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 군대의 역사 : 2. 제정 이후의 로마 군대  ::

 로마군은 제국이 드넓은 지중해 세계를 정복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다른 분야에서도 로마인이 보여주었듯, 로마군은 그들의 효율성과 조직화 능력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다른 민족의 것도 좋은 것이라면 아낌없이 배우려 하는 로마인의 개방적인 자세는 로마군의 변천사에도 잘 드러나고 있다.

 

 로마군의 발전해나가는 과정을 하나하나 따라가보면 로마를 제국으로 만들 수 있었던 강점은 단지 강력한 로마군이 아닌, 그러한 군대를 만들어낸 그들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마리우스 시대의 군제 개혁:: (BC 1세기)

  이 시대에는 로마사에서도 중요한 군제 개혁이 이루어졌다. 흔히 마리우스가 이 개혁을 이루었다고 한다. 카밀루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개혁이 기존의 추세에 대한 단순한 추인(혹은 미봉책)에 불과했는지, 또는 마리우스 혼자만의 업적이었는지에 대해선 약간 논란이 있다. 그러나 당시의 로마가 절실히 필요로 했던 개혁임은 틀림없다.

 

 

 (←옆사진 - 가이우스 마리우스C. Marius)이때까지는 5개의 재산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최소한의 경제 능력이 있는 사람)을 군단에 징병했다. 이들을 아시두이assidui라고 한다. 제5계급에도 들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은 병역으로부터 면제되어 있었다. 이들을 '프롤레타리 및 머릿수(proletarii et capite censi)'라고 불렀다. '프롤레타리'란  '자식 생산자' 즉 무산계급을 뜻했다. '카피테 켄시' 즉 '머릿수'는 인구/국세조사(켄수스)가 있을 때, 정부가 이들 무산계급의 재산 평가액은 기록하지 않고, 단지 머릿수만 세었기 때문이었다.

 

 마리우스는 로마군을 징병제에서 지원제로 바꾸었다. 경제력이 없는 프롤레타리도 군단에 지원하면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 개혁은 도시의 가난한 빈민을 군대로 흡수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제 군대 복무는 시민의 의무가 아닌, 직업의 한 종류로 바뀌었다.

 마리우스는 로마 최초의 직업군대로 아쿠아이 섹스티아이(액상 프로방스)에서 게르만의 한 종족인 킴브리 인을 격파했다. 또 그는 필룸(투창)을 개량한 것으로 명성을 얻었는데, 기존의 철제 창촉을 나무 핀으로 대체한 것이었다. 나무 핀이 던져졌을 때, 부딪히는(또는 찌른) 충격으로  나무 핀이 부러져 적이 다시 쓰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 대해선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충격으로 긴 철제 창촉을 휘어지도록 창촉을 달구어 단련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군단의 지원제 전환과 더불어 이 시기에 있었던 중요한 개혁 중 하나는, 군단의 구조를 완전히 바꾼 것이었다. 마리우스는 벨리테스와 3개의 전열(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의 구분을 없앴다. 그 대신에 모든 군단병에게 똑같은 무기와 장비를 지급했다.

 또 이들은 이제 대대(코호르스)로 조직되었는데, 3개의 중대(마니풀루스)로 이루어진 부대였다. 대대의 기원은 확실치 않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도 대대를 주요한 전술 부대로 우선했던 바 있다.

 그러나 대대의 도입이 군단 지원제과 상당한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왜냐면 이전의 벨리테스와 3개 전열 시스템은 병사의 재산과 경험으로 구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군단병은 전열을 만들 때, 누구나 똑같이 대우받았다. 이러한 시스템은 전보다도 더욱 유연하고 강력한 전술을 가능케 했다.

 

 그의 개혁으로 인한 결과는 대개 성공적이었는데, 다만 한 가지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타났다. 이전의 땅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시민군은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군단에 복무해, 국가에 대해 충성했다. 그러나 직업 군인이 된 도시 빈민 출신 병사들은 국가에 대해 잃거나 얻을 것이 전혀 없었다. 때문에 조국에 충성과 책임감을 지녔던 이전 시민군과는 달리, 직업군인은 더 이상 국가에 충성하지 않았다. 대신에 더 많은 전리품을 줄 수 있는 자신의 지휘관에게 그들의 충성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또한 속주 총독이 군대를 모병하는 것도 가능해졌는데, 카이사르는 자신의 개인적인 야심을 위해 군단을 모집해서 전쟁을 일으켰다. 나중에 그의 병사들은 거리낌없이 카이사르를 따라 루비콘 강은 건넜다.

 

사회주의 사상의 '프롤레타리아'는 바로 여기서 나온 말이다

 

 

 

::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제정 초기 (AD 1세기) ::

 

 

 로마 공화정은 내전과 혼란을 겪고 난 뒤 무너지고,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가 새로이 제정을 세웠다. 아우구스투스는 제국의 정복이 한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여, 이제 정복이 아닌 제국의 방위를 위한 군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카이사르는 로마군을 더욱 효율적으로 발전시키고 훈련한 바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뒤를 이어 새로운 로마군단을 유지해야 했다.  (→옆사진 - 아우구스투스)

 

 아우구스투스가 쓴 '업적록res gestae'에서 그는 약 300,000여명의 병사들을 해산했다고 언급한다. 그는 경쟁자들을 물리칠 때마다 그들의 군대를 무작정 해산시키지 않고 우선 모두 받아들였다. 그러나 악티온 해전 뒤, 내전으로 크게 불어난 군단을 28개로 감축했다. 이것이 제국을 지키는 상비군stand army의 시작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상비군의 복무 기간을 20년으로 연장했다. 각 군단은 대개 라인, 도나우 강이나 시리아같은 국경지방에 배치되었다. 각 군단은 약 6000명으로 이루어졌으며, 필요하면 비상군이나 예비군을 비슷한 수로 동원할 수 있었다.

