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긍정적인 밥

 

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그 방을 생각하며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사지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슨 펜과 뼈와 광기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잔재 대신에

다시 쓰디쓴 담뱃진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풍성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우울


내겐 천년을 산 것보다 더 많은 추억이 있다.


계산서들, 시의 원고와 연애편지, 소송서류, 연가들,

영수증에 돌돌 말린 무거운 머리타래로

가득찬 서랍 달린 장롱도

내 서글픈 두뇌만큼 비밀을 감추지 못하리.

그것은 피라미드, 거대한 지하 매장소,

공동표지보다 더 많은 시체를 간직하고 있는 곳.

- 나는 달빛마저 싫어하는 공동묘지,

거기 줄을 이은 구더기들은 회한처럼 우글거리며,

내 소중한 시체를 향해 언제나 악착같이 달라붙는다.

나는 또한 시든 장미꽃 가득한 오래된 규방,

거기 유행 지난 온갖 것들 널려 있고,

탄식하는 파스텔 그림들과 빛바랜 부셰의 글림들만

마개 빠진 향수병 냄새를 맡고 있다.


눈 많이 내리는 해들의 무거운 눈송이 아래

우울한 무관심의 결과인 권태가 불멸의 크기로까지 커질 때,

절뚝이며 가는 날들에 비길 지루한 것이 세상에 있으랴.

-이제부터 너는, 오, 살아 있는 물질이여!

안개 낀 사하라 복판에 졸며

막연한 공포에 싸인 화강암에 지나지 않으리;

무심한 세상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지도에도 버림받아,

그 사나운 울분을 석양빛에서만

노래하는 늙은 스핑크스에 지나지 않으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푸른 하늘을

 

  푸른 하늘을 制壓하는
  노고지리가 自由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詩人의 말은 修訂되어야 한다.

  自由를 위해서
  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自由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革命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革命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탈구조적 비평으로는 복잡한 현실 해명 못해
논쟁: 임지현(교수신문 353호)에 대한 재반론

2005년 05월 07일   조희연 성공회대 이메일 보내기

1987년 이후의 민주화의 길고 복잡한 여로와 우리 현실의 복합성을 생각할 때, ‘폭압과 저항의 도덕적 이원론’이나 ‘강제와 억압을 일면적으로 강조하는 악마론적 코드’를 성찰해야 한다는 임지현의 문제제기는 신선하다. 임지현의 대중독재론은 분명 중요한 문제제기이며 박정희시대, 더나아가 현단계 한국정치사회변동의 성격에 대한 논의지평을 확장하는 계기이다. 그동안 ‘역사비평’을 둘러싸고 대중독재론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근현대사를 둘러싼 중요한 쟁점들, 예컨대 박정희 독재 나아가 일반적인 지배에서의 강압과 동의의 관계, 헤게모니 구성에서의 폭력과 자발성의 관계, 근대권력의 한 형태로서의 파시즘의 복합성과 모순성, 한국에서의 지배의 전통과 박정희독재의 관계, 한국에서의 반공주의와 개발주의의 성격 및 그 헤게모니적 지위, 새마을운동에서의 자발성, 역사적 박정희와 현재적인 과거청산의 성격과 이에 대한 태도, 한국근현대 역사像의 재구성 과제 등이 제기됐다고 생각된다.

포스트독재담론 대 혁신 반독재 민주담론?

먼저 밝혀둬야 할 것은 대중독재론을 둘러싼 논쟁이 보수 대 진보의 논쟁으로 설정돼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나는 임지현의 대중독재론을 보수적 담론으로 폄하하고 싶지 않다. 굳이 얘기한다면, ‘포스트-구조주의 담론 지향’ 대 ‘혁신 구조주의 담론 지향’ 간의 논쟁, 혹은 ‘포스트-독재담론’ 대 ‘혁신 반독재 민주담론 지향’ 간의 논쟁일 수 있을 것이다. 완전히 대립되는 입장에 서 있지 않기 때문에, 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에 어려움이 따른다. 임지현의 문제제기에서 핵심적이라고 할 수 있는, 독재시대의 대중의 동의 문제, 탈민족주의적 성찰의 당위성, 박정희 독재 혹은 파시즘을 넘어서기 위한 근대성 자체의 질곡 등에 대해서 긍정하면서 섬세한 차이들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임지현의 대중독재론에 대한 단순 비판보다는, 기존의 반독재 분석프레임을 확장?재구성하는 방식을 통해서, 임지현이 제기하는 동의문제 등 현실의 복합성을 포괄할 것인가하는 ‘대안추구적인’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하고자 노력했다. 이것을 추후 ‘개발동원체제, 헤게모니, 복합적 주체화’라는 책에서 종합적으로 제출하기 위해 나름대로 작업하고 있다.

