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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트라야누스 시대까지, 로마군은 그 정점에 이르렀다. 전쟁터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로마군에겐 오랫동안 변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AD 250년대까지는 로마군단의 중무장 보병이 로마군의 주축을 이루었다. 그러나 필룸과 글라디우스는 옛 무기가 되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로마군은 새로운 시도에 적응했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국경에서 시작되었다. 하드리아누스 시대부터 국경선(라인, 도나우,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대규모 상설요새가 들어서 적을 막았다. 이러한 국경선을 리메스Limes라고 한다. 이 방어체제 덕분에 설사 야만인 군대가 국경을 넘는다고 해도, 방어망과 보조군을 돌파해야 했고, 그 다음으로는 로마군단과 상대해야 했다. 리메스는 오랫동안 제 기능을 다 했다.

↑리메스 : 오늘날 도이칠란트의 마인츠와 레겐스부르크 사이에 있던 국경선
(촘촘히 이어진 점들은 로마군 기지)
3세기 이후에는 이 방어체제도 한계에 이르렀다. 낡은 군단은 와해되어 대대(코호르스)로 나누어져, 방어시설을 충원하기 위해 여러지역으로 파견되었다. 외적의 침입과 군인황제들의 끊임없는 내전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속에서 새로운 보병과 기병이 형성되었다.
이 시대의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AD 212년에 있었던 황제 카라칼라의 칙령이었다. 이 칙령은 모든 속주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해서 기존의 로마 시민과 속주민의 차이를 없앴다. 군대로 보자면 로마 군단과 보조군의 차이가 사라지고 둘의 지위가 같아진 것이다.
이 시대의 황제들은 속주민 뿐만 아니라 로마인이 아닌 게르만, 사르마티아, 아랍, 아르메니아, 무어, 페르시아 인들도 모병했다. 이들은 과거 보조군과 같은 관계로 복무했다. 3세기 내내 이들 이민족 군대는 커져갔지만, 결코 제국을 위협하는 태도를 가지지는 않았다.
혼란스러운 3세기 이후의 군대 개혁은 주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한 것이다.
그는 중앙 예비군을 통해 로마 방어체제의 큰 약점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래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제 로마군단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중앙 예비군인 코미타텐세스comitatenses를 창설했다. 국경에 주둔하는 군단병은 리미타네이limitanei로 불렸다.
이 새로운 유동적인 부대는 전통적인 전체 규모의 옛 군단에서 약 1000명의 군단병으로 조직되었다.
약 4세기까지 기병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중보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옛 군단 기병은 대개 게르만 인 기병보다 더 중무장했지만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에도 보병은 여전히 로마 군단의 주력으로 남아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근위대장직을 폐지하고, 대신 보병총감(마기스테르 페디툼magister peditum) 직책과 기병총감(마기스테르 에퀴툼magister equitum) 직책을 만들었다. 이것은 기병의 중요성이 높아졌음을 입증했다. 그러나 군단은 아직 제국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율리아누스 황제는 여전히 A.D 357년에 그의 군단으로 라인 강의 게르만인을 격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병의 중요성은 커져갔다.
그 이유로는 두 가지가 있다. 많은 야만인들이 제국을 실제로 침공하기 보다는, 그저 말을 타고 제국을 약탈하고 돌아가는 편이었다. 그러한 기병 무리들을 로마 영토에서 쫓아내는 데에는 느린 보병보다는 기병이 더 적합했다.
다른 이유는 적들에 대한 로마군단의 우위가 더이상 전과 같지 않았다는 점이다. 야만인들은 지난 세기에 적 로마군대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수많은 게르만인들이 용병으로 복무하고 로마에서의 전쟁 경험을 쌓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되자, 그들에 대항하여 로마 군대는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무장 보병을 보호할 수 있는 강한 기병을 준비했음을 알게 되었다.
만약 로마군이 3세기와 4세기 동안 변천을 겪었다면 점차 기병의 수가 늘어났을 것이다. 그때의 점차적인 변화의 끝 단계 두려운 재해를 초래했다.
A.D 378년 고트인 기병이 아드리아노플(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발렌스 황제의 동부군을 전멸시켰다. 전투에서 중기병은 중보병을 패퇴시킬수 있다는 점이 증명되었다.
출처 - 역사 속의 전쟁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