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이래 그리스 세계는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일단 그리스 세계 자체가 광범위하게 커졌고, 그리스 식민지가 세워진 지중해 서쪽으로부터 저 멀리 인도 북서부와 아프가니스탄에 이르기까지 그리스 문화가 널리 전파되었다. 이 지역 내에서는 당시 표준어라 할 수 있는 코이네 그리스어(아테네 지방의 방언)가 널리 통용되었으므로 어딜 가든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이처럼 헬레니즘 시대는 그리스 문화가 최초로 널리 보편화된 시대였다.

이러한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리스인들이 그들 역사에서 최초로 넓은 영토를 정복하여 대왕국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헬레니즘 시대의 3대 왕국이던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는 과거 어떤 그리스 국가들보다도 광범위한 영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특히 셀레우코스 왕조가 지배하던 시리아는 구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장악하여 서쪽으로는 소아시아에서 동쪽으로는 인도 북서부에 이르기까지 통치 영역을 넓혀 나갔다. 그리고 이집트와 마케도니아도 레반트(동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대립하며 영토를 늘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다면 그리스 본토에서 오랫동안 폐쇄성을 유지하던 기존의 도시국가(폴리스)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3대 강국, 즉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가 번성하던 시기에 폴리스들은 더이상 예전의 영광을 누릴 수 없었다. 헬레니즘 시대 초기 알렉산드로스의 휘하 장군들이었던 디아도코이(후계왕)들은 그리스에서 영향력을 늘리기 위해 끝없이 전쟁을 벌였고, 헬레니즘 시대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점차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마케도니아의 간섭에 놓이게 되었다.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아 전투 이래 그리스는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번번히 실패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 시기에 스파르타 왕 아기스 3세는 마케도니아에 대항했으나, 331년 메갈로폴리스 전투에서 마케도니아의 섭정 안티파트로스에게 패배하여 그 자신도 전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아테네도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한 뒤 데모스테네스나 크레모니데스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역시 실패하여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리스 도시들은 디아도코이들이 종종 자유를 돌려주겠노라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계속 간섭을 당했다.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본토를 장악하기 위해 중요한 전략적 거점에 수비대를 배치하였다. 바로 칼키스, 코린토스, 데메트리아스가 마케도니아군의 주둔지로 이 세 곳은 흔히 '그리스의 족쇄들'로 불렸다.

이렇게 그리스가 강대국에 의해 간섭받던 시기 그리스 본토의 도시들은 서로 연합하고, 자체적으로 강해지기 위해 각 도시의 독립적인 권리를 일부 양도하여 연방체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대왕국들이 개개의 도시들을 압박하고 있고, 또 배타적인 옛 폴리스의 불리한 점이 명백해지던 시대에서 이런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래도 중요한 연방국가들이 성립한 곳은 그리스에서도 주로 도시국가가 여태 튼튼하게 뿌리내리지 못했거나 전통적인 자주 독립 혹은 패권의 역사를 갖지 못했던 지역이었다. 헬레니즘 시대의 대표적인 연방 국가는 아이톨리아와 아카이아였다. 이 두 곳 모두 기원은 헬레니즘 시기 이전에 형성되었지만,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헬레니즘 시기에 들어와서부터이다. 이 연방들은 대개 방위동맹으로써 하나의 폴리스가 맹주가 되어 동맹을 이끈 델로스 동맹이나 펠로폰네소스 동맹과는 다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연방의 시민은 자기가 속해있는 도시의 시민권과 연방 시민권이라는 이중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연방에 속해있는 다른 도시국가로 이주해가면, 그곳에서도 완전한 시민권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연방 민회를 열었고, 연방 공통의 화폐를 주조하기도 하였다.

