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고데모, 인간에 대한 두려움에 관하여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 지음, 이성덕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필립 야콥 스페너에 의해 시작된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완성자인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의 작품이다. 프랑케는 1687년 개인적으로 슈페너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성경을 단지 문헌학적인 관점으로 연구하는데서 벗어나 성경을 보다 실존적인 방법, 특히 영혼의 회심과 이성을 초월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원천으로 보게 되었다. 그해 가을 프랑케는 그토록 염원하던 영혼의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 날은 그의 일생의 전환점을 이루게 된다. 프랑케의 경건주의 운동과 고아원 및 빈자학교 사역은 그후에 기도의 사람, 또는 고아들의 아버지로 불린 조지 뮐러에게도 심대한 영향을 끼친바 있다.


프랑케는 많은 사람들이 “니고데모”와 같이 인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참된 변화와 회심을 경험하지 못하고, 눈앞에 밝히 있는 진리를 보면서도 그 능력을 소유하지 못하고, 오히려 위선 속에 빠지게 된다고 보았다. 이 책의 제목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백성들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사람들이 두려워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았던 유대교의 관원이다. 이 책은 프랑케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소심하고 나약한 지식인이었던 니고데모가 어떻게 담대한 신앙의 사람으로 변하게 되었는지를 깊이 묵상한 후 발견한 인간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방법들에 관한 영구불변적인 진리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책에서 갈파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두려움은 신앙적인 측면에서 본 것이다. 즉 하나님 안에서의 회심과 신앙의 각성을 막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고백하기를 주저하게 만들며,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서 멀어지게 하는 두려움을 가리킨다. 그러한 두려움의 결과로 세상과 하나가 되어 온갖 죄악에 얽매이게 되며, 말과 행동으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에 대한 두려움에 빠지는 것은 신분이 왕이건, 제후이건, 귀족이건, 일반 백성이건 차이가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 원인은 바로 없어도 될 이 세상의 영광을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의 권위를 더 따르거나, 이 세상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려는 욕망,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양심을 기뻐하기 보다는 도외시함으로써 오는 무딘 양심의 행복한 결과와 그에 대한 외적인 승리를 얻으려는 은밀한 허영심 등으로 인해 우리는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것은 목회자나 교사를 포함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들이 이러한 인간에 두려움에 빠지는 것이다. 즉 설교자가 설교할 때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사람 앞에서는 책망하지만 신분이 높거나 권력자나 부자 앞에서는 아첨한다든지, 강단에서는 책망을 하다가도 그 때문에 구설수에 오르면 말하고자 했던 것을 부인한다든지, 강단을 방벽과 요새로 삼으나 강단에서 내려와 사람들 가운데서 진리를 말할 때는 굽실거리는 경우 등이다. 따라서 참된 신앙을 입으로 고백하는 것과 십자가를 통해 그러한 고백을 확증하는 것 사이에 커다란 차이를 드러내는 안타까운 경우와 그러한 상황을 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프랑케는 “만일 사람들이 진실한 목회자나 교사들을 권력으로 지배하고 양심을 속박하고 신앙적인 품위를 빼앗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위협할 때, 목회자나 교사들이 담대하게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하지만 “신앙 안에서 극복되어질 수 있는 인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중단한 모든 것은 심판대 앞에 밝히 드러날 것”이라며 경고를 잊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두려움은 이 땅에 속한 지혜이며, 또한 아래로부터 오는 지혜로써, 이러한 지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곳에 터를 잡는다고 프랑케는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위로부터 오는 지혜, 곧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오는 지혜를 통해서만이 신앙 없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어, 바른 신앙의 길로 행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인간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참된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고, 하나님 앞에서 선 자로서의 삶을 시작할 힘과 용기를 얻게 될 것이 분명하다. 칭의 이후 성화의 삶과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지향할 삶의 전환점을 찾는 이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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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부르심
브라더 앤드류 지음, 최요한 옮김 / 죠이선교회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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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때문에 제한과 박해 아래 사는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를 강하게 하고, 세워주고, 또한 격려하는 사역을 지난 50년 넘게 해온 브라더 앤드류의 생생한 간증을 담은 책이다. 브라더 앤드류는 겸손하게 말한다. “지난 50년간의 사역을 뒤돌아보면, 내 삶 속에서 일하시고 내가 드린 조그마한 헌신을 당신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신 하나님의 발자취를 느낄 수가 있다.” 그렇다. 이 책은 그야말로 지난 50년간 불가능한 지역(폐쇄 국가)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신 발자취를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가 러시아군의 침공을 받자, 서둘러 러시아어 성경책과 체코어로 된 소책자를 싣고 체코슬로바키아를 향해 ‘시속 160킬로미터’로 달리는 브라더 앤드류의 무모하지만 당찬 믿음의 출발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곤 내내 우리를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와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현장으로 끌어당긴다. 브라더 앤드류는 러시아, 중국,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중동 등 박해받는 성도들이 있는 곳이면, 그것이 어디든 성경을 들고 복음과 함께 갔다. 그래서 박해받는 교회를 찾아갈 때마다 예수님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기회를 얻고, 고통받는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소중한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해서 브라더 앤드류는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행하신 놀라운 역사의 산 증인이 된 것이다. 


