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는 미쳤다 - 성격장애와 매력에 대한 정신분석 리포트
보르빈 반델로 지음, 엄양선 옮김 / 지안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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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에 대한 슬픈 보고서 -<스타는 미쳤다>를 읽고

 

학창시절, 잠을 자다가 잠시 깨었을 때 라디오에서 들린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은 내 영혼을 울렸다. 이전엔 락음악을 아무 것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음악은 다르게 들렸다. 그렇게 너바나와 너바나의 보컬 커트 코베인은 나의 우상이 되었다. 주위에 친구가 별로 없긴 했지만 락음악을 듣는 친구는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나는 혼자 너바나의 노래 가사를 흥얼거리며 다녔다. 커트 코베인의 사진과 뮤직비디오, 라이브 동영상을 보았고 너바나의 음악 테이프를 사 모았다. 어느 날 밤엔 너바나의 모든 음악을 들어보기 전에 세상의 끝이 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게 추종하게 된 데에는 커트 코베인의 어둡고 슬픈, 저항적인 이미지와 목소리가 한 몫 하였다.

하지만 커트 코베인을 알면 알수록 딜레마가 커졌다. 그를 존경하고 선망하는 것이 분명했지만 그의 삶은 내가 따라 가야할 지향점을 제시하고 있진 않았다. 이 두 가지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 곤혹스러웠다. 일반적으로 존경이란 건 당연히 삶을 포함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의 음악은 좋았다. 그러나 그는 왜 마약 중독, 온갖 난폭한 행동, 자살(타살 의혹도 있지만)로 마감한 인생을 살아야 했던가? 그 불행한 삶을 따라 산다고 내가 인생의 심오한 진리를 깨닫는 열반(Nirvana)에 이를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현재의 나는 커트 코베인 역시 하나의 불완전한 인간이었고 어쩌면 그 불완전함이 더욱 그를 매력적으로 만들었는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보르빈 반델로가 쓴 <스타는 미쳤다>를 읽고 이런 생각은 더 확실해 졌다. 정신장애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인 저자는 위대한 스타들에게 극적, 감정적, 변덕스러운 성격장애가 더러 있으며 이 장애 때문에 그들이 스타가 될 수 있었다고 쓴다. 우울함이나 흥분은 그들이 감성을 더 풍부하게 표현하도록 해준다. 또한 자기 과시적이거나 인정욕구가 강한 성격장애의 특성은 그들에게 스타가 되고자 하는 원동력이 돼준다. 이렇듯 스타와 성격장애의 연관성을 연구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책에는 우리가 잘 아는 스타부터 잘 모르는 스타까지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폭식증을 겪었고, 마이클 잭슨은 아동성도착,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마릴린 먼로는 경계성 성격장애의 징후를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불운한 삶과 비참한 결말을 보여주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자살로 인생을 마쳤던 우리나라의 연예인들 생각도 났다. 앞으로 성격장애를 겪고 죽음으로 자신을 몰아갈 사람들은 더 늘어날 것이다. 성격장애나 우울증으로 고통 받는 스타들이 줄어들지도 않을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정의 파손, 아동 성폭행, 빈부 격차 등의 문제는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욱 책에 대해 아쉬운 점을 감출 수 없다. 에필로그를 읽고 나면 스타들의 망가진 삶을 지향할 필요는 없지만 어찌할 수도 없다는 중립적인 시선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결핍이 그들을 더욱 빛나게 했다고 해서 그 자체로 긍정하고 놔둘 순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성격장애를 문제로 파악한다면 대안을 고민하는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단지 가십거리 읽듯이 스타들의 불행을 곱씹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다. 오드리 햅번도 한때 거식증으로 고생했다고 하지만, 말년까지 아름다운 내면과 외면을 가꾸어 추앙을 받았다. 성격장애를 극복한다고 해서 스타의 매력이 없어지지 않는다. 아픔을 건강하게 승화시키면 더 빛나는 스타가 될 수 있다. 별(Star)은 어두운 밤을 견뎌내기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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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2disc, 일반판)
데이비드 핀처 감독 / 워너브라더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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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적인 이야기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라는 영화를 보고 감동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F.스콧 피츠제럴드가 쓴 원작 소설도 읽어보았다. 기본 스토리를 제외하면 영화와 상당히 달랐지만, 여전히 신비한 뉘앙스가 가득했다. 어떤 한 사람의 시간이 저 혼자 거꾸로 간다는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왜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에 반해서 귀를 기울일까? 분명한 건 무언가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감독과 작가는 시간의 역행이라는 설정을 통해 삶과 죽음, 사랑에 대해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삶이라는 건

