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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회의 - 비엔나회의 외교 나남신서 704
김용구 지음 / 나남출판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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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폴레옹 전쟁에서 연합국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의 돈줄과 러시아의 기병 때문이었다. 전후 유럽의 경제도 영국의 상품이 압도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군대는 유럽 전역을 석권하였다. 니펄레옹의 ‘위대한 군대’(la grande arme’e)는 사라졌으나 그 대신 유럽 열강들에게는 러시아 군대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잡게 되었다. 전후 유럽에는 두 가지 두려움이 있었다. 하나는 혁명이고 다른 하나는 코작 기병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리치(Norman Rich)교수는 1854년 크림 전쟁을 러시아에 대한 예방 전쟁 또는 러시아 봉쇄정책의 결과로 해석하고 있다. / 김용구 <춤추는 회의> (나남출판. 1997), p. 67

19세기, 러시아라는 거대한 세력에 대해 유럽이 공유한 공포는 러시아 봉쇄정책을 가져왔다. 오늘날의 세계는 어떠한가. 20세기 말 소련의 붕괴와 함께 러시아는 ‘봉쇄의 대상’으로부터 ‘하나의 열강’으로 새로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더이상 러시아는 19세기와 같은 압도적 제국도 아니고, 20세기와 같이 이데올로기적 전염병을 옮기려 하지도 않는다. 즉 더는 봉쇄되어야 할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 러시아의 역할은 사라진 것일까.

실제 나폴레옹 전쟁은 러시아가 세계(유럽)를 무대로 주연으로 등장, 그 저력을 과시하고 아시아적 국가에서 유럽적 국가로의 편입을 인정 받는 분수령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러시아는 표트르의 치세 이후 스웨덴과 폴란드 오스만 투르크를 압박하며 강대국으로 등장했으나 서유럽과의 거리로 인해 동구와 북구에 한정해 영향을 행사하는 지역적 강국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은 러시아 자신은 물론 서유럽에서 러시아의 거대한 역량을 깨닫고 러시아가 더이상 지역적 강국이 아님을 확인하는 계기였던 것이다.

나폴레옹 전쟁 후 유럽은 그들의 국제정치 원칙인 세력균형에 의거, 러시아라는 대국에 잠재된 거대한 힘을 좌시하지 않는다. 1854년, 유럽의 거의 모든 정치주체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세바스토폴로 향한다. 결국 러시아는 후퇴한다. 러시아 봉쇄정책, 예방 전쟁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후 러시아 봉쇄정책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도처에서 전제의 억압에 맞선 혁명이 끊이지 않고, 각지에서 민족적 자각과 함께 통일과 독립(요구)이 연이은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통일과 발칸제국의 독립, 그리고 열강간의 경쟁과 견제의 각축으로 유럽은 하나의 거대한 소요에 휩싸인다. 독일은 프랑스를 봉쇄하려 했고, 프랑스는 반대로 독일을 봉쇄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에 접근하였으며, 다민족국가 오스트리아는 민족주의라는 심히 우려되는 질병으로 인한 내적균열이 천천히 진행되고 있었다. 여기에 영국은 결코 그 소요에 휩쓸리지 않으려 하였다. 유럽에 집중된 폭발적이고도 파괴적인 힘은, 식민지 건설과 청 오스만 투르크 두 아시아 제국의 후퇴로 인해 잠시나마 외부로 돌려질 수 있었다. 그 사이 러시아도 조용히 힘을 회복하고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발칸과 동아시아의 연해주로 남하한다.

