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말 몰랐던 예수십자가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박삼영 옮김 / 규장(규장문화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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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은 성경과 신학의 주요 테마들을 평신도 눈높이의 언어로 쉽게 풀어 전달하는데 발군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초기 저작 가운데 하나이다. 루터 신학의 잘 알려진 명제 중의 하나인 “십자가는 모든 것을 판별한다”는 명제에 대한 명쾌한 해설서라고 불릴 만한 책이다.


저자의 말처럼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우뚝 서 있다. 하지만 예수의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정말 알고 있을까? 저자는 십자가를 가리켜 “보물상자”라고 부르며, 기독교 2천년 통찰의 보화가 담겨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풍성한 통찰은 교회의 소유인 동시에 또한 이 책을 읽는 독자의 소유이기에, 우리는 저자의 덕분으로 열린 보물상자에 접근하게 된다. 굳게 닫힌 보물상자의 자물쇠가 열려 그 속에서 반짝이는 모든 보화들을 남김없이 보게 되기를 바라던 모든 크리스천들의 소망이 저자의 십자가에 대한 연구와 묵상이라는 코드(열쇠)를 통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십자가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의 풍요로움을 우리에게 선사하기 위해 애쓴 저자의 흔적이 흥건히 묻어난다.


저자는 우선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다섯 종류의 이미지(코드)를 통해 십자가의 의미를 풀어내고 있다. 첫 번째, 전쟁터 이미지를 통해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갖는 의미를 대반전의 승리로 설명한다. 두 번째, 법정 이미지를 통해서는 이신칭의와 양자삼음을 설명한다. 세 번째, 관계 이미지를 통해서는 화해와 용서의 개념을 설명한다. 네 번째, 감옥 이미지를 통해서는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죄로부터의 해방, 속전과 구속을 설명한다. 다섯 번째, 병원 이미지를 통해서는 구원을 치유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이렇듯 저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 용어들을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구원’,‘구속’,‘은혜’와 같은 용어들을 학문적이지 않은 일상 언어로 옮길 수 없다면 그런 크리스천들은 생각이 뒤죽박죽인 상태라는 것이다. 바꿔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은 스스로 자신의 말뜻을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한 반증이기 때문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예외 없이 십자가의 메시지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선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사실 십자가의 모든 메시지는 인간이 처한 어떠한 상황에도 적용되지만, 개개인마다 요구하는 것은 다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기회가 닿는 대로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의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다양한 이해와 묵상이 필요하다. 이는 복음을 전하는 상황 속에서 구도자들(seekers)의 영적인 상황에 맞는 이미지와 언어를 사용하는데 필수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복음을 알고 친구를 알라”는 뜻깊은 조언을 한다.


또한 저자는 십자가에 대한 두 가지 접근법을 소개하면서, 십자가를 주관적으로 이해할 필요성과 객관적으로 이해할 필요성을 일깨워준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우리를 둘러싼 외부환경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또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통찰력있는 설명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더욱 사랑하도록 해줄 것이 분명하다. 십자가는 슬픔과 눈물로 얼룩진 세상을 변화시키는 희망의 상징으로 우리 마음 속에 자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에 십자가는 죽음과 고통의 세상을 상징하는 도구였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통해 죽음과 고통의 세상 한가운데 있는 희망을 상징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뿐 아니다. 이제 십자가는 이 어둔 세상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이 세상 속에서 역사하는 희망을 상징하는 도구가 되었다. 따라서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고, 굳게 붙드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사라질 것이고, 영생의 소망만이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십자가가 단순히 우리가 구원받은 구원의 기초가 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그리스도인답게 만들어주는 핵심임을 잘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십자가와 씨름하는 힘겨운 과정을 통해 신앙의 깊이를 더하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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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길 수 없는 축복, 자유
베스모어 지음, 옥한음 옮김 / 좋은씨앗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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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감수성이 풍부한 저자의 아름다운 필치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예비된 자유를 향한 여정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저자와 함께 이 여행을 마칠 즈음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자유를 맛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 분명하다.


과연 크리스천도 속박당한 채 살 수 있으며, 종의 멍에를 메고 일생을 종노릇하다가, 무지라는 감방에 갇힌 채 포로 상태에서 생을 마칠 수 있을까? 사실 하나님의 자녀는 종이 아니라 권세있는 아들이며, 능력과 자유의 아들들이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 크리스천도 속박당한 채 살 수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 이 책의 저자가 경험한 것처럼, 그러한 주장에 대해 논쟁을 벌이려고만 할 것인가?


