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임지현 교수의 '대중독재론'을 비판한다
기억의 정치 결여...대중은 무엇을 박탈당했는가

2005년 03월 30일   이병천 강원대 이메일 보내기

쟁점

임지현

이병천

과거청산 파시즘의 역사적 청산과 극복문제는 인적, 법적, 정치적 청산 이상의 것이다. 임지현식 과거청산은 역사속의 특정한 행위에 수반되는 특정한 책임을 가볍게 취급함으로써 공적·정치적 반성과 ‘기억의 정치’가 결여됐다.
대중독재 박정희 개발독재는 권력이 대중을 획득한 ‘대중독재’ 개념에서 접근가능. 박정희 개발독재의 불안정성과 균열적 동학을 포착하기엔 너무 옅고 추상적.
탈민족담론 민족주의의 공범 관계를 해체시키자, 국사를 해체하자, 국사의 신화를 넘자. 오늘날 시민적 진보는 세계시민주의 입장에서 서지만, 그 경계를 무정부주의적으로 해체해선 안된다.

민주주의라고 해서 다 같진 않다. 한때 민주주의 이행이후 ‘공고화’ 논의가 무성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지금 우린 무늬만의 민주주의, 사회경제적 내용이 텅빈, 허울뿐인 민주주의를 실감하고 있다. 1987~97년 ‘잃어버린 10년’의 헛돌아간 민주주의 시절을 보낸 이후 우리는 1원 1표의 ‘돈의 등가’ 원칙을 세우려는 로크적 시장 민주주의에 붙들렸다. 자유방임 근본주의자들은 현 정부에 대해 ‘평등주의 함정’에 빠졌다느니 요란하게 떠들며 한국 경제의 곤경을 그 때문이라고 몰아 부친다. 자신들이 앉은 자리를 세상의 중심으로 놓고 보면 그렇게 비칠지 모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자리는 저 낡은 오른쪽 구석이다.


그렇지만 현정부를 단지 약체다, 실패했다고만 보는 견해에도 빠진 것이 있다.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인식에서 요구되는 것은 양극화-저복지 속의 시장 민주주의 길을 탈개발독재의 신동원체제, 모순에 찬 ‘신자유주의 수동혁명’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 그 ‘성공’ 가능성과 균열적 위기 요인을 파헤치는 것, 그리하여 이 ‘균열적 수동혁명’의 지배적 동의를 반전시킬 수 있는 사회통합적 시민한국의 대항 헤게모니 전략을 모색하는 것이다.

균열적 수동혁명의 대항 헤게모니는 어디에


수동혁명은 역사가 길다. 독재의 얼굴은 민주주의보다 더 복잡할지 모른다. 파시즘, 스탈린주의를 비롯해 20세기를 장식한 세계의 다양한 독재 형태들을 단지 강제와 억압으로만 보는 건 일면적이다. 대중독재론을 둘러싼 논쟁에서 문제의 발단이 된 한국의 박정희 독재 역시 그렇다. 권력과 지배의 현상을 강제와 동의의 복합으로 봐야 한다는 임지현의 생각은 오랜 계보를 갖고 있으며, 그 자체는 결코 새로운 인식은 아니다. 그는 스스로 그람시와 프랑크푸르트 학파, 그리고 푸코 등의 연장선상에서 작업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고, 실제 내용을 봐도 많은 부분 그렇게 읽힌다. 그렇지만 그의 작업을 단지 이들의 역사적 적용과 확대로만 보는 것은 부당한 평가 절하가 될수 있고 다른 한편 쟁점 유실이 될 수도 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임지현의 글을 읽으면서 우선 걸린 대목은 과거청산 문제에 대한 그의 견해다. 파시즘의 역사적 청산과 극복 문제가 인적, 법적, 정치적 청산 이상의 문제라는 그의 견해에 나는 완전히 동의한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문화적·정치적 공동성의 형성과 삶의 양식을 요구하는 것이다.


박정희 개발 독재와 관련해 이 지점을 잘 짚은 사람은 진중권일 것이다. 그는 박정희 체제를 한국인의 몸과 정신세계에 깊이 새겨져 있고 그 인성 구조를 바꾼, 파시스트적- 광의의-생체권력으로 파악했고, 그 때문에 독재자는 죽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죽은 독재자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진중권은 누구보다 법적, 정치적 청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반면 임지현에게서 인적, 법적, 정치적 청산의 중요성은 뒷켠으로 밀린다. 심지어 모두에 책임이 있으니 아무도 법정에 세울 수 없고, 인적 청산 방식은 다수 구성원에 면죄부를 부여하고 진정한 역사적 청산을 가로 막는다는 식의 논변까지 편다. 동의하기 어려운 이분법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과 대중의 ‘정치적 無思慮’’에 대해 갈파한 바 있다. 그렇다고 그녀가 인적, 법적, 정치적 청산을 경시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누구보다 공적 정의의 구현을 요구하면서 상처의 치유를 호소했다. 어디보다 공적 과거청산의 빈곤으로 고통받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왜 이를 주변화하려고 하는가.


임지현식 과거청산은 역사 속의 특정한 행위에 수반되는 특정한 책임의 문제를 가볍게 취급함으로써 공적, 정치적 반성과 ‘기억의 정치’가 결여된, 나르시시즘적 자기안의 반성에 갇힐 소지가 있다. 모두의 책임이라는 논리는 무책임의 논리가 될 수 있다.