그러나 차르가 통치하는 전제 러시아가 압도적으로 강력한 힘을 회복하고 봉쇄정책의 대상이 되는 일은 다시 없었다. 러시아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이라는 신흥 열강에게 패배하는 ‘굴욕’을 입었으며, 얼마 후에는 혁명이 발발하여 차르 전제정권은 붕괴된다. 혁명세력의 적군과 전제 러시아를 옹호하는 백군 사이의 내전과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벌어진 민족운동으로 거대한 내전이 러시아를 파괴한다. 그리고 유럽 각국의 개입과 북구와 발트해의 몇몇 민족이 독립으로, 인구와 영토의 축소를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의미는 정치적 역량의 축소였다. 사회주의 정체를 선포하고 그 전파를 자임함으로 모든 자유 혹은 전제주의 국가의 견제를 받게 된 것이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이 느낀 혁명에 대한 (이념적)공포가 재현되었던 것이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봉쇄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포인, 코작기병에 대한 (군사적)공포는 히틀러 독일이 후퇴하고 소비에트 러시아가 동유럽으로 밀려들면서 시작된다. 이념적 위험성을 수반한 소비에트의 가공할 군사력은 동유럽을 잠식하고 서유럽과 자유진영을 긴장시켰으며, 이제 미국을 주축으로 서유럽과 자유주의 세계가 단합하여 두 번째로 러시아 봉쇄에 나서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전쟁의 전개 내용은 크림 전쟁과 유사하다. 물론 조금 다른 부분도 있다. 크림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가 후퇴하고 적어도 십 수년간 재기의 시간을 갖어야 했던데 반하여, 소비에트 러시아는 한국 전쟁으로 조금도 축소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팽창에 맞선 봉쇄정책과 예방 전쟁이라는 성격에 있어 근본적 의미는 동일하다. 세계의 정치 주체가 혁명과 러시아의 팽창을 좌시하지 않을 것임과 한계를 부여함을 천명한 것이다.

냉전을 거쳐 소비에트가 붕괴하고 러시아의 체질도 압도적 제국에서 하나의 열강으로 변화하였다. 과거 유럽을 그 자체로 세계로 보았던 시대 러시아는 막대한 인구를 자랑했다. 그러나 오늘날 러시아의 인구는 그 영토를 지키기에도 부족해 보인다. 그리고 그마저도 인구감소가 계속될 실정이다. 그러면 이제 국제정치에서 봉쇄의 대상은 사라진 것일까.

과거 러시아의 역할은 중국으로 대체 되었다. 막대한 인구, 잠재적 공포의 대상은 중국으로 옮겨진다. 러시아는 이제 지나날 오스트리아제국과 같은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거대한 영토와 열강으로서의 정치-군사적 역량을 지니면서도 내적으로 다민족 국가의 취약성을 갖는다. 언젠가는 러시아도 다른 정치주체들과 더불어 중국을 봉쇄하는데 합류할 수 있다.

물론 과거와 현재를 동일시 하기에 곤란한 점이 몇 가지 있다. 봉쇄하기에 중국은 이미 너무도 커다란 경제적 삼투압으로 세계의 자본을 흡수하고 있다. 통일 이후 이탈리아가 프랑스를 겨냥한 3국 동맹에 가담하면서도 경제적으로 양국간 큰 마찰이 없었던 것과 같이 봉쇄를 정치에 한정하고 경제 교류는 별개의 문으로 열어둘 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이 과연 정치적 봉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는 순탄할 것에 대한 요구를 받아들이겠는가는 미지수이다. 다른 경제교류국가는 물론 중국 자신의 경제적 성장을 위해서도 정치와 경제를 별개의 문으로 다뤄야겠지만, 정치는 이성적 선택보다 국가의 위상과 민족적 자부심 등 감성적 요인과 대중의 요구에 좌우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므로, 각국의 이익에 근거한 합리적 정경(政經)분리가 이뤄진다 해도, 1887년 결국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의 무역협정이 폐기된 사례와 같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관계에서 경제분야의 협조는 일순간의 분쟁과 마찰로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에 있었던 합리적 정경분리와 그 단명에 대한 내용은, 김용구 <세계외교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2), p. 192 를 참조할 것.

