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글 - 우리의 글쓰기가 가야 할 길
조르조 아감벤 지음, 윤병언 옮김 / 책세상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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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과 글 >

-조르조 아감벤 / 책세상 -

 



내게 이런 류의 책들은 아직 많이 어렵다.
멀리서 나무를 보며 아름답구나 하던 것과는 달리, 나뭇잎을 하나 주워서 표면은 어떠한지 그 뒷면은 또 어떻게 생겼는지 속엔 어떤 물길이 있어서 흐르는지 그에게 잠시 머물다 간 존재들의 흔적이 남았는지 그들은 또 누구인지 끝도 없이 펼쳐지는 미지의 세계를 걷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그 세계로 들어가는 시간도 오래 걸린다.
이 책도 두 쳅터가 지나갈 때쯤에서야 저자의 목소리가 비로소 조금씩 들려온다.
그렇지만 그렇게 들리기 시작하면 쉽게 읽히던 책들보다 훨씬 더 즐거워진다.
단어가 주는 명료함보다는 그 단어의 생성과 그로 인해 반짝였을 행성들이 나에게도 조금씩 보이면서 다가오는 느낌이랄까.
글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는 나로서는 어쩌면 이 책으로 인해 더 위축되고 그래서 더 멀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에 새겨지는 문장들은 오히려 나를 자유롭게 한다.
비유와 서사를 지칭하는 불과 글은 다른 듯하지만 서로를 바라보고 있고, 무언가를 정확하게 말할 수 없는 나는 말하는 것에 저항하여 획득한 무능력을 소유하여 나만의 여백이 생긴 것 같기 때문이다.
내용은 그가 강연했던 글도 있고 이 책에서 처음 소개하는 부분도 있다고 한다.
의도적인 연결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읽다 보면 왜 '불과 글'이라는 제목을 붙였을지 조금은 느낌으로 와 닿는다.
굳이 독특한 부분을 또 꼽는다면 목차 부분이 생소하면서도 새롭다.
대부분은 소제목을 열거하는 것에서 그치는데, 이 책은 그 소제목마다 짧게 중심 문장을 소개한다.
그 부분이 처음엔 막연하게 읽혔는데 책을 덮을 때쯤엔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물방울처럼 똑 또옥 떨어지며 읽다가 어느 순간부터 내 안에서부터 시작되는 소용돌이를 느끼며 읽게 되는 것 같은 책.
책과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책의 운명과 그러기에 세상과 책 스스로를 파괴해야 하는 숙명을 감내해야 하는 건 어쩌면 인간을 닮은 것이 아닐까..
인간 스스로 책이길 소원하며 자신들의 존재의 흔적을 남기는 방법이 아닐까..

 


"정치와 예술은 과제가 아니며 단순히 '작품'이라고도 할 수 없다. 정치와 예술은 오히려 언어적, 육체적, 물질적, 비물질적, 생물학적, 사회적 기능이 해제되는 차원, 아울러 해제된 상태로 관조되는 차원을 가리킨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적인 삶의 형태란 스스로의 작품 속에서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스스로의 잠재력을 관조하고 그 안에서 평화를 찾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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