그러나 저자의 말처럼 우리가 ‘무언가 속박될 때, 크리스천은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예비해두신 풍성하고도 능력있는 삶, 즉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현재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곧 무언가에 속박당해 있는 증거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포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속박되고, 포로 상태에 매여 있는 매우 실제적이고 다양한 사례들을 제시해주고 있다. 혹시라도 우리가 속한 가정 가운데 대대로 무너져 있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으로 우리를 쉽게 속박하여 실패한 삶을 살도록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저자는 이러한 것들 가운데 알코올 중독, 도박, 포르노, 인종차별주의, 편견, 가족간의 반목 등이 있으며, 이것들은 반드시 끊어버려야 할 세습적인 속박이라고 한다. 또한 우리를 묶는 멍에를 야기시키는 것으로는 가족간의 불화, 상실이나 비극으로 황폐된 삶, 커다란 상처를 치유받길 거부하는 고통의 파편 등이 있다고 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러한 굴레에 묶여 성장해왔기에, 그것을 풍성한 삶을 쥐어짜는 속박이라고 생각하는 대신에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받은 가해, 또는 학대로 인해 형성된 멍에로부터 시작해서, 정욕에 매여 성적인 죄를 저지르거나, 자존감의 결여, 또는 도박의 습관에 이르기까지 속박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제시하고 있다. 그밖에도 우리는 의심, 낙담, 외로움, 쌓여만 가는 불만 등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의 모습 속에서 속박당하고 있는 다양한 사례들을 볼 수 있다.


사실 갈보리의 십자가는 모든 속박과 멍에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십자가의 능력을 경험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보장된 축복이 있다. 저자는 이것을 크리스천들이 당연히 누려야할 다섯 가지 은혜라고 부르며, 또한 ‘장자의 명분’으로 말한다. 그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믿는 삶

2.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3.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는 삶

4.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경험하는 삶

5. 하나님의 임재를 기뻐하는 삶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방해하는 ‘불신’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막는 ‘교만’과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우상 숭배’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경험하지 못하는 주요한 원인인 ‘기도하지 않기’와 하나님 앞에서 기쁨을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율법주의’라는 죄에 매여 있다면 우리는 위에서 말한 다섯 가지 은혜를 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예비하신 이 다섯 가지 중요한 은혜를 누리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포로된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라고 한다. 사실 우리 영혼의 만족감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친밀히 아는데서 오는 것인데, 이러한 장애물은 인격적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크게 방해하는 요소이다. 따라서 저자는 이러한 장애물들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는지 실제적인 사례들을 들어 설명하면서, 자연스럽게 예수님 안에서 내면 깊이 누리는 만족감으로 이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자유의 땅, 곧 죄된 본성을 뛰어넘는 승리의 땅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 머물며, 날마다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는 삶이다. 그리스도의 지혜와 지식이 우리에게 조금씩 영향을 미쳐 마침내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나는 삶이다. 그리고 진정한 자유야말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속박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주재권 아래 묶이는 삶임을 발견하고, 즐거이 그리스도께 매이는 삶이다. 그러할 때, 우리의 감방은 곧 지성소가 될 것이다.


해묵은 죄와 쓴뿌리에 묶인 무기력한 삶을 벗어나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 뛰어넘는 승리의 땅에서 자유의 노래를 부르고픈 모든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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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데로 임하소서
이청준 지음 / 홍성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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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소설 형식을 빌어 안요한 목사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저자의 말대로 이 책은 안요한 목사의 이야기를 씀에 있어서 실제 사실만을 좇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안요한 목사의 정신과 사랑과 소명의 참뜻을 충실하게 담아내고 있다.


