변경 했다. 아니, 전과 행위는 같다. 하지만 대상이 바뀌었다.

 그렇게 그의 헌신은 시작 ‰榮?

 이 얼마나 단순한가. 자신에게 생의 반짝임을 일깨워준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그에 보답한다는 내용. 그런데 여기서 나는 배신감을 느끼고 말았으니. 이는 스릴러에서 언제나 나오는 살인사건의 주인공에 대한 일말의 동정과 살인의 동기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를 하게 만드는 과정에 대한 배신감 이었다. 

 소설의 중간까지 가자 나는 결말에 대한 대략적인 추측을 했다. 나는 본디 의심이 많은 사람이고 스릴러를 보는데 나름의 원칙에 입각하여 보기 때문이다. 참고로 원칙들은 이렇다.

 제 1의 원칙. 등장인물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만 나오니 고로 모두 주의 깊게 보자.

제 2의 원칙. 1의 원칙을 향하여 2번 이상 등장하지 않는 사람은 더욱 주의 깊게 보자.

제 3의 원칙. 사건의 정황을 봐서 이해불가 점이 있다면 2의 원칙에 합당한 사람과 연계 시키자.

제 4의 원칙. 2번 이상 나오는 아이템이나 대사 혹은 사상은 절대적으로 의심하자.

제 5의 원칙. 3의 원칙에 향하여 확실하게 말하지 않고 가정형으로 된 것에 주목하라.

제 6의 원칙. 사건을 풀어나가는 사람의 흐름은 냅둬라. 그것은 반전을 위한 흐름이다.

 이 여섯 가지에 입각했을 때 제 2의 원칙에 의하여 나는 사건을 추리했다. 사족이 길었다.

 상기했듯 살인범이 싸이코인 경우가 아니라면 보통의 스릴러에서는 살인범의 동기에 모순적인 동의를 하게 만든다. 그 동의라는 것은 그래, 나라도 이렇게 당했다면 복수하게 싶겠어 정도의 연민에 의한 동의다. 나는 중간에 스토리를 아우르고 주인공이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해서 주의 깊게 봤다. 후반에 갈 때까지는 주인공의 무료한 삶을 보면서 불쌍하고 심지어는 눈물마저 흘릴 뻔 했다. 그래서 더더욱 결말에 있어서 나는 배신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으리라.

  그의 맹목적인 헌신에 대한 모두의 슬픔과 모두의 동의와 모두의 찬사를 보고 나는 역겨웠다. 작가는 여기서 살인이라는 코드를 제목에서 보면 알 수 있듯 최고의 헌신이라는 것으로 사용했다. 그녀를 위해서 그는 심지어 살인까지 했다. 그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라. 라는 식으로 말이다. 많은 스릴러에서 주인공을 정당화 시키는 것을 봐왔지만 이런 정당화는 정말 처음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에는 여러가지가 있으므로 나는 다른 사람의 취향과 방식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살인이 헌신의 도구가 된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물론 동의하지 않아도 하는 수 없는 일이지만. 주인공 자체가 죄를 그렇게 뒤집어 쓰고 싶었다면 다르게 해도 될 일 아닌가. (그렇게 하면 이 소설을 아무런 쓸모가 없어진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죽은 자에 대한 연민은 접어 두고라도 살인의 정당화는 아니더라도 그의 헌신에 있어서 다른 사람에 대한 살인이 단순한 헌신의 발로라고 생각하게 되버리고 이에 대해서 독자들은 아무런 거부감없이 삼킬 것을 생각하니 끔찍한 생각마저 든다. 마지막에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찬미적인 태도만 아니었더라고 그냥 그렇게 치부할 수 있었을 텐데.

 이봐, 주인공이 불쌍하지 않아. 당신의 그런 삐뚤어진 시각은 잠시 접어 두라고. 이건 스릴러고 단순한 소설일 뿐이라고. 하는 다른 이들의 소리가 들린다만.

  우습게도 이러한 정당화를 통한 쇄뇌를 우리는 또 우습게 보고 있다. 뜬금없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예를 들자면. 헐리웃 영화에서 우리가 많이 봤던 전쟁의 참상과 그 안에서 사투하는 영웅들을 보면서 그래 그 사람은 죽일 수 밖에 없었던 거야 라고 생각 하고서 실제로 일어나는 미국의 패권주의적인 전쟁에 대해서는 영화에서 처럼 미화시켜 버리고 마는 그런 것 말이다. 당신은 누군가의 희생에 대해서는 점점 무감각해지고 있는 것이다. 아마겟돈의 마지막 장면에서 성조기가 흩날리고 그 위로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멋진 표정의 주인공이 걸어 오는 것을 보고,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만신창이가 되어 걸어들어오는 군인들을 오버랩 시켜 본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단언하실 수도 있겠다만. 사실 비슷해보인다고 생각한 적인 없는가? 단순한 이미지가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반박한다. 우리가 이미지를 재생 시킬 때에는 단순한 비주얼만 재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와 함께 느꼈던 감동까지 재생하는 것인데, 아마겟돈의 주인공이 걸어 들어올 때의 이미지와 배트공을 학살하고 들어오는 군인들의 이미지가 비슷하다고 오버랩 시킬 때는 자신도 모르게 영화에서 느낀 자랑스러움과 희생주의 정신이 함께 오버렙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나에게 물을 것이다. 당신은 그렇다면 아까부터 주구장창 스릴러에서의 범인에 대한 정당성에 대해서 말을 늘어 놨으면서 왜 자꾸 이런 것을 읽느냐 라고.

 아, 거기에 대해서 나는 여러가지 변명을 늘어놓고 싶다. 뭐 이번 소설에서의 경우라면 주인공을 정당화 시키는 그런 아이러니와 작가의 내면이 우습고도 한 편으로는 재미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나.

 이 소설은 참 재미있다. 수학자에 대한 정보도 얻은 것 같고 새로운 개념의 헌신에 대해서 배웠으니 말이다. 나처럼 삐뚤어진 사람이 아니라면 더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77 페이지 아홉 번째 줄의 '모자'는 '모녀'로 바꿔 주시길. (다른 부분은 죄다 모녀로 하고 왜 이것만 모자인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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