 벤자민 버튼은 할아버지로 태어나 세월이 흐를수록 젊어진다. 그 괴상함은 태생적이며 어떤 노력으로도 바꿀 수 없다. 주인공은 결국 자신의 상황에 적응하며 현실에 대처해 나간다. 주인공이 결핍을 그대로 지닌 채 살아간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실제로 삶이 그러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설명할 수 없고 극복할 수 없는 결핍이 있는데도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에 위로를 받는다.




 죽음이라는 건

 책과 영화 모두 죽음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잘 드러내고 있다. 특히 영화는 원작소설이 단편이라는 한계로 다 담지 못했던 메시지를 잘 풀어서 보여준다. 선장이 죽기 전에 남기는 대사는 원작소설엔 없지만 감동적이다. “현실이 싫을 때는 미친개처럼 해도 되고 원망도 해도 되고 신을 욕해도 되지만, 마지막에는 받아들여야한다.”

 카메라는 벤자민 주위 사람들이 하나 둘 마지막 눈을 감는 장면을 담담하게 담아낸다. 누구나 언젠가 경험해야 하는 순간들이기에 그 모든 것을 내 눈에 담았다. 그리고 결국엔 나 자신의 죽음도 그렇게 찬찬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사랑이라는 건

 책과 영화의 결정적 차이점은 사랑의 모습에 있다. 영화를 보았을 때 내가 받은 인상은, 한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인생이 아름답다는 거였다. 그러나 원작에선 시간이 지나자 사랑이 식는 과정이 매우 현실적으로 나타난다. 심지어 벤자민이 마지막 눈을 감을 때 그의 곁을 지키는 건 아기 보는 보모이다. 재미있기도 했고 실망스럽기도 하였다.

 아무래도 영화감독이 로맨티스트여서 원작을 뜯어고친 모양인데 그 두 가지 사랑의 모습 모두 현실에 존재한다고 본다. 사랑은 생에서 중요한 요소가 될 수도, 아무것도 아닌 요소가 될 수도 있다. 어떤 심장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전자가 되거나 후자가 될 것이다.




 한 편의 生

 카메라는 인물이나 풍경을 느리고 섬세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화면을 바라보면서 세상과 삶에 대한 깊은 애정을 엿볼 수 있었다. 사실 그 화면에 반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런 시선으로 나도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모든 순간은 되돌릴 수 없기에 아련하고 소중하다. 간혹 결핍된 무언가로 인해 고통 받고, 사랑을 갈구하지만 고립되기만 할 때가 있다. 그러할지라도 지금 주어진 것들때문에 감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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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적 책읽기
김기현 지음 / SFC출판부(학생신앙운동출판부)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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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적 책읽기’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찬반을 분명히 하는 읽기, 글쓰기이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근거와 지식, 관점이 확고하게 있어야 한다. 샘플이랄 수 있는 저자의 공격적 서평을 통해 우리도 우리의 입장에 대해 고민할 수 있다. 고민해야 할 분야는 다양하다. 돈, 기도, 문화, 평화, 타종교, 이성, 고통, 국가, 정치, 무신론, 과학, 전쟁. 저자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번쯤 생각해보았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분야들에 대한 입장 표명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공격적 책읽기>는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다시 말해 생각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서평 중에서 가장 감탄했던 것은 김동호의 <깨끗한 부자>를 읽고 쓴 ‘축복과 기복의 가파른 경계선에서’였다. 법정스님의 죽음과 함께 ‘무소유’가 부각되면서 한국교회는 다시금 부의 축적에 대한 질타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교회에서는 부자가 되어서 나누며 살아야 한다는 설교가 들려왔다. 한 후배가 그 설교를 듣고 불만을 표했지만 나는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그 설교는 뭔가 아니긴 아닌데.’라고 생각했지만 내 입장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것이 왜 잘못된 주장인지 근거를 대며 통쾌하게 설명해낸다.