브라더 앤드류는 요한계시록 3장 2절의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복음의 제한 지역에서 복음 때문에 억압과 박해를 당하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놀라운 믿음의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는 브라더 앤드류에게 실로 공산권의 장막과 아랍권 특히 이슬람권의 장벽은 더 이상 장막과 장벽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필요치 않는 곳은 지구상에는 없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의 능력이 미치지 못할 곳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진정 하나님의 보좌를 흔드는 기도, 곧 강력한 중보 기도의 생생한 간증들을 엿볼 수 있다. 브라더 앤드류가 지금까지 선지자적인 사역을 할 수 있었던 저력은 역시 그의 기도에서 온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중보 기도와 대적 기도를 소개한다. 그리곤 그러한 기도에 피땀과 눈물을 더할 것을 호소한다.


종말을 향해 치닫는 이때 무엇보다도 공산주의 국가와 이슬람권이 선교의 마지막 종착지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이에 브라더 앤드류는 “우리는 진취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구원받을 사람이 찾아올 때까지 마냥 앉아 기다릴 수는 없다. 더군다나 그들은 친구가 되자고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혁명론자, 점령군, 테러리스트가 되어 찾아온다.”고 말했다. 이 말은 곧 우리가 먼저 복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가서, 그들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녹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다시 미국의 9.11테러와 같은 참사를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경고인 것이다. 하지만 브라더 앤드류는 무엇보다도 무슬림에 대한 우리 속에 있는 두려움을 벗어버리라고 말한다. 즉 우리는 무슬림을 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복음을 들고 그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실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배경에는 우리가 싸울 적은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사단임을 잊어버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따라서 지금은 정말 우리가 무슬림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때인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곳으로 부르실 복음의 전령, 곧 그리스도의 군사를 준비시키시기 때문이다.


브라더 앤드류는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도전하며, 또한 우리의 믿음을 요구하며 자신과 같은 선지자적 삶으로 우리를 끌어당긴다. 그래서 미국 오픈도어선교회 대표인 테리 메디슨은 “그리스도와 함께 더욱 깊숙한 바다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밀어붙이고 재촉하고 호소하는 일은 브라더 앤드류의 특기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이제 종말을 향해 달리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 자신의 소명에 따라 철저하게 믿음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의 군사의 대열에 동참할 것인지를 마음에 결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좁은 길을 향한 도전, 곧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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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가지 친밀한 관계
레슬리 패럿.레스 패럿 지음, 서원희 옮김 / 이레서원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모든 이들의 관심사인 친밀한 관계와 관련된 문제를 신학과 심리학과 가족치료학의 관점에서 통합적으로 잘 풀어내고 있다. 예리한 통찰과 실화에 근거한 이야기들을 적절히 조화시키고 있으며, 읽기 쉬운 문체로 생동감 있고 또한 매우 흥미롭게 진술하고 있다.


사실 대인관계만큼 인간 성품에 심오한 영향을 끼치는 것도 없다.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는 반드시 남들과의 인간관계를 통해서만 해갈될 수 있는 그 무엇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어딘가에 귀속하고픈 욕구를 갖게 되는데, 이것은 단순히 감정 차원의 문제를 넘어선 생사의 문제이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친밀함의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친밀함의 욕구를 만족스러운 인간관계를 통해 해갈하려면, 우선은 온전한 자아상을 확립해야 한다고 말한다. 온전한 자아상을 확립하지 못하고 인간관계에 임하게 될 경우, 잘해 봐야 일시적이며 혼란한 정서적 교류밖에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내적 공허감의 원인은 우리 자신이 불완전한 영혼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따라서 저자는 5가지 친밀한 관계 가운데 첫 번째 관계인 ‘나’라는 장에서 만족스러운 인간관계를 위해서 우선 나 자신에 대한 확고한 자아관을 스스로 정립하라고 교훈한다. 그리고 저자는 우리에게 온전한 자아에 이르는 길을 제시해준다. 온전함을 향한 우리의 타는 듯한 열망은 결국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가면을 벗어 던지고, 더 나아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책임지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비로소 성취되는 것임을 보게 될 것이다.


