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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희순 - 노래로, 총으로 싸운 조선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정용연.권숯돌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8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여성 의병장 윤희순을 아시나요? ☆
홍범도, 안중근, 이범윤 의사의 이름은 잘 아시겠지만 이들이 정미의병(1907)에 활약한 대표적인 의병장 출신이라는 사실은 아시는지... 그리고 이들보다 무려 12년 전인 1895년 을미의병 때부터 조선 최초의 여성의병장으로 활약한 윤희순의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개인적으론 유관순 열사보다 더 훌륭한 여성독립운동가시고, 김구 선생님을 비롯한 다른 유명한 독립운동가들까지 다 포함해도 순위를 다툴 수 있는 분이라고 여긴다. 그럼에도 많은 분들이 이처럼 훌륭한 분을 모른다.
우리의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 없는 영웅들은 바로 무명의 의병에서부터 시작된다.
의병이란 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 위급할 때 우리 민족 특유의 애국 애족 정신으로 나라의 명령이 없어도 민중이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서 군대를 조직해서 외적에 대항하여 싸운 구국 민병을 뜻한다.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에 의한 의병,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 등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의병들이 활약을 했는데 그중에서 한말 의병활동의 대표적인 여성 의병장이 윤희순이다.
한말의병은 1895년 을미의병, 1905년 을사의병, 1907년 정미의병으로 이어지며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길 때까지 크게 총 세 번의 의병활동이 있었고 그 뒤로는 독립군의 모태가 되었다. 그런데 이 세 번의 의병활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고, 1911년에는 만주로 넘어가 1935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40년간 나라를 위해 싸우신 분이 바로 윤희순 의사시다.
2019년은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을 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여서 다양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독립운동가가 조명되었지만, 여전히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그 존재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천 명이 넘는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있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2018년 8월 15일 기준,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 기록된 여성독립운동가는 325명에 그친다.(참고1)
그런데 2020년 8월에 정용연(그림)+권숯돌(글) 작가가 감동적인 그래픽노블로 윤희순 의사를 되살려냈다. 윤희순 의사가 말년에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쓴 '해주윤씨 일생록'을 바탕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드라마틱한 서사를 전개하여 우리가 몰랐던 한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을 감동적으로 전한 책 <의병장 희순>이다.
이런 훌륭한 분을 소개한 책은 널리 읽혀져야 마땅하다고 여겨,
책의 리뷰를 쓰기 위해 여러 노력들을 했다.
'항일무장 투쟁과 여성독립운동가'를 주제로 근현대사기념관 심철기 학예실장님이 진행하는 온라인 강의 "여성항일무장투쟁의 선구자, 의병 윤희순"을 듣고(참고 2), 윤희순 의사의 동상이 있다는 춘천시립청소년도서관을 찾아갔다.(참고 3)
춘천 가는 길에는 항일의병의 최초 발원지이자 드라마 '미스터선샤인'의 마지막을 장식한 사진의 모델이 된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의병 발상지도 들렀다.(참고 4)
이런 곳들은 일부러 마음먹고 찾지 않으면 알기 힘든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기에 책 이야기를 하면서 함께 하고자 한다.
먼저 윤희순 의사가 어떤 분인지부터 알아보자.
윤희순 의사는 1860년 서울에서 유학자집안인 해주 윤씨 윤익상의 딸로 태어나, 1876년 16세 때 고흥 류씨 유제원과 혼인하여 강원도 춘천에서 살게된다. 1895년 그녀의 시아버지 외당 유홍석이 을미사변에 비분강개해 춘천의병으로 출정하고, 장남인 자신의 남편도 함께 참여하자 의병들에게 음식과 옷, 군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안사람 의병가》 《병정의 노래》 등을 만들어 의병들의 활동을 널리 알리는 데 힘쓴다. 의병들이 무기로 쓸 화승총을 만들기 위해 쇠붙이를 모으고, 오줌을 달여서 화약을 만들고 유황을 모아 탄환을 제작하는 일을 직접 지원했고, 여성들도 나라를 지키자며 '안사람 의병단'을 만들어 의병활동을 이끌어내는데도 적극 앞장섰다.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 시아버지가 자결하려 하자 남편 유제원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을 설득하고, 1911년 가족 모두가 중국으로 망명한다. 중국에서 그녀의 독립운동은 보다 주도적이고 더욱 활발해진다. 1912년 운영자금을 모금하여 노학당(老學堂)을 설립하여, 중국의 여러 마을을 돌며 반일 선전과 모금활동을 이어나갔으며 반일 정신을 심어주었다. 3년만에 50여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그녀는 노학당에서 '연설 잘하는 윤교장'으로 불렸다.
1913년 시아버지 유홍석이 죽고, 2년 뒤 남편마저 죽었지만 그녀의 독립운동은 계속된다. 결혼한 지 20년만에 어렵게 얻은 두 아들 돈상과 민상을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시키고 뒷바라지에 전념한다. 그러다 1935년 7월 큰아들 돈상이 제사를 지내러 집에 들렀다가 중국 푸순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당하다 숨을 거둔다.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 만큼 혹독한 아들의 죽음을 접한 그녀는 깊은 슬픔속에서 곡기를 끓고 《해주윤씨 일생록》을 지어 그간의 삶을 기록한다. 마지막으로 후손들에게 당부하는 말을 남긴 뒤, 아들이 죽은 지 열하루만인 1935년 8월 1일 향년 76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다.
