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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선뎐
김점선 지음 / 시작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엊그제, 액자걸이를 사서
그동안 방구석에 세워뒀던
김점선 그림을 걸었다
그리고, 오늘 부고를 접하다
난소암이었단다
보고있자면
절로 행복해지는
저 말그림들,
어쩌면 고인의 저세상 입구에
저런 표정의 말들이
마중 나와 있을 것만 같다
세상은 따뜻한 곳이었나요?
뚱뚱해져서 죽어라! 예술가들이여!
마티스처럼 지팡이로도 지탱할 수 없는 뚱뚱한 몸. 그래도 그의 마지막 작품은 모든 걸 바쳐도 아깝지 않은 걸작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걸작을 남겨야 한다. 한 번이라도 예술가라고 불린 자라면 그래야 한다. 무언가를 아끼고 무언가를 조심하느라 주춤거리고 그러면서 좋은 작품이 나오리라고 기대하는 자는 예술가가 아닌 협잡꾼이다. (본문 386p 전문)
난 누군가의 에세이에 내 돈을 지불할 만큼 돈이 많지 않다.
하지만, 교보에서 점선뎐을 들었다가 하필 이 페이지를 읽었다.
그리고 궤변을 졸라 일주일 후에 책을 선물받았다.
결국 내 돈으로 사진 않았네. 쩝
여튼, 그녀의 그림을 언제 접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김중만 사진작가와 공동으로 한 전시회에 간 적은 있다
그녀의 말 그림을 보고 있자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점선뎐'을 읽으면서, 나는 왜
그녀의 말 그림을 보면 행복해지는지 이유를 찾았다
분명 그리는 이는 1946년생 김점선이나,
그건 신체만 그러한 것이고
그리는 주체는 온전히 대여섯살의 꼬마라는 생각이 든다
2005년에, 소설가 박민규의 좌담식 강의를 들으러 갔을때
박민규가 그런 얘길 했다
내 소설은 내 안의 소년이 쓰는 이야기라고.
그래서 내가 그녀의 그림에,
그리고 그의 소설에 쉽게 감화되었나 보다.
꾸밈이 없으니 말이다.
배추와 인간의 나체는 뭐가 다른가? 배추는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벌거벗고 있다. ... 사람은 배추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구성하는 한 종류의 생명체일 뿐이다. '나는 배추하고 사귀면서 놀아야지. 나는 커서 배추하고 결혼해야지. 나는 배추하고 한 몸이 돼야지. 나도 배추로서 일생을 살아봐야지' (본문 21-25p 中)
사춘기를 거치면서 여러 나라 시인들이 쓴 시를 읽고 그들의 생애를 알게 됐다. 수많은 시인들이 후대가 없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 그중에서도 아르튀르 랭보가 제일 불쌍했다. ... 랭보의 지방을 식구들 몰래 차례상 뒷다리, 안 보이는 곳에 붙였다. ... 조상님들이 음식을 잡숫는 시간에 나는 속으로 말했다. '랭보씨, 음식 먹는 시간입니다. 어서 드십시오' (본문 83-84p 中)
아, 귀여워라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자란 아이가 친구면 좋겠다 싶다
아무런 편견없이 그냥 보이는대로 보고 생각하는.
한때, 그녀같은 삶을 동경한 적이 있었다
우연히 접한 그녀의 결혼 비하인드 때문이었는데,
선배 전시회에 갔다가 뒷풀이에서
노래를 썩 잘하는 남자에게 대번 "나랑 결혼하자" 했고
그 역시 그러자 해서 그 후로 20년을 함께 살았다는 얘기였다.
책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나와 있었는데,
예술가라면 마땅히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고 기저귀를 빨기 위해
얼음물에 손을 넣어봐야 한다는 어떤 선배의 얘기에,
부유하게 자란 이대생, 엄친딸은 집을 나와,
노숙자같은 남자와 즉흥적으로 결혼하고
주어진 시간엔 오로지 그림을 그리다 잠을 자는 것으로
삶의 목표를 정했다.
그녀의 붉은 말그림은
물감을 한가지색만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가난 때문이었던 거다.
책을 읽으며 자꾸 고흐 생각이 난 건,
김점선도 참 외골수다 싶어서다
삶의 주체, 오롯이 삶을 자기 식으로 만드는
그녀의 모습은 매혹적이나 여전히 내겐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나는 나쁜 안색의 사람을 좋아한다라고 말했다. ... 죽기 전의 얼굴색이 가장 끌리는 색이다. 건강해터진 인간들을 보면 그 긴 무의미한 인간 역정이 미리부터 피곤하다. 저토록 건강한 저자는 도대체 언제 이 생을 다하고 쉬게 될까? ... 인생이 건강을 유지하는 데 쓰라고 주어진 시간뭉치란 말인가? (본문 46p 中)
요 며칠 줄쳐둔 몇몇 문장을 반복해 읽었다.
그녀가 그림을 그리듯,
나도 무료한 이 생에, 내가 사는 증거를 찾고 싶다.
다시한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행복한 말그림을 남겨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