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을 찾아서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마사오.

  나는 지금 그를 만나러 간다.

  내 마음의 시생대, 가장 오랜 영토를 지배하는 영원한 왕. 세월이 흘러가도 추억은 남듯이 그가 통치하던 땅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 땅에 있는 것들은 모두 일월의 빛과 그늘에 눌리고 밟혀서 묵은 책 속의 검은 활자처럼 단단하고 납작하게 고정되어 있다. 정작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마사오가 죽은 것이다. 마침내, 드디어, 이윽고 때가 되어 그의 육체에도 안식이 찾아들었다.

- p. 9

 

 

  육이오가 터졌을 때 동네 사람들은 마사오의 아버지가 기마 경찰 일 개 분대와 함께 보무도 당당하게 마을 앞을 지나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데, 그때가 마사오의 아버지에 대한 공포심이 가장 커졌을 때였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꼼짝할 수 있었던 것은 눈알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사오의 아버지는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그저 납작하게 엎드린 동네를 한 번 훑어보았을 뿐이었다. 그뿐, 나 여기 있다고 공포를 쏜다든가 동네를 향해 침을 뱉고 눈을 부라린다거나 하다못해 손을 흔들어 보인다거나 하는 행동도 없이 그냥 지나갔다. 그게 그가 동네 사람들의 눈에 띈 마지막 모습이었다.

- p. 17

 

 

  그는 악취가 나는 도시 뒷골목에서 먹고살아보겠다고 바둥거리고 있는 나를 위문한답시고 소주 됫병과 쥐포 열 마리를 위문품으로 가져왔다. 위문하는 사람답게 흰 와이셔츠에 값비싼 양복을 입었다. 그 양복을 사입을 돈은 있고 내 위문품을 사느라 돈을 다 써서 우산 하나 살 돈도 없었는지, 장대비를 흠뻑 맞으며 왔다. 또 바쁜 시간을 쪼개어 위문하는 사람답게 새벽 2시가 넘어서 방문했다. 위문을 하느라 얼마나 바빴는지 초인종도 누르지 않고 대문을 넘어와서 지하방에서 곤히 자는 사람을 깨웠다. 그의 주먹에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나는 그가 이미 취한 것을 알았다.

- p. 310

 

성석제, <왕을 찾아서>

 

 

  소문과 입담을 위한 소설이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주인공은 어린시절 왕으로 여기던 마사오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그를 추억하며 유년의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초반부까지는 익숙한 구성과 진행방식에 작가의 입담이 더해져 술술 익히는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시종일관 입담과 소문과 말 들의 변주를 늘어놓으며 마무리짓는 건 오히려 지루했다. 클라이막스가 없는 장편이고 익살과 재치만 유감없이 드러내기 위해 작정하고 쓴 글이었다.

 

  재밌는 글이 아니면 싫다고 한들 오로지 재미를 위해서만 다른 걸 포기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도 좋고, 능구렁이처럼 넘어가는 과장된 서술도 좋다. 사람들은 풍자라고 하지만 와닿지 않는 풍자인 그런 무엇도 괜찮았지만. 가장 핵심이 돼야 할 스토리가 엉성하다. 장원두가 마사오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어쩌다보니 박재천의 계획에 말려들고 새로운 왕이 되는 것을 목격한다? 다른 모든 과거를 얼렁뚱땅 넘어가고 재치있게 풀어놓더라도 현실의 이야기만은 개연성있게 이어갔으면 좋았을 텐데. 주된 이야기마저 넉살 좋게 넘어가려 하니 다 엉켜버린다. 이런식으로밖에는 안 되는 거였을까. 너무 흐지부지한다는 생각이다. 작가는 이 소설로 보따리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모든 소문과 이야기로 실컷 넉살을 부리고 싶었겠지만.

 

  글로만 보자면 매끄럽다. 다듬어진 글이라기보단 말에 가까운 글이라서 금방 읽을 수 있다.

 

  소설이 다루는 세태 혹은 시대와 비슷한 영화를 꼽자면 <범죄와의 전쟁>, 소설 초반 장원두의 유년시절을 통해 떠올렸던 건 만화 <20세기 소년>.

 

  이번에도 개인의 취향이다. 만담 같은 장편 소설은 별 생각없이 읽기에 좋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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