 

 

 황제와 로마 시(이탈리아)를 지키는 근위대praetorian과 일종의 경찰과 소방관 역할을 한 비길레스vigiles는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것이다. 또 속주에서 보조군auxilia을 모집하여 군단을 보조하도록 했는데, 보조군에 복무한 속주민에게는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다.

 

(↑사진 설명) 행군하는 로마 군단병 재현

 

 흔히 영화에서 나오는 로마군은 대개 이 시대의 로마군이다. 그러나 지중해 세계를 정복한 공화정 시대의 로마 군단과는 그 모습도 다르고, 뿐만 아니라 그 성격까지도 다르다. 공화정 시대의 로마군이 공격적이었다면, 제정 시대의 로마군은 방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국경선을 따라 항구적인 병영을 건설하고, 수백년 동안 주둔했다.

 

※타키투스는 A.D 23년에 25개 군단이 있었다고 썼다. 그러나 로마제국은 A.D 9년에 테우토부르크 숲에서 3개 군단을 잃은 적이 있다. 거기서 이후에 군단 증강이 없었다고 가정하여, 28개 군단으로 줄였다고 추측하는 것이다. (물론 논쟁의 여지가 남아있다)

 

 

 

 

:: 제정 중기 (AD 4세기까지)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트라야누스 시대까지, 로마군은 그 정점에 이르렀다.  전쟁터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로마군에겐 오랫동안 변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AD 250년대까지는 로마군단의 중무장 보병이 로마군의 주축을 이루었다. 그러나 필룸과 글라디우스는 옛 무기가 되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로마군은 새로운 시도에 적응했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국경에서 시작되었다. 하드리아누스 시대부터 국경선(라인, 도나우,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대규모 상설요새가 들어서 적을 막았다. 이러한 국경선을 리메스Limes라고 한다. 이 방어체제 덕분에 설사 야만인 군대가 국경을 넘는다고 해도, 방어망과 보조군을 돌파해야 했고, 그 다음으로는 로마군단과 상대해야 했다. 리메스는 오랫동안 제 기능을 다 했다.

  ↑리메스 : 오늘날 도이칠란트의 마인츠와 레겐스부르크 사이에 있던 국경선

(촘촘히 이어진 점들은 로마군 기지)

 

 3세기 이후에는 이 방어체제도 한계에 이르렀다. 낡은 군단은 와해되어 대대(코호르스)로 나누어져, 방어시설을 충원하기 위해 여러지역으로 파견되었다. 외적의 침입과 군인황제들의 끊임없는 내전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속에서 새로운 보병과 기병이 형성되었다.

 

 이 시대의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AD 212년에 있었던 황제 카라칼라의 칙령이었다. 이 칙령은 모든 속주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해서 기존의 로마 시민과 속주민의 차이를 없앴다. 군대로 보자면 로마 군단과 보조군의 차이가 사라지고 둘의 지위가 같아진 것이다.

  이 시대의 황제들은 속주민 뿐만 아니라 로마인이 아닌 게르만, 사르마티아, 아랍, 아르메니아, 무어, 페르시아 인들도 모병했다. 이들은 과거 보조군과 같은 관계로 복무했다. 3세기 내내 이들 이민족 군대는 커져갔지만, 결코 제국을 위협하는 태도를 가지지는 않았다.

 

 혼란스러운 3세기 이후의 군대 개혁은 주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한 것이다.

 그는 중앙 예비군을 통해 로마 방어체제의 큰 약점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래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제 로마군단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중앙 예비군인 코미타텐세스comitatenses를 창설했다. 국경에 주둔하는 군단병은 리미타네이limitanei로 불렸다.

 이 새로운 유동적인 부대는 전통적인 전체 규모의 옛 군단에서 약 1000명의 군단병으로 조직되었다.

 

 약 4세기까지 기병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중보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옛 군단 기병은 대개 게르만 인 기병보다 더 중무장했지만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에도 보병은 여전히 로마 군단의 주력으로 남아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근위대장직을 폐지하고, 대신 보병총감(마기스테르 페디툼magister peditum) 직책과 기병총감(마기스테르 에퀴툼magister equitum) 직책을 만들었다. 이것은 기병의 중요성이 높아졌음을 입증했다. 그러나 군단은 아직 제국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율리아누스 황제는 여전히 A.D 357년에 그의 군단으로 라인 강의 게르만인을 격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병의 중요성은 커져갔다.

 

 그 이유로는 두 가지가 있다. 많은 야만인들이 제국을 실제로 침공하기 보다는, 그저 말을 타고 제국을 약탈하고 돌아가는 편이었다. 그러한 기병 무리들을 로마 영토에서 쫓아내는 데에는 느린 보병보다는 기병이 더 적합했다.

 

 다른 이유는 적들에 대한 로마군단의 우위가 더이상 전과 같지 않았다는 점이다. 야만인들은 지난 세기에 적 로마군대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수많은 게르만인들이 용병으로 복무하고 로마에서의 전쟁 경험을 쌓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되자, 그들에 대항하여 로마 군대는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무장 보병을 보호할 수 있는 강한 기병을 준비했음을 알게 되었다.

 

 만약 로마군이 3세기와 4세기 동안 변천을 겪었다면 점차 기병의 수가 늘어났을 것이다. 그때의 점차적인 변화의 끝 단계 두려운 재해를 초래했다.

  A.D 378년 고트인 기병이 아드리아노플(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발렌스 황제의 동부군을 전멸시켰다. 전투에서 중기병은 중보병을 패퇴시킬수 있다는 점이 증명되었다.

 

 

출처 - 역사 속의 전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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