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구두당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빨간구두당, 개구리 왕자 또는 맹목의 하인리히, 기슭과 노수부, 카이사르의 순무, 헤르메스의 붕대, 엘제는 녹아 없어지다, 거위지기가 본 것, 화갑소녀전 이렇게 총 8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책에 모인 단편들은 인간 군상의 모임처럼 보이기도 하고, 동물농장의 동물들 개개인의 역사 처럼 보이기도 한다. 온몸의 기름과 피를 태워 힘을 뽑아내지만 '증서'를 얻을 수는 없는 화갑소녀전의 공장 노동자들은 평생 일만하다 죽은 동물농장의 '복서'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노동의 노예나 마찬가지는 현대 대부분의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고. 그래서 씁쓸하다.


왕에대한 복종의 의미로 거대 순무를 바쳤지만 온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초래한 아버지는 생각없는 복종이 낳는 비극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근본에 자리잡은 뿌리를 해결하려는 생각 없이, 그 순간만 넘기자는 안일한 생각. 우리 대부분의 모습이기도 해서 더 복잡한 기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장의 노동자들이거나 순무를 바친 아버지이거나, 색을 보지못하거나 볼 수 있어도 함구하는 마을 사람들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 중 몇몇 용기있는 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덜려가는 하인리히의 뒤를 밟거나, 진리를 탐구하고자 대부분을 보내는 엘제를 따를 것이다. 물론 잘 되지는 않는 듯 하지만.


기슭과 노수부의 이야기에서 이 책 전채를 오히려 잘 요약하지 않나 싶은데, 인간의 굴레나 벗어날 수 없는 고리에 대한 이야기가 결국 이 책이 이야기 하는 부분이 아닌가한다.


그래서 더 우울해지기도 하지만.


읽는 동안에는 재미있게 빠져들어서 읽게 되지만 내가 읽은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책이었다.

세상은 다시금 검정과 하양 그리고 그 사이를 어중간히 맴도는 회색으로 물들었고, 빨강을 볼 수 있는 이들은 침묵했으며, 빤히 보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동안 어느새 아무도 더 이상 빨강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 P26

당신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나는 당신 옆에 있다는 까닭만으로 항상 그렇게 해 왔다는 겁니다 - P50

그러나 지금 이 고통은 내가 살아있었고 살아서 당신을 위해 무언가를 했다는 증거이므로, 내 심장은 기쁘게 터져나갑니다. 몸속을 돌던 붉은 피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밖으로 토해지고 나면 비로소 이 심장은 뛰기를 멈출 것입니다. - P59

인간들은 살아 있는 한 신의 커다란 동그라미 안에 같힌 것처럼 저마다 지겨운 일을 반복해야 하는 운명을 지녔으니까. 얼마나 더 지루하거나 위험하거나 더러우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지 - P85

근본적인 문제를 찾기보단 어차피 내야 할 세금 이걸로라도 때우자 싶었던 생각이 안일했을 뿐이고, 그 안일한 의도와 그걸 수용하는 자의 아량에 차이가 있었던 거겠지 - P121

지금까지 자신이 장악해오던 현실의 갑작스러운 탈색과 결락을 속수무책으로 응시할 수밖에 없는 자의 내상을 엿볼 수 있었다 - P165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성질을 박탈한다는 것은 그 전까지 자신이 존재하던 방식을 포기하고 지금의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조각이 옮겨간다는 뜻이예요. 신이 만들어 낸 우리가 그렇게 허술하고 가볍고 유동적인 존재일까요? 신은 우리를 완벽한 존재로 만들지 않았지만 그렇게 변덕스럽고 추한 존재로 만들지도 않았어요.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하다고 인정한다면 그건 존재의 무게를 부정하는 셈이 되어버려요. 인간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존엄을 간과하는 것이죠. - P198

이변이나 축제는 잠시일 뿐 보통 과격한 방식으로 일상으로 되돌아가곤 했다 - P222

그러나 마른 빵과 채소 수프라는 최소한의 식사를 바탕으로 온몸의 기름과 피를 태워가면서 뽑아내는 힘이었기에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조금씩 모두의 피부는 버석버석해지고 얇아졌다는 사실을, 피부가 가느다란 뼈에 들러붙을 만큼이 되고 나서야 사람들은 알아차렸습니다. - P27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