그야말로 3대에 걸쳐 온 가족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 집안을 당당하게 꾸려나간 훌륭한 여성의 삶이었다. 윤희순 의사는 유관순 열사처럼 개화사상의 세례를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이자, 이 땅의 자생적인 사상에 기반을 둔 여성 운동가란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정용연 작가는 특유의 정감 있는 그림체로 때로는 기개 높고, 때로는 따스한 윤희순 의사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나는 윤희순 의사가 평범한 아낙시절 진한 강원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동네 아녀자들과 빨래하고 농사지으며 나누는 대화가 참 인상적이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의병장 희순'은 등장인물 모두에게 애정이 갈 만큼 특별한 작품이며, 윤희순 의사 일가가 중국 망명길에 오르는 장면을 그릴 때는 눈물을 쏟고 말았다고 한다. 정말 가슴아픈 장면이었다.
조선 최초의, 유일한 여성 의병장 윤희순과 안사람 의병단 여성들, 그동안 평가절하되었던 의병 전쟁에 나선 유림과 수많은 이름 없는 의병의 활약을 충실하게 되살려낸 <의병장 희순>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평범하지만 빛나는 영웅들을 만나보기를 바란다.
- 참고 1
2015년 11월 말 기준 독립유공포상자 14,264명 가운데 여성은 270명인 1.9%이고, 3․1운동 포상자 4,832명 중 여성은 87명인 1.8%에 불과하다. 물론 이 숫자가 전체 독립운동가 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광복회는 대일 항쟁기에 독립운동에 참여한 숫자를 연인원 300만 명으로 추산하고, 이 가운데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자발적으로 독립투쟁을 벌이다 전사·옥사·병사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는 15만 명 정도라고 공식적으로 밝힌 바 있다. 이는 당시 조선 전체 인구 2000만 명의 1%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숫자다. 그러나 구한말 의병부터 시작해 광복군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족히 수십만 명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 참고 2
2020년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 기념 시민강좌
<항일무장투쟁과 여성독립운동가>
기간 : 10.15~11.5. 매주 목요일 오후 3~5시
장소: 온라인 / 웨벡스 미팅으로 진행
- 참고 3
네이버 검색을 통해 춘천시립도서관으로 알고 찾아갔다가, 허탕치고 다시 알아보니 '춘천시립청소년도서관'이 정확한 장소였다.
두 장소는 뚝 떨어져있어 차로 15분 거리.
주소는 강원도 춘천시 옛경춘로 830-24.
청소년도서관 뒤편 정원의 동상 앞에서 매년 윤희순 의사의 기일인 음력 8월 1일에 헌다례식을 올린다.
랴오닝성 하이청현 묘관둔 북산(北山)에 안장되었던 유해는 1994년 고국으로 봉환되어 춘천시 남면 관천리 선영에 남편과 함께 합장하였다.
춘천시립청소년도서관에는 동상이, 강원도 춘천시 남면 발산리의 생가터에는 《해주윤씨의적비》가, 묘소에는 《애국선열윤희순여사사적비》 가 세워져 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참고 4
의병활동을 하는 명문가의 여인 '고애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미스터 선샤인' 마지막 회를 장식한 의병 사진의 실제 모델이 양평군에서 일제에 맞서 의병활동을 펼쳤던 지평의병이라고 한다. 윤희순 의사는 이 지평의병이 발생한 을미의병 때부터 의병활동을 지원하며 구국활동에 나섰다.
항일의병의 효시, 지평의병은 1895년 10월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11월 단발령의 공포 후 이춘영과 김백선이 이끈 포군 400여 명이 국가 위기를 인식하고 전국 최초로 의병을 창설하였다. 지평의병은 최초의 을미의병으로 강원지방과 충북지방 의병 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던 대표적인 척사의병이다.
'미스터 선샤인'을 집필한 김은숙 작가는 영국의 종군기자 맥켄지가 1906년부터 1907년까지 한국에 2년 동안 머물면서 양평지역 어느 마을에서 의병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찍었던 의병 사진 한 장에서 영감을 얻어 집필을 시작했다고 한다.
* 구한말 의병의 역사
을미의병(전기 의병)1895년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을미개혁운동을 통해 단발령을 단행하자 전국의 양반 유생들이 들고일어난다
을사의병(중기 의병)1905년
일본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해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이를 계기로 을미의병때 활동했던 의병들과 최익현, 민종식 등 전직 관리들이 일본에 대항해 일으켰다
정미의병(후기 의병) 1907년
일제는 헤이그 사건을 빌미로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대한 제국의 군대를 해산시켰는데 해산했던 군인들은 무장봉기를하는 한편, 무기를 가지고 각지의 의병부대에 참여하면서 무기와 병력이 강화되고, 전술도 발전하면서 의병 구성원들도 농민, 천민, 노동자, 해산 군인 등으로 다양해진다. 그러나 결국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이후 조선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의병들은 만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