포스트 독재담론의 양가성

나는 임지현의 문제제기가 기존의 반독재 담론의 성찰과 혁신, 확장 혹은 ‘발본적 전환’의 계기라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점에서 의문점과 고민해야 할 지점들을 내포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먼저 포스트 독재담론이라고 할 수 있는 대중독재론의 이론적 시선의 양가성이다. 임지현의 논리 속에서는, 독재와 반독재, 좌파와 우파가 공히 ‘악마론적 코드’를 공유하고 있는 극복대상이다. 양자의 차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어느 서술에서는, ‘좌파나 진보파는 보수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좌파나 보수파의 이미지 그대로이다“라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점에 대해서 임지현이 제기한 ‘혐의’라고 반론을 제기했고 이에 수긍하면서도 못내 해결되지 않는 불편함이 있다. 포스트-구조주의적 담론이 꼭 탈구조적 인식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부시와 빈 라덴, 나아가 박정희와 김일성을 공생관계로 보는 최근 그의 책 ‘적대적 공범자들’(대중독재론도 그 일부를 구성한다)가 내장하는 인식틀의 양가성에 대해서도, 나는 동일한 의문을 갖고 있다. 거기에는 정확히 구조적 시각이 결여돼 있다. 빈 라덴과 부시의 동일성에 대한 통찰력과 문제의식에 일정 측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현실의 복합성에 대한 탈구조화된 비평만을 제공할 수 있다. 

대중독재와 탈민족주의

그런데 여기서 임지현은 더 나가는 지점이 있다. 그는 주권독재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독재가 가능하게 된 근대성의 태반 자체를 넘어서기 위해, 민족주의와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서는 탈민족주의적 인식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나아가 그는 조희연, 이병천, 박태균 등의 비판이 근대의 가치에 집착하는 것으로 비판하고 있다. 나는 탈민족주의적 지향 자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이다. 단지 탈민족주의 혹은 탈국가주의라는 선험적 기준을 절대화하면서 독재나 반독재나, 보수나 진보나,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동일하고 그런 점에서 동일한 극복대상이라는 식의 설정에 대해 반대한다. 이런 점에서 탈민족주의와 탈국가주의적 지향을 공유하면서도, 현재의 민족주의적 국가주의적 프레임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즉 근대성의 틀 내에서 작동하고 있는 진보적 잠재력을 급진적으로 확장하고, 동시에 이른바 포스트-근대적인 지구화의 과정이 몰고 오는 ‘국민국가의 상대화’ 효과를 목적의식적으로 확장하면서 국경을 넘는 다양한 아래로부터의 역동성을 강화해야 한다.

첫째, 나는 근대성의 틀 내에서 존재하는 여러 진보적 잠재력 중엔 근대독재권력의 내적 모순, 즉 ‘국가와 민족을 매개로 추동되는 집단성과 근대성 시민성 간의 모순’ 같은 것도 지적했다. 물론 이는 임지현이 비판하는 바와 같은, 근대적 시민주체를 절대화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둘째와 관련해, 국민국가적 경계를 넘는 아래로부터의 역동성은 반세계화 운동 속에서, 이라크 파병 반대 반전활동가들의 ‘국적포기’ 언급 속에서, 많은 아시아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다양한 시민사회의 활동, 외국인노동자의 탄압반대운동이나 노동의 초국경적인 이동권 운동 등에서도 이미 진전되고 있다. 현단계 사회진보는 민족주의적 국지화 전략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실 국경을 넘는 지구화는 분명 여권, 비자 등으로 상징되는 국민국가의 권력을 이미 상대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자본이 요구하는 노동의 이동은 합법의 영역에 속하지만, 자본이 요구하지 않는 민중의 자발적인 초국경적 이동은 여권 및 비자 등으로 상징되는 국민국가의 제도적 형태에 의해서 통제받는다. 이것은 근대성의 형평의 원리에서 보더라도 모순적이다. 이런 점에서, 근대성의 적극적 측면들을 급진적으로 확장하고, 현재의 지구화를 포함해 포스트근대적 흐름들이 갖는 잠재적인 근대국민국가의 상대화 효과를 급진화하는 이론적?실천적 노력들을 통해서, 포스트 근대의 흐름을 형성해 내야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국민국가의 질곡을 넘어서는 것이 중장기적으로는 네그리가 지적하는 대로, 기존의 민족국가적 주권을 대체해가고 있는 ‘제국적 주권형태’의 아래로부터의 극복을 통해서 비로서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박정희독재는 폭압적이었으며 불안정했다 "


