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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ED ㅣ 더 좀비스 시리즈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너는 지금 새롭게 많은 것들을 느낄 그런 시기를 맞이하고 있는 거야."
바통을 이어받아 박순신이 말했다.
"그건 또 무슨 뜻?"
"지금까지는 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시스템이나 장치 같은 걸 그리 의식하지 않았을 거야."
"그럼 안 돼?"
"안 될 건 없지. 다만, 매일 네가 시스템이나 장치 그 자체에 의문을 느끼거나 지겨움을 느낀다면 반드시 화를 내야 해. 이 정도였어,
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아기가 보충설명을 했다.
"너는 머리가 좋으니까, 시스템이나 장치가 눈에 들어오면 금방 그걸 이용해 경쟁에서 다른 사람을 이길 방법을 발견해낼 거야. 이
정도였다, 하고 다른 사람의 행위에 차가운 웃음을 보내며 쉽게 살아갈 방법 같은 걸 찾아내겠지."
"…… 내가 나카가와 같은 인간이 된다는 거야?"
차가 빨강 신호에 잡혀 멈추었다. 아기는 핸들에서 손을 떼고 나를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지금 너는 머리로 생각하기보다 마음이나 혼 같은 걸로 느끼는 편이 좋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
박순신이 말했다.
"어쨌든 당분간은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있을 때 일단 싸워봐. 이 정도였어, 하면서 싸워보지도 않고
물러나는 건 할머니나 하는 짓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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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빌리 엘리어트」라는 영화 봤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화 좀 봐라." 하고 박순신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용쟁호투」도 모르는 나에게 넌더리가 났을 것이다.
아기가 말을 이었다.
"그 영화 말이야, 간단히 말하면 영국의 가난한 노동자 계급 남자애가 발레리나가 되려 하는 이야긴데, 주인공 남자애가 처음부터 끝까지
열심히 뛰고 돌고 그래. 왠지 알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도약은 자신이 있는 장소에서 떠나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야. 발레의 도약도 마찬가지지. 그걸 주테라고 하던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의 주테도 그래. 옛날 유럽은 철저한 계급사회였으니까. 전통이니 인습이니 인간을 구속하는 중력이 너무 셌기 때문에 발레리나가 그
중력을 벗어나 얼마나 높이 뛰어오를 수 있는가를 보고 관객은 감동하는 거야."
아기는 거기까지 말하고 익살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읽은 책에 그렇게 씌어 있었어."
"처음 듣는 말이야."
아기는 웃으며 말했다.
"언젠가 너의 주테를 보여줘."
가네시로 가즈키, <SPEED>
비슷한 소설에서 같은 등장인물을 계속 내세우는 건 그만큼 작가가 자신이 있거나, 애정을 가지고 있거나, 또는 아직 할 얘기가 더 있다는
것이겠지. 주인공들의 나이는 고등학생 정도지만 보통 고등학생 이야기는 아니라는 점이 전 시리즈의 공통점이다. 이제 막 어른의 세계로 한 발
내딛으려 할 때 펼쳐지는 조악한 세계를 하나의 에피소드로써 보여준다.
인물 간의 대화와 가벼운 문장으로 글은 초반부터 속도감있게 전개된다. 쉽게 읽힌다는 것과 시리즈가 있다는 점이 더해져 꼭 만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글의 매력이라면 문장이 제 스스로 튀거나 나서지 않고 사건 속에서 뛰어다니는 인물을 드러낸다는 것. 그리고 복싱의 원투
펀치처럼 고른 리듬으로 하나의 스토리를 따라가다보면 결말에 다다르는 가벼운 소설이라는 점도 매력적이다.
여주인공은 더 좀비스 친구들과 함께 악의 무리를 처단하고 난 뒤 조금은 성장한 듯 보인다. 그러나 이걸 읽으면서 감동이나 여운이 길지
않았던 것은 현실은 이렇게 선과 악이 구분되지 않을 뿐더러 나쁜 놈들만 일을 벌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대학교 축제라는 현실적인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모든 잘못이 악인 한 사람에게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넌센스다. 그런 면에서는 해프닝을 해프닝 너머로 한 발 더 나아가는 '더 좀비스
시리즈'의 다른 편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