저자의 에필로그를 인용해 본다. “그는, 사람에겐 사물을 보는 정신의 눈과 이해하고 생각하는 사유의 눈, 그리고 느끼고 직관하는 영혼의 눈까지, 세 가지 차원의 눈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제 영혼의 눈을 뜨게 되었으므로, 육신의 눈이 어두운 것을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 세 번째 영혼의 눈이란 어떤 눈인가? 그리고 그 눈은 어떻게 하여 개안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이 소설은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바쳐진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영혼의 구원을 꿈꾼다. 그리고 그 길을 얻지 못하고 자기 유한성에 절망하게 된다. 거기서 찾는 것이 절대자의 존재이다. 영혼의 눈이란 바로 그 절대자를 볼 수 있고 만나는 눈이다. 그리하여 구원을 얻는 눈이다. 그러나 그 영혼의 눈은 저절로 개안이 이루질수가 없다. 그것은 먼저 땅 위에 생명을 얻어 난 자로서의 인간의 소명과 그 소명의 자리를 찾아 행함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명을 통하여 절대자를 만나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그 아버지 안진삼 목사는 아들 요한이 태어남에서부터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다. 하지만 요한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그리하여 태어난 것이 안요한복음이다. “하나님은 계시지 않느니라아. 안요한복음 1장 1절”. 그렇게 요한은 아버지의 꿈과 어머니의 간구로부터 멀리 벗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요한을 향한 하나님은 뜻은 변할 수 없다.


그 어느날 요한의 아버지는 요한을 불러놓고, “이 돌멩이를 고물줄 끝에 잡아 매어 보아라. 그리고 그 고무줄을 네 힘껏 돌려 보아라.”며, 미리 준비한 고무줄과 돌멩이 하나를 내어 놓았다. 돌멩이가 매달린 고물줄을 몸 주위로 빙빙 돌릴 때, 고무줄은 돌멩이 무게만큼 길이를 늘이며 주위를 빙빙 돌아갔고, 속도가 빠르고 느려짐에 따라 돌멩이가 그리는 원도 약간씩 크기를 달리 하긴 했지만, 돌멩이는 대체로 일정한 범위의 원주 위에서 회전운동을 계속했다.


그러했다. 요한이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거슬려 하나님을 멀리 달아나고자 했지만, 언제나 주님의 세계 안에서 일정한 범위 안을 맴돌고 있었을 뿐, 결코 하나님을 벗어날수는 없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섭리요, 주권적인 사랑의 역사였다. 하지만 요한은 여전히 그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는 눈뜬 소경이었다.


요한이 결국 병의 원인이나 병증조차 정확하게 알 수 없는 포도막염이라는 안과 질환으로 인해 두 눈을 완전히 실명하게 되고, 그가 의지할 수 있는 모든 육신의 빛이 완전히 꺼져버릴 때까지 그는 숱한 방황 속에서 점점 더 어두운 흑암 속으로 밀려들어갔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끊고자 시도했으나 실패하면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지 못한 채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왔다.


그리곤 이후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온다. 그의 영적인 흑암을 뚫고 휘황한 광채와 향기로 임한 것이다. “나는 너의 여호와니라. 내가 아직 너를 버리지 않았는데, 어찌 너는 혼자라 하느냐…네가 혼자가 아님의 증거를 보이리라. 구약성경 320면이 너의 것이니라.” 구약성경 320면은 여호수아서 1장이었다.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이제 안요한 목사는 기쁨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게 된다. 그리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소명을 발견하게 된다. 그 소명은 곧 새로운 생명의 빛이었다. 육신의 눈을 대신한 영혼의 빛이었다. 그 생명의 빛은 낮은 곳에 임하는 빛이었다. 육신의 눈을 뜬 사람은 볼 수 없는, 영혼의 눈으로밖에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보게 하기 위하여, 육신의 눈을 멀게 하고, 지금까지 그를 인도하신 것이었다.


이후에 안요한 목사는 맹인들의 재활과 복음화를 위해 한국맹인진흥회를 설립하고, 국내 맹인들을 위한 유일한 점자 월간지 <새빛>을 발행한다. 그리고 그의 간절한 염원인, ‘육신의 암흑에서 영혼의 눈을 뜨게 하라’는 자신의 소명을 이룰 맹인을 위한 맹인의 교회인 “새빛교회”를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날품팔이로 생활하는 고아나, 또는 거리 아이들을 위한 야간학교도 개설한다.


안요한 목사의 일대기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 그 헤아릴 수 없는 심연 속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그 깊음 속으로 침잠해가면 갈수록 그 놀라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압도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실체를 보게 된다. 그리고 우리도 그곳에서 나의 소명, 곧 나를 향한 하나님의 소명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깊음 속으로 들어가 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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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으로 사는 인생
폴 투르니에 지음, 정동섭 옮김 / IVP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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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폴 투르니에는 이 책에서 우리 속에서 솟아나는 억누를 수 없는 힘이자, 또한 이를 만족시키면 특별한 내적인 기쁨을 주는 모험심을 일컬어 “인간 공통의 위대한 충동”이자 “하나의 본능”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 모험의 본능이야말로 인간 행동의 배후에 있는 거대한 추진력이며, 이 모험의 본능이 우리의 가치 체계와 결합할 때, 질적인 모험과 양적인 모험으로 구별된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추진력을 불어넣어주는 궁극적인 것에 대한 내적인 욕구가 있으며, 그러한 궁극적인 것에 대한 욕구는 진정한 가치와 질적인 것을 체험하고자 하는 욕망으로써, 이 열망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은 늘 질적인 것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양적인 면에서 보충하고 싶어 한다고 한다.