다음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이상의 이론적 논의를 넘어서서, 박정희 독재의 총체적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존재한다. 문제는 기존에 간과됐던 박정희 독재에 대한 대중의 동의-사실 이는 우리 현실의 중요한 측면이다-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쟁점화하는 건 파시즘의 헤게모니에 대한 과잉인식이나 과소인식이 아니라, 바로 파시즘의 헤게모니의 진정한 자리다. 이 점에 대해서 임지현은 명확히 정의하진 않는다. 대중의 동의가 있었다고만 말할 뿐이다. 나는 박정희독재는 ‘반공주의적, 개발주의적 동원’의 일정한 성공으로 동의와 헤게모니를 창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정치적으로 불안정했으며 후반으로 갈수록 폭압이 전면화되고 이에 대한 국민적 저항으로 붕괴한 체제‘였다고 생각한다. 18년 동안의 반절 이상의 해에 계엄과 위수령, 긴급조치로 ’연명‘한 체제다. 이런 점에서 총체적인 규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함께 동의가 연구되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한국, 독재의 헤게모니의 보편적 사례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한국의 독재와 관련한 파시즘의 유형론과 특수성을 강조한 것은 파시즘적 일반성을 박정희 독재에 그대로 적용해서는 않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나아가서 박정희독재는, 파시즘의 정점으로서의 천황제가 엄존하는 일본이나 아래로부터의 저항이 아니라 패전에 의해 승전국에 의해 과거청산의 프레임이 주어진 독일의 파시즘에서 볼 수 없는 ‘대중독재적 헤게모니’가 균열되는 보다 전형적인 사례로 파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와 관련, 우리의 역사적 경험의 ‘진보적 긍정’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우리의 현실이 독일이나 일본과 달리 독재의 ‘헤게모니’가 아니라 독재의 ‘헤게모니의 균열’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고 본다. 이러한 우리의 역사적 경험의 진보적 긍정은 또다른 점에서도 표출될 수 있다. 독재의 유산과 관련해, 한국의 독재극복과 과거청산을-불철저하지만-보다 적극적으로 파악하자는 견해도 갖고 있다. 남아프키라의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예가 거론되지만 그것은 대단히 타협적인 것이다. 오히려 한국의 과거청산이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

성찰적 과거청산과 제도적 과거청산의 관계


박정희는 단순히 역사적 쟁점만이 아니라 현재적 쟁점이기도 하다. 현재적 과거청산 문제와 관련해 나는 몇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성찰적 과거청산-나는 임지현의 문제의식을 이렇게 개념화한다-은 철저한 제도적 과거청산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철저한 과거청산 위에서 비로서 가능하거나 병행돼야 하는 것이다. 임지현이 느끼는 현재의 제도적 과거청산의 문제점은, 통상적인 보수적 비판과 달리, 아래로부터의 과거청산 요구와 제도적 과거청산-국가가 주도하는-의 괴리, 거기에서 제기되는 딜레마로 이해하고 싶다. 즉 제도적 과거청산이 ‘공적 기억의 민주화’를 수반하지만 ‘기억의 국가화’가 갖는 딜레마를 안게 된다는 점이다. 성찰적 과거청산을 위해 임지현이 제기하는 ’죄의식‘에 대한 논의도 이것과 대립될 필요는 없다.


글을 마치면서, 대중독재론을 둘러싼 논쟁이 임지현과 그 연구그룹의 신선한 노력들을 폄하하는 것으로 인식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이러한 논쟁 자체가 반독재담론의 성찰적 확장의 계기로, 대중독재론의 정치한 이론화와 세계적인 이론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