또 한가지 고려대상은, 20세기 중반 핵이 등장한 이후로는 열강 간에 예방 전쟁도 곤란해 졌다는 사실이다. 중국과의 전쟁을 재래식군사력에만 의존해 수행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다면 예방 전쟁은 수행되기 어렵다. 만일 중국에 대한 예방 전쟁이 수행된다면 이란 가정 하에, 그렇다면 어디에서 어떤 이유로 어떻게 수행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그중 어디에서에 대한 예상으로는 당연하게도 미국과 중국이 서로 양보할 수 없을 정도로 첨예한 이해가 걸린 주변부를 들 수 있다. 어떤 이유로 어떻게 수행되었는가에 대해서는 과거 한국 전쟁과 같은 성격의 대리전이 되리라 예상한다. 대리전을 통해 열강 간의 파멸적 직접대결을 피하면서, 팽창과 봉쇄의 성패를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서 중국위협론과 같은 예측을 부정하는 반론도 있음을 밝혀둔다. 브레진스키는 중국에 대한 앞선 공포가 결국 불길한 예상을 현실로 만드는 자기충족적 예언이 될 뿐이라고 단언한다. 즉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중국에 대한 막연한 위기감으로 중국을 고립시키고 궁지로 몰아넣는다면, 여기에서 비롯된 불만이 중국을 현상타파적인 위협세력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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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법은 법이 아니다
박원순 지음 / 프레스21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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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명단이 발표되었다. 조금 머리가 커져서 부터 우리 민족의 미온적 과거청산에 분개해 왔던 나. 하지만 친일파 명단 발표 소식을 대하는 태도는 무덤덤하다. 반가운 일일 텐데도. 역지사지(易地思之), 일제강점기 한반도 지식인의 입장을 생각해 본 때문일까. 한번쯤 그 시대 지식인이 느꼈을 고충을 짐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 만일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했을까를 떠올리자 무서워졌다.

망국의 백성인 이들에겐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와 같은 극단적인 갈림길만이 놓여 있던 건 아니었을까. 일제를 따라 주류가 되거나 아니면 산속에 들어가 백이 숙제가 되든 혹은 빨치산이 되든 그도 아니면 망명을 하든 하는 비주류로의 극과 극의 선택. 이와 같은 선택의 딜레마에 일제강점기 한반도 지식인의 비운이 서려있다.

무너진 대한제국의 황제를 인격적으로 알며 그를 흠모한다거나, 자기 자신이나 가족이 나라로부터 깊은 은덕을 입은 사람이라면 어둡고 험난한 길이라도 마다할 리 없다. 하지만 이와 같은 특수한 애착의 고리로 묶인 사람은 드물 수 밖에 없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단순한 의리나 애국심만으로 전도유망한 장래를 모두 포기하고 비주류의 길을 택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재능이란 분출하기는 쉬워도 가슴에 묻기는 어렵다.

오늘날 참여연대 등의 시민사회단체, 비정부기구(NGO)에서 정열적으로 활동중인 박원순 변호사의 저서 ‘악법은 법이 아니다’에 프랑스의 나치부역자 처벌과 관련한 내용이 담겨있다. 프랑스사회가 부역자의 처벌에 단호했음은, 그렇지 못했던 한국 사회에겐 분명 부러운 이야기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프랑스 국민이 택한 방법이 반드시 옳고 정당한 것이었는가도 생각해 볼 문제이다.

프랑스가 관용이 넘치는 나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그런가. 프랑스 대혁명 이후로 이들은 격변의 순간 마다 희생양을 찾는데 혈안이 되었다. 몇 몇에 책임을 전가하고 그들을 처단하는 것으로 정말 프랑스의 정신과 자유가 수호 될 수 있는 걸까.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과 상처를 도려낸다며 그들은 양심에 또 하나의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만들지는 않았을까. 페탱을 수반으로 하는 비시 정부(Vichy 政府)가 나치독일과 강화를 맺으려 했을 때 국민의 다수가 이를 찬성했으면서도, 전쟁이 끝난 뒤로는 모든 책임을 페탱과 라발 그리고 몇몇 예술인과 그 밖의 희생양 들에 전가했다. 만 명 이상이 처형되었다. 역사적 심판, 단죄라는 이름 하에 재판도 없이 형이 집행되기도 했다.

과거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으며 덮어놓고 잊고 용서하는 것은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며 그래서도 안된다. 단죄는 분명히 하되, 처벌의 기준과 방법, 부역 정도에 따른 부역자 등급을 구별 정립한 뒤어야 할 것이다. 마녀사냥과도 같은 프랑스식의 해결은 피해야 한다. 더욱이 경중을 가리지 않고 모두 똑같은 죄인으로 획일화 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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