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사 - 세계각국사 시리즈
김학준 지음 / 미래엔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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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분단의 책임 국가가 미국이라는 답은 정확하다. 물론 미국 이외의 승전 강대국들에게도 부분적 책임이 있겠지만, 결국 원인제공이 미국의 오판과 실책으로부터 빚어졌기 때문이다. 원인제공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31년에 있었던 일본의 만주 침략은 미국으로 하여금 소련 승인을 심각히 고려하게 만들었다. 일본이 미국의 국가 이익을 위협하고 있다고 분석한 미국 정부는 소련과 손잡아 일본을 견제해야 하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3년에 소련과의 외교 관계를 수립을 결정하고 이것을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루스벨트와 처칠은 스탈린의 정치적 기민성 및 계산성에 많이 좌우되었다. 특히, 루스벨트는 관동군을 비롯한 일본의 전력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소련군의 극동 참전을 적극 권장하였고, 이것을 유도하기 위해 소련에게 불필요한 양보를 거듭하여 무엇보다 “극동 문제에 소련의 개입을 가져왔다.” 또, 루스벨트는 제 2차 세계 대전 중에 수립된 소련과 연합국 사이의 협조가 전후에도 계속되리라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전후의 국제 정치를 미국과 소련의 협력 위에서 주도해 나가는 길 밖에 없다고 내다보았기 때문에, 소련에게 불필요한 양보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1945년 2월 8일 얄타에서 열린 미-영-소의 삼거두 회담에서도 소련에 대한 양보는 계속되었다. 이 일련의 회담들에서 한반도의 장래도 논의되었다. 그들은 한반도를 ‘적당한 시기와 절차를 거쳐’ 독립시킨다는 데 합의한 것이다. / 김학준 저, 러시아사

 

얄타회담은 전승국들의 이권을 위주로 하여 세계정치의 지도를 바꿔놓았다. 한반도에 대해서는 20 ~ 30년간의 신탁통치가 거론된 바 있다. 당시의 스탈린의 생각을 루스벨트는 알지 못했다. 루스벨트는 소련을 대일전에 끌여들여 미군의 희생을 감소시키는 데만 열중했고 국제연합만 창설해 놓으면 세계평화는 유지될 것이라는 소박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얄타회담의 결과로 한반도 내부, 사할린에서 많은 한국인의 처참한 죽음과 고통이 강요되었고 얄타회담은 뒤에 와서는 루스벨트와 처칠의 스탈린에 대한 정치적 굴복으로 평가되고 있다. / 클레멘스 저, 얄타

 

이 외에도 여러 저명한 저작들에서 루스벨트가 스탈린에게 철저히 이용당하고 끌려 다녔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너무나 신사적이지 못한 스탈린을 너무 신사적으로 대했던 것이다.

미국이 러시아를 대일본전에 끌어들인 것은 한국 분단과 관련하여 진정 중대한 의미를 담고 있다. 위에 인용문에도 담겨 있듯 소련에게 극동 정치문제에 관여할 빌미를 제공하고 만 것이기 때문이다. 제 2차 세계 대전 말. 미국은 일본이 수세로 몰리던 시기에 왜 그렇게도 소련의 대일본전 참전에 집착한 것일까. 미군 병사들의 손실을 줄이기 위해, 또 미국과 소련이 함께 국제정치를 풀어 나가야만 하며 그것을 국제연합이 가능케 해 줄 것이라는 이상적인 환상 때문이었을까.

루스벨트의 오판과 그에 따른 스탈린에 대한 거듭된 양보가 결국 작게는 한반도의 분단을 낳았고, 크게는 냉전이라는 고통스럽고 긴장된 암흑기를 세계인에게 제공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패배나 다름없는 정치적 실패가 이토록 막대한 파급을 전세계에 미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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