저자에 의하면 김동호의 청부론은 마가보다는 누가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이 공평하다. 마가는 소유의 전적인 포기를 요구하고 누가는 소유권의 포기, 즉 재물의 올바른 나눔을 제자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의 잣대를 들이대었을 때에도 청부론은 기준미달이다. 그가 깨끗한 돈벌기와 사용을 주장하는 것은 누가의 기준에 합당하지만 부를 경계하라고 하지 않고 추구하라고 하는 부분에서 엇나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날카로운 지적은 재물과 나눔, 제자도에 대한 내 생각을 돌아보게 해주었고 주님 앞에 회개하는 기회를 주었다.


그런가 하면 저자의 서평에 입장을 달리하며 읽었던 것도 있었다. 그것은 프란시스 쉐퍼의 <이성에서의 도피>, 윌리엄 뎀스키의 <지적 설계>를 읽고 반박한 두 개의 서평에서였다. 저자가 그들의 한계를 보았다면 나는 그들의 전도 열망과 중개자 역할을 보았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큰 역할이다.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에 다만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믿는다. 그 믿음이 하나님을 믿는 것도 방해한다. 반면 ‘신’의 존재를 알면 ‘신’이 하나님일 수 있음도 고려하게 된다. 이러한 설득을 위해 쉐퍼와 뎀스키는 무신론자들의 기반인 이성과 과학을 사용하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그들의 한계는 복음의 독특성으로 승부하지 못하고 하나님께로 정확히 인도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저자의 문제의식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죄 많은 이 세상’보다 ‘죄 많은 이 교회’를 걱정한다. 외부를 변화시키기 위해 이것저것 끌어다가 함께 망하지 말고 내부를 똑바로 하길 주문한다. 교회와 정치의 관계를 말하면서, 지금은 정교분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현재 교회는 세상과 다를 바 없고 영향력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상의 상식에도 따르지 못해 욕을 듣는다. 나는 세상에 대해, 교회에 대해 생각해본다. 저자의 의견에 그럴싸한 반론을 제기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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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동안의 고독 -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문학사상 세계문학 6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김욱동 해설 / 문학사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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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을 때, ‘백만 년 만에 만난다.’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여기서 백만 년이라는 과장된 표현이 이 책 제목에서 나오는 ‘백년’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0이라는 숫자는 무척 인상적이다. 한 인간의 수명이 기껏해야 100살 안팎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왜 100이 그렇게 ‘몽땅’이라는 느낌을 주는지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그냥 고독이 아니라 100년 동안의 고독이라고 제목을 붙이며 우리를 기겁하게 한다. 한 인간의 생애가 지나갈 동안의 고독! (사실 책을 읽어보면, 이 고독은 몇 세대에 거쳐 나타난다.)


기억에 남았던 건 엄마인 우르술라가 노년의 지혜로 아이들을 평가하는 장면이었다. 그녀가 볼 때 고독남의 최고봉은 둘째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었다. 우르술라가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을 생각하며 내리는 결론이 이랬다. 아무 것도 사랑하지 못하는 성격! 나는 깜짝 놀랐다.

‘이건 내 성격이잖아!’ 나 말고도 천성적으로 고독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건 퍽이나 가슴 떨리는 경험이었다.(어째서?)

그렇다면 고독녀의 최고봉은 누구일까? 모두 예상했겠지만 그 영광은 아마란따의 차지이다. 그런데 우르술라는 아마란따에게 이런 심사평을 내린다. 사랑이 무척 많은 성격! 이 무슨 고독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해괴한 소리란 말인가. 설명하자면, 너무나 사랑이 많았기에 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걸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그럴 듯하다. 물론 아마란따가 사랑했던 사람을 거부한 데엔 레메디오스의 돌연한 죽음에 따른 죄책감도 작용했을 것이다.(만고 내 생각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유의 전부일까? 나의 의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아마란따가 죽기 전에 깨닫는 한 가지 사실이 많은 것을 설명해주지 않나 싶었다. 그러니까 엄마인 우르술라가 꿰뚫어볼 수 없었던 사실.

그것은 그녀가 오빠인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을 사랑하였다는 사실이다. 밑도 끝도 없이, 그러니까 복선이 될법한 사건이나 장치 하나 없이 뜬금없는 전환이었다. 그럼에도 아마란따의 결정들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되어준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 그리고 아마란따 부엔디아. 이들이 그렇게 상반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또한 이루어질 수 없는 연모의 감정도 얽혀 있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쇼킹해서 설득력이 있었다. 다르기 때문에 사랑했던 것일까. 뭐, 내 생각엔 그랬을 것 같다. 이 사랑이 결국은 후손들을 통해 이뤄지는데, 막장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돼지꼬리를 달고 태어나긴 했지만 어쨌든 백년 만에 진정한 사랑의 결정체가 태어났으니 기뻐해야 할까. 짝짝짝!


