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놀로지, 창조와 욕망의 역사
토머스 휴즈 지음, 김정미 옮김 / 플래닛미디어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데이비드 록펠러는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라면 불만은 진보의 아버지’라고 했다. 이 말로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테크놀로지’를 이해하면 간단할까. 인간의 역사가 진보하는가 반복하는가 하는 이야기는 일단 제쳐두고, 테크놀로지의 역사는 진보를 거듭하고 있다. 성경에서 이르는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부터 인간은 대지에 인간의 세상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집을 짓고 다리를 짓고 건물을 올리고 심지어 이제는 강을 바꾸고 산을 없애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것의 아래에는 테크놀로지가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물론, 필요가 있다. 테크놀로지는 하나의 목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방법이다. 인간이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쌓아올리는 바벨의 탑과도 같다. 좀 더 안락하게 살 수 없을까, 좀 더 편하게 살 수 없을까. 이러한 필요들은 자연스럽게 테크놀로지의 진보를 가져왔고 필요는 애초에 불만으로부터 왔다. 그러하니 록펠러의 말이 어찌 맞지 않으랴.

저자는 이러한 테크놀로지의 역사를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주로 19세기 산업혁명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서양의(혹은 서양사관의) 테크놀로지 역사다. 테크놀로지가 발명과 혹은 필요 불만으로부터 왔고 지금에까지 이르렀다면 분명 좀 더 바람을 잘 막고 비를 잘 피하기 위한 움막을 짓기 시작한 때부터 테크놀로지를 이야기해야 맞다. 하지만 저자는 굳이 19세기의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테크놀로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물론 저자는 테크놀로지는 그 하나로도 분명 창조이며 필요만으로 쌓는 작은 옹벽이 테크놀로지라고 하진 않았으나― 그것은 이 책의 맹점 중에 하나다. 테크놀로지 자체의 명제와 어울리지 않게 기계문명과 테크놀로지를 한 데에 묶어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서양에서 시작된 산업사회와 기계문명이라고 해야 옳겠다. 이 책에는 오로지 미국과 유럽의 테크놀로지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특히 현대 사회에 이르러서도 시종일관 서구의 테크놀로지만 다루고 있다. 반쪽짜리 테크놀로지의 역사인 셈이다. 이런 반쪽의 테크놀로지의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분명 저자의 의도 중에 하나일 테지만― 테크놀로지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은 영국에서 이루어진 산업혁명이지만 신대륙에서 황무지 위에 진정한 인간의 도시 건설을 꿈꾼 청교도들의 나라 미국이 테크놀로지의 정점에 서있다는 것. 그러니 이 책은 어쩌면 미국 테크놀로지의 역사라고 해야 옳다.

미국의 예를 들어 설명한 테크놀로지의 역사가 이 책의 전부라고 감히 단언하고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다른 것은 무엇인가. 크게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생태기술학의 역설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테크놀로지의 폐해다. 테크놀로지가 발전을 하면서 무시된 것이 있다면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아마 자연의 파괴일 것이다. 인간의 입맛대로 산을 깍고 거기에 건물을 세웠으니 어째 자연이 멀쩡할 수 있을까. 건물은 아예 세우지 않았던 것처럼 헐 수 있지만 산은 다시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는 법. 지금에 와서야 우리는 망가진 자연으로 입은 피해를 떠올리고 부랴부랴 복구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문제는 아이러니 하게도 여기에서 또 떠올리게 되는 것이 테크놀로지라는 것. 이른바 생태기술학. 좀 더 진보한 테크놀로지로 다시 생태를 복구하겠다는 이러한 열망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저자는 분명 환원주의를 비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자연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다시금 인간이 가진 마지막(?) 힘인 테크놀로지로 해결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생태기술학이라는 것도 역시 결국에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

이러한 아이러니와 아이러니를 헤치고 문뜩 나는 소쇄원이 생각났다. 뜬금없지만 그들이 말하는 생태기술학이라는 것이 사실은 이미 조선시대에 선조들이 하던 방법이었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담장을 칠 때 나무가 있으면 베지 않고 돌아서 담을 쌓았고, 땅을 다지는 것마저 무분별하게 산을 깎는 것이 아니라 지반을 그대로 두고 축조기술을 이용해 평행을 잡았던 저자가 말하는 바로 그 생태기술학. 아무래도 나는 저자가 의도적으로 서양의 테크놀로지만을 언급했던 이유가 동양적 축조기술의 산물들을 외면하고 싶었던 마음에서는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사실, 그러한 생태가 빠진 테크놀로지는 그들에게서 시작된 것은 분명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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