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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평점 :
리뷰: https://youtu.be/TInOFyy6u8Y
몇 해 전 유행처럼 읽었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최근 북토크를 계기로 다시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재미있다는 인상과 몇 가지 충격적인 장면만 또렷했고, 나머지는 흐릿했다. 이번에는 노트를 옆에 두고 차분히 따라가 보았다. 왜 이 책이 많은 사람에게 오래 남았는지, 나도 왜 다시 읽고 싶었는지 이해가 됐다.
이 책이 여기까지 오게 된 출발점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어린 저자는 아버지에게서 “세상에는 혼돈만 있다, 의미는 없다”는 말을 듣고 큰 혼란을 겪는다. 이후 가족의 상처와 우울의 시간을 지나 한 인물—데이비드 스타 조던—에게 집요하게 매달리며, 혼돈 속에서 질서를 세우려는 인간의 의지와 욕망이 무엇인지 탐문한다. 조던의 이력은 드라마틱하다. 대지진으로 박물 표본과 이름표가 한순간에 뒤엉켜도, 그는 좌절 대신 다시 정렬하는 일을 택한다. 물고기에 이름을 붙이고, 깨진 표본에 새 표식을 달며,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체계를 만든다. 계속 밀어붙이는 힘이 어디서 나오나 따라가다 보면, 과한 자기확신과 자기기만이 드러난다. 이 책은 그 힘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함께 보여준다. 덕분에 이야기가 ‘성공담’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과 태도를 자연스럽게 묻는다.
서술 방식은 직선으로 달리지 않는다. 저자는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주변의 이야기를 끌어와 맥락을 만들고, 곁가지로 보이는 서사가 어느 순간 주제의 핵심을 비춘다. 처음 읽을 때는 “왜 갑자기 이 이야기가 나오지?” 하고 흐름을 놓친 대목들이 있었다. 재독에서는 그 비틀림이 주제를 입체로 만드는 장치였음을 이해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건을 좇는 대신, 각 장의 끝에서 “이 대목이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를 놓치지 않기 위해 기록하며 읽었다. 혼돈/질서, 이름 붙이기, 집착, 윤리, 과정. 이러한 내용들을 정리하고 나니 책의 흐름이 훨씬 또렷해졌다.
조던에 대한 탐구는 영웅담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저자는 그의 놀라운 복원력과 조직 능력을 인정하는 한편, 그 힘이 맹목으로 굳어질 때 생기는 왜곡을 함께 보여준다. 끝까지 밀어붙이는 힘은 가치중립적이며, 무엇을 위해 누구와 어떻게 쓰느냐가 사람을 가른다. 이 인식은 책을 단순한 ‘동기부여 서사’에서 꺼내,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의 윤리를 질문하는 성찰로 확장한다. 결국 저자가 도달하는 자리도 “성취가 전부다”가 아니라 “어떤 태도로 그 성취를 만들었는가”에 가깝다. 나 역시 읽는 동안 현실적 유용성과 윤리적 비용을 생각해 보았고, 그 균형이 이 책이 말하는 삶의 태도의 중요한 요소라고 느꼈다.
데이비드 조던이 표본에 이름을 부여하던 작업에 있어서, 우리는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만들고 세상을 통제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 행위는 세상을 이해 가능하게 바꾸지만, 동시에 세계를 너무 단순화해 보게 만드는 위험도 낳는다. 조던은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질서을 만들고자 했고, 저자는 그 욕망을 해부하면서 그것이 우리가 전적으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적 충동임을 인정한다. 그래서 책의 결은 비난이나 찬양으로 닫히지 않는다. 혼돈과 질서 사이에서 균형을 모색하는 태도, 그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의심과 자기점검이 결론처럼 남는다.
저자의 이야기와 조던의 이야기가 조금은 두서없이 교차로 진행되는데 서사의 곁가지가 잦아 익숙하지 않으면 산만하게 느낄 수 있다. 다만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나가다 보면 산만함은 주제를 입체로 드러내는 방법으로 읽힌다. 첫번째 읽을 때 “재미있는데 어수선하다”로 남았다면, 이번에는 더 깊이있는 독서를 경험하며 다른 질감으로 다가온 것 같다.
결국 이 책은 혼돈 속에서 질서를 만들려는 인간의 욕망과 그 대가를 한 인물을 통해 끝까지 묻는다. 읽고 나면 성취의 속도보다, 그 과정에서 내가 어떤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지, 인생에서의 중요한 것들을 먼저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