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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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은교, 네게 첫 편지를 쓴다. 지금은 부치지 않을 편지를. 그래도 편지, 하고 발음하고 나니까 사탕을 물었을 때처럼 혀끝이 달콤하다. 사실은 네게 편지를 쓰고 싶은 날이 그동안에도 참 많았었어. 그렇지만, 나는 어두컴컴하고 너는 시리게 푸르다. 어찌 그걸 부정하랴. 젊은 날에 만났다면, 그리하여 너와 나 사이에 아무런 터부도 없었다면 너를 만난 후, 나는 아마 시를 더이상 쓰지 않았을 것이다. 네게 편지를 쓰면 되니까.

- p. 90

 

 

달이었다. 이제 막 해가 졌는데도, 달이 휘영청 밝았다. 보름날인가보았다. 달빛은 은교의 이마처럼 희고 소나무 그늘은 은교의 눈썹처럼 검푸르렀다.

-p. 133

 

 

  "연애가 주는 최대의 행복은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처음 쥐는 것이다."

- p. 200

 

 

  따라서 노인의 욕망도 범죄가 아니고 기형도 아니다, 라고 또 나는 말했다.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 p. 250~251

 

박범신, <은교>

 

  기대했던 것보다 실망했던 책.

 

  '어떻게 썼을까' 하는 관점으로 소설을 보기 시작하니 어느순간 평가의 기준처럼 돼버린 것이 한 가지 생겼다. 그건 작가가 '어떻게 드러나느냐'이다. 시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가장 선호하는 쪽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반대로 작가가 작중 인물 중 어느 한 명의 탈을 쓰고 말하듯이 느껴지는 것은 최하다. 작가의 생각에서 분신처럼 튀어나온 인물이란 있을 수 있으나 그게 말을 하고, 주도적으로 어떤 생각을 펼치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징그럽다.

 

  이적요에서 작가가 너무 드러난다. 물론 실제 작가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적요가 아닌 인물들은 개연성이 부족했다. 하나의 모티프를 위해 이적요 주변에서 움직이는 인형이었다. 오로지 은교를 위한, 은교의 소설이기를 기대했던 것이 그렇게 어긋났다. '롤리타'와 비슷한 듯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르다.

 

  아포리즘과 시가 섞인 글은 나쁘지 않았다. 그것을 쓰기 위해 이적요 · 서지우 · 은교가 나왔구나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밸런스로 놓고 보자면 이야기보다는 글이 앞선달까.

 

  아쉽다. 욕망의 불씨는 발화되지 않았는데 갈망에 스스로 족쇄를 채운다. 그저 찰나의 빛이다. 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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