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섬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여름이 앞질러 온 것이다. 나는 수영장 옆으로 침대를 옮겨 내놓았지만,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아주 늦은 시간까지 물속에 들어가 있었다. 너무 더워서, 수영장 밖에 이삼 분만 나와 있어도 끔찍스럽게 잔잔한 바람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었던 물은 이내 땀이 되어 버렸다. 새벽에 나는 축음기 소리에 잠을 깼다. 하지만 내 물건들을 찾으러 박물관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난
계곡을 통해 빠져나왔다. 지금 나는 섬의 남쪽 저지대에 있다. 수초들이 무성하고, 모기들이 나를 괴롭힌다. 바닷물, 아니 더러운 물이 내
허리춤까지 차 올라와 있고, 게다가 나는 내가 그렇게 성급히 도망칠 필요가 없었음을 깨닫고 있다. 난 그 사람들이 나를 체포하러 온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면 나를 보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난 계속 내 운명을 따르고 있다. 난 먹을 것 하나 없이 이 섬에서 가장
좁고 인간이 살기에 가장 나쁜 곳에 처박혀 있다. 이곳은 일주일에 한 번씩 바닷물에 잠기는 늪지대이다.
- p. 17~18 (처음)
나는 라바울에서 내렸다. 양탄자 상인의 명함을 가지고 나는 시칠리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사교계 사람 하나를 찾아갔다. 희미하게 비추는
금속성의 달빛과 생선 통조림 공장의 악취 속에서 그는 내게 마지막 주의 사항을 들려주고는 훔친 배 한 척을 주었다. 난 미친 듯이 노를 저어 이
섬에 왔다.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나침반 읽는 법도 몰랐고, 방향 감각도 잃어버렸으며, 모자도 없었고, 병들어 있었고, 또 종종
헛것도 보았기 때문이다. 배는 섬의 동쪽 모래밭에 좌초했다. 물속에 섬을 에워싼 산호 암초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난 그 끔찍한 경험을 되새기면서
내가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사실도 잊은 채 하루 이상 배 안에서 머물렀다.
- p. 24
이 사람들 중 한 명이, 여자 하나가 매일 저녁 바위에 앉아 석양을 바라본다. 검은 머리카락 위에 밝은 스카프를 두르고, 두 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으고 있다. 피부는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내리쬐던 햇볕에 그을린 탓인지 구릿빛을 띠고 있다. 그녀의 눈과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가슴은 내가 혐오하는 그림들에 나오는 어느 집시 여인이나 스페인 여인의 것들처럼 보인다.
- p. 34
그녀는 매일 저녁 석양을 바라본다. 나는 숨어서 그녀를 바라본다. 어제 그리고 다시 오늘도 난 내 밤과 낮 동안 내가 이 시간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았다. 집시처럼 관능적이고 너무나 큰 색색의 스카프를 두른 여자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그러나 아직도 난 그녀가 잠시라도
나를 바라보고 한 번만이라도 나와 이야기를 했다면, 그런 단순한 행동에서조차 나는 한 남자가 친구나 친척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얻을 수 있는 일종의 흥분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그럴 수 있을지 반신반의할 뿐인지도 모른다.
- p. 35
나는 보름 동안이나 계속해서 연구하고 실험했다. 그리고 지칠 줄도 모르고 각각의 내 행동을 연습했다. 또한 포스틴이 말하는 것, 그녀의
질문과 대답을 연구했고 종종 적당한 말을 요령껏 삽입했다. 그래서 마치 포스틴이 내게 대답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내가 항상 그녀를
따라다니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움직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보통은 내가 그녀보다 앞서 걷는다. 난 일반적으로 우리가 헤어질 수
없는 친구이며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말조차 필요가 없다는 인상을 주길 원한다.
- p. 161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모렐의 발명>
사형을 피해 무인도로 도망온 사내. 그곳에서 반복되는 영원한 일주일. 그리고 한 여자를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다.
허구적인 이야기에 오히려 사실적인 묘사를 사용했다. 신비스러운 광경과 이상한 현상들 속에서 주인공이 모험을 하듯 돌아다니는 것이
추리소설의 느낌도 난다. 일기의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이야기가 품고 있는 어떤 비밀을 밝혀내겠다는 생각으로 읽었다. '어떻게 된거지?' 하는
의심이 이야기를 중반까지 끌고 갔는데 끝부분에서는... 그냥 멍해졌다.
환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결국은 사랑이었다. 모렐의 발명도 인형처럼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서 무기력한 짝사랑을 운명으로 바꿔놓으려는
것도 결국은 헛된 사랑을 향한 헛된 헌신.
수많은 연습과 실수와 하찮은 궁리조차 모두 의미있는 것으로 바꿔놓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주제. 그것에 관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