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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아버지는 전파상을 하고 있었다. 전파상이라고 해봐야 온갖 부품과 전선들이 창자처럼 엉켜 있는 작은 공간이었다. 전파상 앞에는 성치 않은 가전제품들이 쌓여 있었다. 그것들은 조서 작성을 기다리는 파출소 안 취객들처럼 모두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버지는 등받이 없는 의자에 구부정히 앉아, 잘 닦지 않은 안경알 너머로 기기들을 살폈다. 아버지의 눈빛은 뭔가 한가지 일을 오랫동안 해온 사람의 얼굴답게 건성인듯 세심했다. 나는 아버지가 내 충치를 보자 했을 때 그와 비슷한 시선을 느낀 적이 있다. 아버지는 평생 못쓰게 된 물건들을 고치느라 시력과 항문 그리고 허리가 망가지셨다. 아버지가 고치는 물건도, 그것의 고장도 보잘것없는 것이었기에 아버지는 우리가 큰사람이 되길 바랐다. 우리가 비디오 헤드에 걸린 불법 테이프 때문에 끙끙대고, 그걸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 가게에 갖고 가지 못해, 옆동네까지 이고 갔던 애들이란 걸 다 알고 계셨으면서도 말이다.
- 스카이콩콩 p. 63~64
아버지는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깨진 화면은 고칠 수도 없다."
나는 '내 맘은요! 내 가슴은요, 아버지!'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전기밥통을 고친 후 고쳐주마'라고 답하리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훌쩍이고 있는 내 얼굴을 흘깃, 한번 쳐다보더니, 점퍼를 집고 어디론가 후닥닥 사라지셨다. 형은 아버지가 나간 뒤에도 안방에 들어오지 못하고 문밖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 스카이콩콩 p. 70
세상엔 이유를 알고 나면 너무 시시해져버려 오히려 영원히 알지 않는 편이 나은 경우도 있는 듯했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들은 이유가 있다. 그리고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것들은 반드시 할말이 있는 것이다.
- 사랑의 인사 p. 144~145
아버지가 용기내어 말한다.
"괜찮다면 제가 어떻게 좀 해볼까요."
"어떻게요?"
아버지가 그녀 앞에 무릎꿇는다. 그러고는 한손으로 그녀의 팔을 가만히 들어올린다. 사람들은 기대와 의혹에 싸인 눈길로 아버지를 바라본다. 아버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손에 쥐고 있던 감자를 그녀의 팔에 비비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표정이 난감하다. 감자 부스러기들이 지우개 가루처럼 파슬파슬 떨어져나온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정성스럽게 여자의 팔을 마싸지한다. 잠시 후 여자가 어머, 하고 외친다. 두드러기가 가라앉은 것이다.
"어머."
아버지가 말했다.
"그게 네 엄마가 내게 건넨 첫마디였지."
자신감을 얻은 아버지는 다소 과감하게, 마싸지의 범위를 넓혀간다. 그러나 손끝은 여전히 바들거린다. 아버지의 손이 지나는 곳마다 여자의 가려움과 붓기는 사라진다. 여자는 계속 감탄하며 외쳐댄다. 어머, 어머.
"졸리니?"
"아니에요. 아버지, 계속하세요."
"첫날밤에도 네 엄마는."
아버지가 쑥스러운 듯 말했다.
"어머, 어머, 하고 미친 듯이 외쳤지."
나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물었다.
"뭐라고요?"
아버지가 면도칼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말했다.
"아니다."
-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 p. 174~175
나는 문학이 나의 신앙이 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소설을 쓰는 데 배움이나 경험이 반드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소설 안의 어떤 정직. 그런 것이 나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당신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은 제가 당신에게 매우 딱딱한 얼굴로 보내는 첫 미소입니다.
- 작가의 말 p. 267~268
김애란, <달려라, 아비>
'달려라 아비'는 소설적인 사건을 어떻게 이야기 속에 엮어내는지 능청스러움이라고 할까, 소설적 상상력일까? 그런 부분이 참 좋았다. '노크하지 않는 집'은 다 읽고 필사까지 해봤다. 소설 한 편을 짜기 위해 이야기를 구성하고 배치하는 방식을 배우는 점에서 많은 도움이 됐다. 그나저나 80년생 작가인데 2002년에 작품을 발표, 스물 넷에 이런 소설로 등단하다니. 소설 쓰기에 천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게 어린 나이에 재능이 찾아오기도 하는구나.
그녀는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본다. 소설 속에서 느껴진다. 아름답지 않은 세상이건만 아름답게 바라보는 방식을 보여준다.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정직, 솔직함이 분명 그녀의 글 속에 꼭꼭 담겨있다. 어렵지 않은 글, 쥐어짜내지 않은 이야기인듯 해서 더욱 좋았다. 그 이야기들이 무심한 듯 섬세한 목소리에 담겨 귓가에 울린다.
작가는 이 한 번의 미소를 위해 얼마나 오랜 날을 찌푸리고 있었을까. 하지만 또 그렇기에 많은 독자가 맨 끝장을 덮는 순간 그녀의 첫인사에 답하는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