따라서 모험이 질적인 것에서 양적인 것으로 바뀌게 되면, 그 모험은 비극적인 악순환에 빠져 버리게 되는 위험이 있다. 이것은 각자가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더 높은 지위 상승으로의 모험, 혹은 어떤 일에 미친 듯이 열중하려는 모험, 또는 도박으로의 모험, 그리고 마약으로의 모험 등에 급속히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이밖에도 문화, 예술, 경제,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의 권력에로의 모험 등이 있으며, 심지어는 혼외 정사에로의 모험 등도 있다. 모험의 본능이 이렇듯 무서운 것이구나 하는 두려움마저 든다.


사실 우리 현실의 삶은 우리의 본능과도 같은 모험에 대한 욕구를 충분히 채워주지 못할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노력을 바칠만한 목표를 찾았다는 확신이 들 때, (혹시 잘못 생각했다 할지라도) 자신의 본능적인 욕구를 채우고 있으며, 또 그로 인해 심오한 경험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순간 만큼은 쉽게 정열에 빠져들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행복감은 실제로는 본능적인 욕구가 만족된 데서 온 것이기 때문에 이내 식상해지기 마련이다.


모험이기만 하면 어떤 모험이건 상관없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저자는 “우리의 모험이 진리를 위하고, 정의를 위하고, 타당한 대의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확신이 없이는 그 어느 것도 모험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모험으로 뛰어들어야 할까? 이제 인간의 일의 의미를 생각해볼 차례인 것 같다. 폴 투르니에는 “인간의 일의 의미는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심어주신 모험의 본능을 충족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자신이 한 인간으로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자신의 개인적인 생활과 삶의 모험이 관심의 대상이 됨을 느낄 때, 또한 자신에게 기계적인 행동이 아닌 일에 대한 이해와 총명함, 창의력, 활발한 상상력을 요구한다는 것과 자신이 공동의 모험에 속한 단체의 일원이라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자기 나름의 모험을 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창조적인 활동을 통해 자신을 인격적으로 표출하고 싶어 하고, 자신을 새로운 일에 바치고자 하며, 독창적인 무엇을 발명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격적인 존재인 우리는 일에 대한 정의에 있어서 더욱 영적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물과 세계와 삶의 의미를 알고자 하며, 또한 자신의 노동의 의미를 이해하여 전체 속에서, 곧 세계의 운명 속에서 개인적이고 창조적인 공헌을 통해 자신이 감당하는 역할을 알고자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영적인 존재가 될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우리는 내적으로 모험의 정신을 유지하면서, 아니 우리의 지식이 자라가는 동시에 모험도 더욱 자라가야만 하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된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모험을 성경에 비추어 봄으로써, 우리의 모험을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 맞추는 새로운 지평으로 옮겨가야 함을 알게 된다. 과연 우리의 모험이 하나님과 더불어 하는 것이냐, 또는 하나님께 맞서는 것이냐로 측정해야 하는 것이다. 때로 우리의 모험이 실패한 것 같은 때도 있고, 실패는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줄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겪는 실패는 사실상 실패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최고의 실패인 동시에 최고의 승리인 까닭이다. 십자가는 사실상 하나님의 구원 목적을 성취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이 행복한 것은 바로 하나님과 더불어 시작한 모험이기 때문임을 분명히 알게 된다. 우리는 계속되는 이 모험으로 가득한 인생에서 매순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묵상을 통해 영적인 세계와 세속적인 세계를 이음으로써, 부단히 우리의 모험을 그분의 목적에 맞출 때, 우리 인생의 모험은 곧 하나님 그분의 모험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활동과 생각과 감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험에 들어가고자 애쓰는 것이 바로 삶의 의미인 것이다.”라고 폴 투르니에가 말한 바의 진정한 의미를 가슴 깊이 새기게 된다. 


