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 - 법정과 최인호의 산방 대담
법정.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 꽃잎은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 >

        -법정과 최인호의 산방 대담 / 여백



* 일단 출판사의 이름이 마음에 듭니다.
여백이란 나의 공간을 줄이고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의지가 들어 있으니까요.
나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독자의 생각에 귀를 열겠다는 마음이 들어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불교계의 거장이었던 법정 스님과 가톨릭의 깊은 영성을 추구했던 최인호 소설가의 만남을 회고하며 쓴 이 글은, 결국 두 분이 모두 죽음의 문을 열고 들어간 이후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글을 읽으며 재미있는 것은, 최인호가 질문을 해도 그 대답을 그가 더 많이 한다는 점입니다.
법정은 말이 아닌 여백으로 그가 거한 시간과 공간을 채웁니다.
짧은 시간, 서로에게 호감을 보이던 자들이 만나 속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떠했을까요..
저도 실은 글이 말보다 훨씬 편한 사람이랍니다.
글에선 수다스러워도 실제 만나면 말주변이 없어 상대를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는가, 심심한 사람을 마주보며 의아해지는 것이지요.
젊은 날엔 그 여백을 보이는 것이 싫어 억지로 말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오는 길은 급조된 수다로 더 허탈해지기도 했지요.
어느 때엔 나보다 더 침묵에 익숙한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기다려주지 못하고 그 빈 곳을 채우려고 안달이 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언어로 채워야 하는 벽이 있는가 하면 침묵으로 알아가야 하는 방이 있고, 대화자들의 세계를 뛰어넘는 그 무엇을 발견하는 광야에 뚝 떨어져서 서 있어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갑니다.
그런 점에서 최인호와 법정의 대화는 내용 이전에 또 다른 즐거움을 맛보게 합니다.
내용은 우물 속의 깊은 맛까지 느낄 정도는 아니지만, 읽다 보면, 아..법정의 책 한 권을 빌려와야겠구나, 최인호의 소설도 읽어보고 싶구나, 그런 생각을 들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 역시 여백을 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네요.
삶에서 죽음까지, 종교와 생각의 깊이, 글쓰기와 시대 정신 등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편안하게 자신의 생각들을 풀어놓는 이 책은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을 더 살갑게 사랑하고 싶어지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제법 말들이 많은 공간에서 거했답니다.
나와 섞이는 말이 많지 않은 곳에 같이 있으면서도 그 말들이 떠돌아다니는 모양을 보노라면, 한 편으로는 따뜻한 봄볕같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서늘한 가을 바람이 머리카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것도 같습니다.
'수직적인 관계가 연상되는 베풂보다는 수평적인 느낌이 나는 나눔이란 말이 더 좋다.'
'외로움은 옆구리로 스쳐 지나가는 마른 바람 같은 것이다. 그 바람을 쏘이면 사람이 맑아진다.'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은 나다운 내가 되고 싶다.'
'느리게란 시간의 낭비가 아니라, 분주하면서도 사고와 의식은 모든 것을 관찰하는 충분함을 의미한다.'
오늘 내 곁에 떠돌던 말들보다 지면을 통해 내 곁에 다가온 이 말들이 더 나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꽃잎은 떨어져도 꽃이 지지 않는 것을 느끼는 삶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있을까요..
꽃이 피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거나 알아주지도 못하고 빨리 걷던 걸음은 또 얼마나 많았던지요..
새해엔 조금 더 여백을 가지고 만나야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생명이든 사물이든 무엇이라 이름짓기조차 힘든 것들이든..
겨울해가 짧습니다.
서서히 저물어가는 시간 속에서 새롭게 시작된 한 해의 둘째날이 흘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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