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김산해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나는 길가메쉬의 영웅적인 활약, 수메르 신들의 이야기보다는 이 서사시의 배경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인류 최초의 신화'보다는 '인류 최초의 문명'과 그것을 이루어낸 사람들이 더욱 호기심을 자극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을 일으킨 수메르인들은 어떻게 살았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1852년 옛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느웨에서 발견된 점토 서판에는 길가메쉬 왕 뿐만 아니라 수메르인의 사회, 종교, 일상 생활 그리고 그들이 했던 생각이 담겨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예를 들어 코넌 도일의 추리소설에 19세기 후반~20세기 초의 영국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다른 문학 작품도 그렇게 읽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 길가메쉬 서사시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수메르인에 관한 그리 많지 않은 자료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길가메쉬 이야기 자체보다는 그 배경이 더 궁금했던 것이다.

 길가메쉬 서사시의 줄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아루루 여신이 찰흙으로 엔키두를 창조하고 엔릴신의 분노로 인한 대홍수가 인간세상을 휩쓸었을 때 우트나피쉬팀과 그의 부인이 살아남은 것 등 베레쉬트와 그리스 신화와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은 것이다. 즉, 베레쉬트에서 신이 흙으로 인간을 만들었고, 그리스 신화에서 데우칼리온 부부가 제우스신이 일으킨 대홍수 가운데서도 무사히 살아남아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는 내용이 서사시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된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접하고 있는 베레쉬트나 그리스 신화보다 수메르어로 기록된 길가메쉬 서사시가 훨씬 이전 작품이고, 앞의 두 작품은 그것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것이었다. 아마 길가메쉬 서사시에 등장하는 대홍수 이야기도 불규칙한 범람으로 큰 피해를 주었던 유프라테스강, 티그리스강 사이에 위치한 메소포타미아의 자연환경과 관련하여 생겨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수메르어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수메르 신화의 '아류'와 같은 신화들도 수메르가 몰락한 한참 후에야 등장했기 때문에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는 그 가치를 드러내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다. 하지만 히브리 신화와 그리스 신화에 영향을 미쳤던 최초의 신화로써 길가메쉬 서사시는 수메르 문명의 영향력은 물론 고대 근동에 기원을 둔 종교의 기본틀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길가메쉬 서사시는 그 자체로도 수메르 문명의 귀중한 유산이지만 고대인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는 뛰어난 문학작품이기도 하다. 시인 릴케는 길가메쉬 서사시를 '죽음의 공포에 대한 서사시(das Epos der Todesfurcht)'라고 했다. 한낱 만용만 부릴 줄 알았던 젊은 길가메쉬가 절친한 친구 엔키두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멀고 먼 방랑의 길을 떠나는 장면, 그 고단하고 힘든 여정을 통해 영생을 갈구했던 길가메쉬의 모습에서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이라 할 수 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생생히 드러나 있다. 길가메쉬가 방랑 중 만난 여인숙 주인 씨두리는 인간이란 어차피 죽을 운명이므로 삶을 즐겁게 보내라고 충고하지만 그의 욕망을 막을 수 없었고, 결국 우트나피쉬팀의 '생명의 식물'까지 잃어버림으로써 길가메쉬의 절망은 더욱더 깊어진다. 이렇듯 '죽음'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길가메쉬는 고독에 휩싸이지만 이는 성인이 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엔키신의 말처럼 죽음을 앞두고 슬퍼하거나 절망하거나 의기소침할 것도 그리고 분노로 얽힌 마음을 가질 필요도 없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도 있듯 앞으로 남은 일생을 '당연히 맞게될' 죽음을 걱정하는 것보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훨씬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이처럼 길가메쉬 서사시에는 한 영웅의 모험담일 뿐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있다.

 책을 읽으면서 어느덧 길가메쉬 서사시 자체에 빠져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최초의 신화' 그 자체로도 큰 가치를 갖고 있지만 최초라는 타이틀이 아니더라도 삶과 죽음에 관한 위대한 서사시이다. 죽음에 관한 등장 인물들의 대사는 구구절절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통찰이 절절히 배여있다. 사나이들의 우정, 영웅적인 행위, 영생에 대한 욕망 그리고 죽음. 인생의 빛은 결국 죽음의 그림자에 의해 밀려난다. 그러나 길가메쉬 서사시는 죽음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라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의연하고 당당하게 맞이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그렇기에 비록 수메르 문명이 오랜세월 잊혀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신화에 영향을 주어 후세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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