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역사비평’의 임지현-조희연 논쟁에 부쳐
'대중독재와 ‘外勢’의 관계 중요...실증 없어 주장만 대립
2005년 03월 22일 박태균 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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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태균 / 서울대·한국사 © | 최근 ‘역사비평’에서 제기되고 있는 논쟁은 임지현이 중심이 된 ‘대중독재론’에 의해서 파생되었다. ‘대중독재론’에서는 박정희 체제를 ‘독재와 민주’의 이분법적인 사고에 의해서 평가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그 시대에 존재하고 있었던 다양한 양태의 역사적 현실들에 접근해 보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대중독재론’은 박정희 체제를 바라보는 역사적 관점을 한 단계 진전시켰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기존의 박정희 체제에 대한 연구에 ‘선’과 ‘악’이라고 하는 주관적 평가가 개입됨으로써 박정희 체제가 보여주고 있는 다양한 현실이 간과되었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민주화 운동의 관점에서, 다른 한편에서는 경제성장의 관점이 그 기준이 되었다. 박정희 체제에 대한 학술 연구의 장에서 ‘그렇다면 당신은 박정희를 지지하느냐, 아니면 싫어하느냐’라는 정치적인 질문이 횡행했던 것 역시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또한 ‘대중독재론’은 그 동안 이론적인 틀과 함께 한국역사의 보편화에 소홀했던 역사학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 넣었다. 기존의 현대사 연구가 실증적인 방법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한국사의 특수성만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한국 현대사를 보다 광의의 시각에서 비교론적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파시즘에 대한 세계적인 학문조류를 한국현대사에 대입했다는 점은 한국사를 세계적 학문의 장에서 논의할 수 있는 기초를 구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조희연의 비판 역시 주목할 만한 많은 대목들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조희연의 통렬한 비판, ‘대중독재론’이 “파시즘 비판의 확장이 아니라 파시즘 정당화 논리의 징검다리”가 되고 있다는 점은 현하 전개되고 있는 새로운 국사교과서 모임이나 ‘뉴 라이트’ 운동 등을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자들의 다양한 독해방식에 대해 저자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일”이라는 주장이 단순하게 합리화될 수는 없다. 오히려 이 점이 임지현의 ‘대중독재론’이 갖고 있는 객관성과 진보성을 훼손하고 있다.
또한 박정희 체제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모순적이고 복합적인 성격에 의해서 스스로 ‘저항’을 만들어내는 구조를 갖고 있다는 조희연의 분석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경제적 근대화가 정치적, 사회적 근대화를 동반하고 있지 못함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저항, 경제적 근대화로 인해서 나타나는 계급적 양극화 현상 등이 결국 ‘모순적 복합성’이라는 체제 자체의 성격으로부터 잉태되어 나타난다는 점이다. 조희연은 복합성이라는 규정 속에서 대중들의 다양한 삶의 방식이 녹아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현재 진행되고 있는 논쟁이 이전보다 한 단계 진전된 내용을 갖고 있지만,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한 문제들을 짚지 못하고 있다. 첫째로 박정희 체제의 역사성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박정희 체제는 단지 몇 년 동안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한국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시기였던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걸쳐 있었다. 세계사적으로 개발의 시대에서 데땅트의 시대로, 그리고 다시 신냉전의 시대로 전환되는 지점에 있었다. 다양한 변화를 겪었던 시기를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박정희 체제를 하나의 이론이나 틀로서 설명한다는 것은 너무나 몰역사적인 분석이 될 수밖에 없다. 박정희 체제라는 것이 하나의 정형화된 틀이 아닌 이상 20여년의 시기 동안 다양한 형태와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치적 차원에서 최소한의 근대성을 포기하지 않았던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유신체제 사이에서는 커다란 ‘틈’이 존재하고 있으며, 군사쿠데타 초기에 내세웠던 민족주의와 1970년대 이순신을 통해서 부활한 민족주의 사이에서도 질적인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둘째로 박정희 체제를 지탱하고 있는 또 하나의 축으로서 ‘외세’의 문제에 대한 천착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 점이 서구나 일본의 파시즘 체제와 박정희 체제 사이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외세’의 문제는 단지 박정희 체제에 대한 물적인 뒷받침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의 동의를 얻어내기 위한 연성 권력(soft power)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근대화’ 논리는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박정희 체제가 스스로 들고 나왔던 ‘민족주의’의 슬로건을 한일협정을 통해 스스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러나 1970년대 자주국방의 기치 아래 다시 부활시켰던 사실은 ‘외세’의 문제가 단지 변수의 하나로서만 고려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박정희 체제에 대한 논쟁의 전제는 실증적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의 논쟁이 모두 이론적인 측면, 그리고 표피적인 분석에 치중되어 있는 만큼 실제 당시의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규명해내지 못한다면, 현재 전개되고 있는 끊임없이 논쟁은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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