두 번째 친밀한 관계는 ‘가정’이다. 가정은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감정적 짐(emotional baggage)”을 공유하는 인간관계의 근본적인 틀이다. 이 장에서는 3R이라고 부르는 가정의 원칙, 가정의 역할, 가족 관계를 다룬다. 이를 통해 우리가 가정이라는 틀 안에서 전수받은 부정적인 인간관계의 모델과 그 악순환을 벗어나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이혼 가정에서 자란 자녀의 경우, 부모의 이혼 여파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너무도 다른 두 세계인 남성과 여성을 다룬다. 뿐만 아니라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기도 한 “이성간의 우정이 성립할 수 있는가?”에 대해 진지한 해법을 제시한다.


세 번째 친밀한 관계는 ‘친구’이다. 좋은 친구는 우리의 고통을 덜어 주고 무거운 짐도 가볍게 해준다고 했다. 더군다나 우정에 대한 최근 연구 보고에 따르면 좋은 친구를 두는 것은 단순히 영혼에 좋을 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좋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떤 친구가 좋은 친구이고 어떤 친구가 나쁜 친구란 말인가? 저자는 이에 대해 좋은 친구란, 어떤 형태이든 우리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는 친구라고 답하면서, 그러한 친구는 바로 ‘길동무’와 ‘마음의 벗’이라고 말한다. 좋은 친구를 얻고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한 저자의 진지한 대화는 독자에게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소중한 우정에 금이 가버렸다면, 어찌할 것인가? 이에 대한 저자의 실제적인 조언은 많은 소중한 우정을 위기에서 건질 것으로 보인다.


네 번째 친밀한 관계는 ‘연인’이다. 뉴욕 주립대 심리학 연구소의 마이클 리보비츠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남녀가 애정에 불탈 때, 뇌에서 화학물질(페닐레틸라민)이 분비되어 마음이 부풀고 흥분이 되며, 머리가 가벼워지고 숨이 막하는 등 심리적, 신체적 증상이 동반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셰익스피어는 “사랑은 장님이다. 연인들은 서로가 무슨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 절대 모른다”고 말할 정도이다. 따라서 이 글의 저자가 제시하는 것은 ‘똑똑한 사랑법’이다. 그리고 똑똑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연애를 단순히 가슴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도 한다고 한다. 그리고 평소에 애정 지수를 높여 둘 것을 제안한다. 여기서 애정 지수가 높다는 것은 신비로운 사랑의 감정에 도취되었을 때 얼마나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사랑에 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진정으로 애정 지수가 높을 때, 물과 같이 자유롭게 흐르는 사랑, 곧 늘 사랑하며 사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이어서 성관계 자체를 정서적 친밀감으로 대체하기 때문에 생기는 혼전 성관계의 피해를 다룬다. 그리고 결혼을 위해 성관계를 아껴두는 비법 등을 다양한 상담 사례를 통해 매우 리얼하게(?) 다루고 있다. 또한 상대의 가슴을 찢지 않고 연인관계를 청산할 수 있는 방법 등을 매우 실제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다섯 번째 친밀한 관계는 ‘하나님’이다. 저자는 목사관에 자란 모태 신앙인이었지만, 사춘기에 신앙적 회의에 빠져든다. 그리고 의심의 바다에 빠져 6개월 이상 헤매인다. 저자가 간절히 절규하며 찾고자 갈망한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었다. 이 문제는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갈망하는 관계, 즉 어떻게 하면 창조주 하나님과 진정한 만남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갈수록 믿음의 불씨가 식어가고, 급기야 신앙을 포기할 단계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극적으로 저자는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인격적인 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이제 저자는 결론적으로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없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대인관계를 통해 친밀감을 얻으려 노력해도, 결국 텅빈 마음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 가슴 속 깊은 곳의 귀속 욕구를 궁극적으로 만족시켜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저자의 말처럼 내면의 공허를 하나님으로 채우는 가운데 인간관계에 임한다면, 분명 우리의 풍성한 영혼을 통해 온전하고, 거룩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인생이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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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2004-08-05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간만에 리뷰올리셨군요. 잘 읽고 갑니다.
 