하나님의 모험은 계속되고 새로워지며 새롭게 솟아나고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창조적인 모험으로 우리를 손짓해 부르고 있다. 그분의 모험 속으로 나 자신을 드리고 싶은 마음을 올려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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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닮기
레슬리 플린 지음, 김태곤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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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 크리스찬들은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갈망을 지니며 살아간다. 이러한 소망은 기독교 역사상 2천여년 동안 모든 크리스찬들의 바램이자 염원이었다. 어쩌면 지난 주일에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자는 설교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을 닮은 크리스찬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다. 기독교 역사상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을 손꼽으라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찾아낼 수 있을까?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하루 종일 입질을 기다리며 낚시를 해도 조급해지지 않는 사람이 집에 돌아와서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잠시도 못 참고 난리법석을 떠는” 것과 같은 류의 크리스찬들이 얼마나 많은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저자는 하나님은 인간의 이상적인 행위를 보여주기 위해, 자기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구주와 본보기가 되게 하셨다고 말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숭고하며, 용감하고, 또한 아름다운 삶은 예수님의 삶이었으며, 또한 우리는 그분처럼 살도록 요청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 말은 신체적으로 닮은 모습이나 특정 상황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등의 추측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수를 이 책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우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임을 분명히 한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엄청난 자기 희생적인 삶에 매료되어, 그러한 삶을 살고픈 소망을 가져 보지만, 다만 겉만의 흉내를 통해서는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 수 없다. 우리 속에 내적인 원동력, 즉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선적으로 요청된다. ‘회심’, 또는 ‘거듭나는’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는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이 책을 통해서 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고서 그 발자취를 따르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영접함으로써, 그리스도와 같은 아름다운 삶의 능력으로 사는 놀라운 경이로움도 맛보게 될지도 모른다.


저자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본받는 일이 절실히 요구되지만 서글프게도 너무도 자주 경시되고 있다고 한탄한다. 특별히 한국 교회에서는 축복, 그것도 신령한 축복이 아닌 물질적인 축복을 중심으로 한 기복신앙이나 방언, 신유 등의 이적신앙 등에 빠져, 기독교의 핵심인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닮는 인격신앙은 안중에도 없는 기이한 현상이 만연해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17세기 청교도 존 오웬은 그리스도의 영광이란 책에서 “만일 우리의 장래 축복이 그분과 함께 하며 그분의 영광을 보는 일에 달려 있다면, 복음 속에 계시된 그 영광을 부단히 주목하는 것이 최선책일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점차 동일한 영광으로 변할 수 있다.”고 썼다. 과연 우리는 신앙의 닻을 어디에 내리고 있는가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란, 그분의 정신을 이해하고 그분의 성품을 함양하며 또한 모든 상황에 그러한 태도를 적용하기 위해 그분의 마음을 품는 것이라고 저자는 정의한다. 우리는 흔히 우리 신앙의 초석을 정확한 교리를 견지하는 것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주로 ‘태도’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마음과 상반된 냉혹하고 다투기 좋아하는 마음을 품고서 올바른 신조를 위한다며 논쟁을 벌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존심과 자기 방어의 부추김에 사로잡혀 격한 말로 대응하기 일쑤이다. 하지만 우리 속에 예수님의 생명이 거하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는 삶에의 연단을 통해서, 푸대접이나 비판이나 격렬한 비방을 당해도 내적인 평정을 잃지 않을 것이다. 이는 이미 우리가 환경의 지배를 받는 삶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다양한 환경의 다양한 사람들이 나타낸, 환경의 지배를 벗어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과연 그들이 보여준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 속에서 엄청난 흥분과 감동의 격정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며 큰 자극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곤 그리스도를 닮은 아름다운 인격과 성품을 함양하고픈 격렬한 갈망을 가지게 될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초상’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에 나타난 사랑의 삶이 곧 우리의 삶이 되는 것으로 귀착된다.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사랑없는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줄 것인가? 바로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닮은 우리의 모습과 변화된 우리의 성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사랑이 아니겠는가! 이 세상이 보고 듣고자 하는 것은 설교조의 말이 아닌, 그리스도를 닮은 사랑의 삶이 아닐까!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강력한 변증이다. 사람들은 설교를 듣기보다는 눈으로 보고자 한다. 만일 우리가 예수께 속했다면, 우리는 그분처럼 살아야 한다.”는 저자의 호소력 깊은 음성이 우리 마음 속에 메아리쳐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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