인간의 고독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해본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처럼 선천적으로 고독한 경우가 있고, 아마란따처럼 사랑은 많지만 말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우르술라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하지만, 내 생각엔 친오빠를 사랑해서가 분명하다~) 고독해지는 경우가 있는 것일까? 이런 고독남, 고독녀 등장인물들을 통해 우리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왜 고독한가? 라는 질문에서 나는 왜 고독한가, **는 왜 고독한가... 등등. 답은 나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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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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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척수성 소아마비 혈청을 개발하는 연구에 사용되는 원숭이는 혈청을 뽑기 위해 계속해서 척수에 구멍이 뚫린다. 과연 그 원숭이가 고통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원숭이의 제한된 지능으로는 인간의 세계, 즉 고통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인 인간의 세계를 껴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어떠한가? 인간세계가 우주진화의 종착점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만약 인간의 세계를 넘어선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면 우리의 제한된 지적 능력으로는 삶의 궁극적 의미를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정신과 의사 빅토르 프랑클은 이 이야기를 통해 삶의 절대적인 의미를 합리적인 말로는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 무능력함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만들어낸 로고테라피(의미 치료)의 기본 원리는 아래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p166 궁극적으로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어선 안 되며, 질문을 받은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는다는 말이고, 인간은 자기 자신의 삶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됨으로써만 삶에 대답할 수 있을 뿐이며, 삶에 책임을 짐으로써만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로고테라피는 책임을 지는 데에서 존재의 참된 본질을 찾는다.

 즉 막연한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지 말고 현재 개개인이 실현해야 할 구체적인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삶의 의미가 주어진 순간이나 각 개인의 상황에 따라 수시로 달라지기 때문인데, 마치 체스 경기에서 그때그때의 상황과 상대방 특유의 개성에 따라 가장 좋은 수가 달라지는 것과 비견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처해야했던 유대인 수용소에서는 어떤 삶의 의미가 있었을까? 인간적인 삶의 환경들이 누락되었고 개인의 의지가 말살 당했고 존엄성이 무시당해 가축과 같은 하루 하루를 살며 언제 죽을지 모를, 혹은 코 앞에 다가온 죽음을 목도해야 했던 그곳에서? 빅토르 프랑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창조의 즐거움만이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삶에 적어도 어떤 의미가 있다면, 고통에도 반드시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한다. 고통은 운명이나 죽음처럼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고통과 죽음 없이는 인간의 삶은 완전할 수 없다. -P111

 그는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그 고통을 껴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통에서 의미를 찾는 것만이 희망이 될 수 있었다. 그러지 못한 많은 이들이 버텨낼 정신력을 얻어낼 수 없었으며 우울과 낙심 속에서 지내야 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죽음의 길로 들어섰다고 생각한 저자가 살아남고, 삶을 선택했다고 생각했던 이들이 죽게 되는 이야기였다. 나는 평소 죽음(고통)이 두려워 어떤 가치를 포기하지 않을까, 하는 비겁함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그런데 신은 운이랄까 기적을 통해 삶의 아이러니를 만든다는 걸 깨닫고 조금 안심이 되었다. 저자는 1부 마지막문장을 이렇게 쓰고 있다.
 p147 집에 돌아온 사람에게 있어서 모든 경험 중 최고의 경험은 모든 고통을 겪은 후에 이제는 하나님 이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경이로운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치를 지키고자 하면 많은 경우 생명을 보존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고 이러한 선택을 한 존엄한 분들이 나를 숙연하게 한다.

 p24~25 대개 보면, 몇 년간 수용소를 이곳 저곳 끌려 다닌 끝에 생존을위한 싸움에서 양심의 가책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남아있지않게 된 죄수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알게 모르게 모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정당한 수단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심지어는 야만적인 폭력에, 도둑질에, 친구까지도 배신했다. 운이 좋았다고 할까, 아니면 기적이라고나 할까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 하여튼 살아서 돌아온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우리들 중 가장 훌륭한 사람은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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