그리스도교 영성 - 김진의 영성 이야기 1
김진 지음 / 엔크리스토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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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늘날 한국 교회에 영성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영성이란 말을 많이 듣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과는 달리 과연 영성이란 무엇이며, 또한 영성적 삶을 어떻게 함양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분명한 길을 제시하고 있는 책 또한 드물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영성에 대한 보다 분명한 이해와 영성적 삶이 촉발되기를 희망”하는 저자의 소망은 이 책에서 충분히 빛을 발하고 있다고 본다.


저자는 영성(Spirituality)이라는 용어를 본래 그리스도교 안에서 가톨릭의 전용어로 보면서, 개신교에서 신학적 반성 없이 슬그머니 제멋대로 사용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다운 영성을 함양하고픈 간절한 소망들이 넘쳐나고 있지만, 정작 기독교 영성에 대한 우리 접근방식은 경직된 종교체제나 교리 혹은 전통에 얽매여 있는 현실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저자는 그리스도교 영성에 대한 기초적이고 총체적인 이해 없는 한국 개신교 신학의 현주소를 이유로 든다. 이에 한국 그리스도교의 영성이해의 흐름들을 근원부터 살피면서, 저자는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담지하면서도, 인간이 그 깊이를 제한하지 않는 영성, 존재론적이고 동시에 실천적인 영성에 대한 자신의 연구를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저자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저자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출발을 “지금도 구원사건을 일으키시는 그리스도의 영과 우리 영과의 만남을 통해 시작”된다고 말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영성은 그리스도의 본질이기 이전에 영을 지닌 인간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진술 뒤에 있는 저자의 영성에 대한 이해가 사뭇 의아스럽다. 또한 “오직 그리스도교에서 수용되는 영성만이 온전한 인간의 영성이라는 그리스도교 중심의 오만한 주장은 이제 더 이상 효력을 갖지 못한다.”는 저자의 말은 영성을 너무 일반화하고자 하는 저자의 지나친 의욕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영성에 관한 입문서로서 손색이 없는 매우 훌륭한 작품이다.


저자는 그리스도교 영성에 대한 다섯 가지 오해라는 부분을 통해서 우리의 영성에 대한 진실을 향해 다가가기 쉽도록 해주고 있다. 우리 영성생활이 개인화됨으로써 삶의 변화가 없는 단지 ‘심리적인 변화’로만 그치고,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영성을 등한시할 위험 등을 경고한다. 또한 영성을 내면적인 영역에만 국한시킴으로써, 사회 안에서 사랑과 평화운동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부분과 영성을 순전히 영적인 문제로만 취급할 수 있는 부분 등에 대해서도 잘 다루고 있다. “우리의 영성이 일상적인 삶 속에서 영글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재’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저자는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다. 결국 저자가 중시하는 것은 일상의 영성이다.


저자는 “그리스도교 영성은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적인 삶을 통해 표현되고 심화되는 생활 속의 영성이어야 한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현존 체험이 반복되고 그 체험을 통해 온전한 영성적 삶이 영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영성적인 삶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인지에 대한 정확한 그리스도인의 정의가 요구된다. 사실 그리스도와의 실존적 만남이나 소통 없이 그저 일주일에 한번 예배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인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로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구원사건으로 나타나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직․간접으로 체험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성생활은 저자의 말처럼 반복되는 그리스도의 현존 체험의 심화 여정을 의미한다.


저자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현존 체험의 내용과 양태를 독특하게 원(元)체험, 추(追)체험, 재(再)체험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리고 영성생활은 그리스도의 원체험의 반복으로 성숙되어 가며, 추체험을 통해 생명력있는 영성생활을 하게 되며, 원체험과 추체험, 그리고 재체험의 순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한다고 한다. 여기서 저자는 참으로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가톨릭에서 이어져 오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매우 중요한 영성생활의 전통인 ‘렉시오 디비나’를 소개한다. 렉시오 디비나는 ‘영적 독서’를 가리키는 말로, 영성생활을 위해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렉시오 디비나는 수도원형과 강단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강단형은 다음과 같다.

1) 성서 낭독: 단어와 구절에 집중

2) 묵상: 성서말씀의 음미

3) 애정어린 기도: 자발적인 응답

4) 관상: 하나님의 현존 안에 평안히 거함


따라서 저자는 한국 개신교의 경우 주로 Q.T.라고 불리는 성서묵상 방법이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이 방법은 성서가 갖는 철저한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저자의 말처럼 Q.T.는 아전인수격의 해석과 알레고리식 해석이 난무하는 온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저자의 지적은 합당하다고 본다. 이에 저자는 ‘배꼽으로 성서읽기’ 방법을 제안한다. 배꼽으로 성서 읽기의 핵심은 성서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 음성을 직접 듣는데 있다. 이렇듯 영성생활에서 성서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 듣기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따라서 영성생활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서를 생각하고, 묵상하고, 또 관상하고,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배꼽으로 듣는’ 생활이 계속 반복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해서 말한다.