나 역시 임지현과 마찬가지로 박정희 ‘개발독재’ 현상과 씨름하면서 그 역사적, 이론적 함축을 끌어 내려고 노력해온 편이다. 그런데 그는 개발독재가 파시즘, 스탈린주의 등과 이른바 ‘대중독재’로서 공유하는 공통점, 권력이 대중을 획득하는 공통된 헤게모니적 능력에 주목한다. 반면 ‘대중독재’는 그람시의 ‘수동혁명’의 다른 표현으로 볼 수도 있겠는데, 내 경우는 수동혁명의 특수한 형태들, 그 한 형태로서 한국의 개발독재와 개발 자본주의, 그리고 그 모순적, 다중적 복합성과 균열상에 주목해왔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대중독재의 일반성을 추출하는 방식은 물론 강점도 갖지만, 박정희 개발독재의 불안정성과 균열적 동학, 그리하여 그 역사적 실체를 포착하는 데는 너무 옅고 추상적이다. 이 약점은 이전에 5월 광주와 신군부독재 현상에 대한 문부식의 해석에서 크게  부각된 바 있는데, 임지현의 견해는 문부식과는 얼마나 달라질까.


연구사의 계보학으로 말해 보자면 파시즘과 관련해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 파시즘은 독일이나 이탈리아 같은 파시즘 ‘혁명’을 갖지는 못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면서 그는 파시즘의 아래로부터의 요소는 해당 나라의 민주주의의 강도에 의해 규정되며, 민주주의 혁명을 거치지 않은 곳에서는 전형적인 파시즘 운동의 아래로부터의 성장이 있기 어렵다고 말했다. 일본의 경우가 그렇다는 것이다. 또 제솝같은 사람은 그람시와 풀란차스를 이어받아 한 국민 헤게모니 프로젝트와 두 국민 프로젝트, 나아가 두 국민 프로젝트의 이행적 사례로부터 수동혁명의 정상적 형태, 그리고 강제, 기만, 매수를 사용하는 수동혁명과 기동전 사이의 이행적 형태들을 구분할 것을 제기한 바 있다. 이들의 견해도 논란이 많지만, 한국의 개발 독재를 해명하는 데 유익한 함축을 제공함은 분명하다.

‘주권독재론’으로 ‘수동혁명론’ 넘어섰다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라는 임지현의 탈민족담론이야말로 가장 논쟁적인 장소일 것이다. 그의 작업이 갖는 양가성, 해방성과 해체성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도 바로 여기다. 대중독재론은 국민국가 및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과 합류해 주권독재론으로 발전된다. 나아가 주권독재론은 국민 주권만이 아니라 인민주권과 대중 민주주의조차 그 억압적 반대물로 전락하게 되는 함정에 대해서 비판한다.


나는 임지현의 대중독재론은 주권독재론을 제기함으로써 비로소 그람시 등 기존의 수동혁명론의 시야를 넘어서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국민국가와 민족주의가 억압의 감옥이 되는 그만큼 그의 주장 또한 크다란 해방 담론의 성격을 갖는다. 적어도 우리 학계에서 임지현만큼 심도있게 민족주의의 억압성 문제를 밀고 나간 이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냉전극우독재와 대결해 온 한국의 민주주의, 민중적 민족주의 사상과 계몽의 틀이 우리시대 진보와 민족주의와의 모순적 긴장 관계를 깊이 숙고해 오지 않았음을 상기할 때 큰 기여라 할 것이다. 나의 가까운 분야로 말하자면 박현채의 민족경제론도 국민국가의 틀안에 갇혔다. 1987년이후 약진한 한국 시민운동의 이념조차 얼마나 동원의 논리를 잘 넘어서고 있는 지 의문이 간다.

발붙일 공동체 터전 제시 못해


그런데 임지현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갖게 된 의문은 그러면 우리가 더불어 딛고 지키면서 가꾸어야 할 터전, 공동의 세계는 어딜까 하는 것이다. 임지현은 말한다: 민족주의의 공범 관계를 해체시키자, 국사를 해체하자, 국사의 신화를 넘자고. 좋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인간이 인권을 근본적으로 상실하는 것은 개개의 권리를 상실한 때가 아니라, 바로 세계 속에서 거처를 상실한 때이다. 이 지상의 거처에 의해서만 인간은 개개의 권리들을 가질 수 있으며, 이 거처만이 인간의 의견이 의미를 가질 수 있게 하고 행동이 효력을 가질 수 있게 해 준다.”

‘제권리의 권리’라 할 ‘지상의 거처’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정치공동체, 다시 말해 공동의 시민세계, 자유-평등과 연대를 지향하는 차이와 다양성이 겹쳐진 ‘다중-시민’의 성찰적 소통과 표현의 세계다. 그리고 오늘날 시민적 진보는 국민국가와 민족주의의 경계를 관통하는 세계시민주의와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입장에 서면서도 그 경계를 무정부주의적으로 해체시키는 것이 돼서는 안된다. ‘노마드’가 자유인이 될 수 있을까. 트랜스내셔널, 트랜스모던(trans-national, trans-mordern)을 지향하는 경계관통적인, 탈식민적 시민 민주주의의 기획은 경계의 개방적 존속에 따른 역사적 딜레마와 고통을 안고 가면서, 시민세계로 열린 국가형태의 탈구축을 포함하는 다중 시민화의 전략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가 필자가 임지현과 갈라지는 지점이다.


나는 그가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 동아시아 연대를 이루자면서 식민지 근대화론자와 손잡고 가는 데 대해 납득하지 못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자와의 탈민족 동아시아 연대는 과연 어떤 내용을 가질까. 그의 이같은 발걸음은 대중독재론과 주권 독재론 자체에 내재된 허점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그의 대중독재론에는 대중이 권력에 의해 박탈당한 자유와 주체성의 진수가 과연 무엇인지가 ‘X파일’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잘못 본 것일까.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그의 연구가 아직 진행 중에 있다고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