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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나리아
야마모토 후미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창해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플라나리아(Planaria)’에는 표제작이 된 글을 비롯한 다섯 편의 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다섯 편 모두 단편이라는 포맷에 정확히 들어맞는 플롯과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첫 작품인 ‘플라나리아’의 이야기가 무척 좋았기(공감의 의미가 아니라 흡인력이 있다는 의미로서) 때문에, 그리고 더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는 자연스런 기대 때문에, 처음에는 두 번째 글도 당연히 계속 이어서 진행되는 한 권의 장편으로 알았다.
다섯 편의 이야기는 모두 의심할 바 없이 여성 작가에 의해 씌어졌다는 것. 그리고 무척 오랜 습작을 통해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실력을 가진 이가 썼을 거라는 짐작을 가능하게 한다. ‘완성도가 높다’는 말은 찬사임에 분명하지만 내가 싫어하는 방식으로 소설을 해부하는 이들이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쓸법한 말투처럼 보이니 그저 내 식으로 조율(調律)이 꼼꼼히 잘 이루어진(well-tuned) 소설들, 이라고 말하고 싶다.
표지에 적힌 문학상 수상작은 첫 소설 ‘플라나리아’ 이지만, 내가 제일 좋다고 생각한 작품은 맨 마지막의 ‘수인(囚人)의 딜레마(dilemma)'이다. 제목은 많은 분들이 알고 있을 경제학의 이론 가운데 하나인 Prisoner's dilemma theory에서 가져온 것이다(책에서는 수학이론의 일종으로 나오는데 나는 경제학원론을 독습하다가 처음 읽게 된 이론이기에 이렇게 적는다). 사회과학의 한 그럴듯한 이론을 하나 테마로 가져와 여기에 남자 여자라는 등장인물들을 집어넣고 이야기의 살을 붙여 소설로 만든다는 것은 그럴듯해 보이는 만큼 진부하고 역겹게 보이기 쉽다. 거기에 단편이라는 분량상의 제약까지 감수하면서 ’뻔한‘ 이야기가 되지 않게 하려면 소설 속에 들어가는 재료의 조화 말고도 특별한 그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 이것은 작가의 재능일 수도 있고, 소재가 갖는 참신함일 수도 있지만, 내가 이 이야기를 읽으며 ’정말 굉장하다!‘라고 놀란 것은 아무래도 글을 읽는 나의 처지와 공명을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그리고 이것은 추리소설에서 으레 등장하는 반전(反轉)이 주는 충격과도 닮아있다).
소설이 아닌 책에 있어서 특히 신경이 쓰이는 부분은 없다. 표지의 앞뒤에 이러저러하게 적힌 문구들이나 책 뒤의 역자후기가 있는 정도지만 문제 삼고 싶지는 않은데, 그만큼 이 책 속의 이야기들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탓일 것이다. 한 가지 적어놓을 것은, 표지 뒤쪽의 광고문구들을 보면 실린 소설들이 마치 현대사회의 빼곡한 경쟁대오에서 낙오된 이들의 이야기들인 식으로 짐작하기 쉽게 되어있는데, 그것인 이 책속의 주인공들이 부분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격의 한 부분일 뿐이며, 이 소설들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같은 뉘앙스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소설이나 책과는 관계없는 개인적인 깨달음을 하나 적고자 한다. 어마어마하게 지루한 이야기인 사랑에 대한 것이다. 사랑은 고귀(高貴)한 것이니 사람들은 그것이 영원히 지속하길 바란다. 하지만 물리적 속성을 잃지 않고 간직하는 보석이나 희소가치를 지닌 금속들과는 달리 사람의 몸과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랑은 나고, 자라고, 시들고, 또 죽는다. 첫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경험의 부족이나 무모함, 또는 인격의 미성숙 때문이 아니라 그 생명을 소진하고 소멸하는 과정이 역설적으로 너무나 생생하기 때문이다. 흔히들 ‘사랑이 변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과 관련한 문답을 많이 주고받지만 사람이 나고 죽는 것에 대하여는 ‘변한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저 죽었다, 고 할 뿐. 모든 육신을 가진 생명이 유한하듯이 나의 몸과 마음을 빌어 생명을 영위하는 사랑도 그러한 것이다. 사랑할 사람과 결혼할 사람이 따로 있다는 말도 서로 다른 두 생명을 같은 것으로 이름 붙여 보려하는 착시(錯視)같은 것에서 비롯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