이 책은 그리스도의 현존 체험을 우리 삶 속에서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깊은 영성에 대한 갈급함을 불러일으켜주기에 충분하다. 또한 국내 작가로서 영성에 관한 깊이 있는 연구를 시도한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이론과 체험을 갖춘 많은 영성 훈련서들이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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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 제자도에 관한 이야기
마이클 카드 지음, 홍순원 옮김 / 죠이선교회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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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진정한 멘토링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기 있는 기독 음악가, 마이클 카드는 이 책에서 자신의 친구이자 멘토인 윌리암 레인과의 일생에 걸친 동행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의 스승과 제자로서 누린 흔치 않은 관계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기독교 제자도의 완벽한 그림을 본다.


제자도의 본질은 두 사람이 수개월, 또는 수년 동안 함께 나누며 걸어가는 동행이다. 그리고 이러한 동행이라는 문맥 속에서 멘토링의 역사는 일어난다. 사실 우리는 책들을 통해 멘토링 이론에 대해서는 많이 접해 왔다. 그러나 이렇듯 두 사람의 삶 속에서 25년을 이어온 실제적인 멘토링 이야기는 들어본 일이 거의 없는 듯 하다. 저자는 이 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손에 잡은 이 책은 연구서이자 일지이다. 일지는 틀이 되고, 그 연구대로 살아낸 경험이고, 우리가 함께한 세월을 재건한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은 25년 동안 함께 걸었던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물론 이 책은 제자도의 모든 의미를 완전히 정의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두 사람이 함께 동행하며 나누었던 그들만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만의 이야기를 읽기 시작할 때, 더 이상 그들만의 이야기로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결코 그들만의 동행이 아니다. 바로 우리들의 동행이다.


모든 동행에는 처음 만남이 있듯이 그들만의 동행에도 만남의 시간이 있었다. “항상 목적을 갖고 걷던” 윌리엄 레인 교수와 열정적인 배움의 욕구로 가득했던 마이클, 두 사람의 삶이 교차하는 시점이 있었다. 급속히 그들은 서로의 마음 속에서 무엇인가 공명하기 시작하면서 멘토링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곤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권위 아래 함께 들어가, 자기 사람을 소중하게 돌보며, 그런 권위가 긍휼한 반응을 해줄 것이라고 항상 신뢰하는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서로 신뢰하며, 서로 긍휼을 베풀며, 함께 그리스도의 제자된 자로서 동행하는 삶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마이클은 빌 선생님과의 25년간의 동행을 통해서, 서로 함께 하는 것을 즐겼다. 그리곤 함께 동행하는 동안 거의 모든 면에서 놀랍도록 성숙하는 은혜를 누렸다. 그의 멘토인 빌 선생님 또한 자신의 성장의 고통을 제자인 마이클과 함께 나누었다. 이 두 사람의 ‘영혼의 친구’로서 진정한 교제를 경험했던 것이다.


저자는 영혼의 친구는 상대방에게 최상인 것을 갈망하며 그 사람을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사랑은 친구가 그리스도께서 계획하신 최상의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그의 동행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 동행의 끝에 있게 될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바라며, 그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가져올 선물을 크게 소망하게 된다.


그들의 동행은 결국 빌 선생님의 죽음으로 끝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동행은 정말 끝이 났을까? 저자는 이 부분을 일컬어 “나의 비밀”이라고 부른다. 즉 “(그는)지금 세상에 대해서는 죽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는 살아 있다”고 말한다. 그리곤 주님이 자신에게 놀라운 선물을 선사하셨다는 사실에 감격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물을 주실 때, 그것을 사람으로 포장해서 주신다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선물이 사라질 때까지 그 참다운 가치를 보지 못한다. 그것을 그리워하면서 우리는 그 선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발견한다. 함께 동행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주님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우리는 이제 이 책을 통해서 동행이야말로 우리 삶 속에 예수님이 생생하게 살아계신 삶으로 인도를 한다는 진리를 깨우치게 된다. 그리고 언제나 이 신비한 경험은, 저자의 말처럼 ‘가장 평범한 경험, 곧 동행’이라는 컨텍스트 속에서 일어나며, 또 일어날 것이다. 누구 함께 동행하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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