아이톨리아 연방은 군복무 연령에 달한 모든 남성이 모여 연간 봄과 가을 두 차례 소집하는 총회가 있었다. 매년 선출되는 주무 행정관인 사무총장이 있었으며, 총회의 회기 사이에 통치를 담당했던 평의회(boule 혹은 synedrion)가 있었다. 이 평의회는 인구 비례로 선출되는 도시 대표로 구성되는데, 의원수가 무려 수백명에 달했다. 일상 업무는 사무 총장이 주재하는 약 30명 남짓한 평의회의 소위원회(apokletoi)가 수행했지만, 중요한 대외 정책의 문제는 총회에서 결정하였다. 아이톨리아 연방은 279년 그리스를 침략한 갈리아인들로부터 델포이를 구원하여 명성을 얻게 되었고, 그 후 연방을 중부 그리스 너머까지 확장시켰다. 그리하여 아이톨리아 연방은 마케도니아 왕이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는 다소 중요한 세력이 되었으며 훗날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5세에 맞서 로마의 동맹국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의 세력확장을 용이하게 하여 그리스 세계에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의 역사에 한층 더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아카이아 연방이었다. 일찍부터 펠로폰네소스 방도의 북쪽 해안에 위치한 아카이아인들의 도시들은 모종의 유대를 맺어왔지만, 알렉산드로스와 그 후계자들의 시대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기원전 280년 뒤메, 파트라이, 트리타이아, 파리이같은 도시들이 모여 새로운 연방을 결성했고, 거기에 아이기온, 부라, 케뤼네이아, 레온티온, 아이기라, 팔레네가 가담했고, 후에는 올레노스도 포함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카이아 연방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은 아라토스라는 젊은 시퀴온인이었다. 기원전 251년 그는 시퀴온의 참주를 축출하고, 도리아계인 시퀴온을 아카이아 연방에 가입시켰으며, 연방의 지도자가 되어 기원전 243년에는 안티고노스 고나타스로부터  마케도니아의 주요 거점 중 하나인 코린토스를 빼앗는 데 성공했다. 기원전 243년과 228년 사이에 아라토스의 공세정책이 성공적으로 진행됨으로써 대부분의 이스모스 국가, 아르카디아, 아르고스가 연방 회원국이 되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용맹스런 왕 클레오메네스 3세는 아카이아 연방과의 전쟁에서 잇따라 승리를 거두었고, 거의 연방을 붕괴 직전으로 몰아갔다. 이런 사태에 처하게 되자 아라토스는 태도를 바꾸어 마케도니아 왕 안티고노스 3세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말았다.(기원전 225/4년) 그결과 기원전 224년 코린토스는 다시 마케도니아의 수중에 떨어졌다. 한편 안티고노스 3세는 마케도니아 군을 이끌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남하하여 기원전 222년 북부 라코시아의 셀라시아에서 스파르타 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 전투에서 스파르타군은 거의 전멸하고 클레오메네스 3세는 이집트로 도주하였다(그곳에서 3년 뒤 클레오메네스는 프톨레마이오스 4세에 대한 반란을 이끌다가 죽고 말았다)

아라토스는 상황에 떠밀려 취한 필사적인 조처였겠지만 주로 마케도니아에 대한 저항정책을 통해 세력이 성장한 아카이아 연방은 이로써 마케도니아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기원전 215년부터 205년까지 일어난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아카이아는 로마와 충돌했으나, 200년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발발하자 부득이 로마편으로 돌아섰다. 1차 마케도니아 전쟁 기간 중 아카이아와 스파르타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으나 아카이아의 지도자 필로포이멘의 활약으로 207년 만티네아 전투에서 스파르타를 격파하였고, 스파르타 왕 마카니다스는 필로포이멘에게 직접 죽임을 당했다. 아카이아 연방은 로마와의 동맹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역을 손에 넣을 정도로 팽창할 수 있었으나, 강제로 연방에 편입된 스파르타는 연방 내에서도 항상 이질적이었다. 결국 연방과 스파르타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고, 이것은 로마의 최후 통첩의 빌미가 되어 단기간의 파국적인 전쟁 끝에 연방은 해체되고 말았다. 146년 로마에 저항한 대가로 코린토스는 철저히 파괴되고 말았다.

 아카이아의 역사는 연방제의 이점과 아울러, 아카이아처럼 강력한 연방조차 마케도니아 왕국, 더욱이 로마와 대결하게 되었을 때 절감했던 한계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아르카디아의 메갈로폴리스에서 태어난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아카이아의 시민이자 정치가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따라서 그는 아카이아에 우호적이었고 스파르타에 적대적인 편견을 갖고 있었지만(그는 스파르타의 왕들을 참주라는 의미로 tyranos라고 격하시켜 부르고 있다), 연방의 장점에 대한 그의 설명은 어느 정도 아카이아의 지도자들이 가졌던 이상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 많은 사람들이 펠로폰네소스인들을 공동 이익을 위한 단일 정책으로 결속시키려고 노력해 왔다. 하지만 각자 보편적인 자유의 명분보다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 혈안이 되었던 까닭에 아무도 그것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그 목표는 매우 진전되고 성취되어, 펠로폰네소스인들은 하나의 동맹이자 우호적인 공동체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동일한 행정관, 같은 평의회 의원과 배심원들은 물론 동일한 법률, 도량형, 화폐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주민들이 울타리를 두른 단 하나의 대피소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만 빼면, 펠로폰네소스 거의 전체가 하나의 도시가 된 셈이다>

이 글은 약간의 과장이 있다. 각각의 도시는 연방법 외에 자체의 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원전 2세기 초, 대략 190년 경부터 연방 화폐가 발행되기 시작할 때까지 각각의 도시는 자체의 주화를 찍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카이아 연방은 기원전 225년 이후 한 명의 장군직, 10명의 연방 관리, 그 밖에 기병지휘관, 비서, 부지휘관과 해군 제독 등 다양한 관직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총회에는 모든 남성 시민들이 참석할 수 있었으며, 통상 업무를 다루기 위해 synodoi로 알려진 집회에서 연간 네 차례 모였다. 그 집회에는 30세 이상의 남성들로 구성되는 평의회와 행정관들도 출석했다. 2세기가 되면, 전쟁이나 동맹, 로마 원로원이 보낸 서찰의 수령같은 문제를 비상 총회에서 다루게 된다. 늘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비상총회는 대개 성년 남성 전체가 참석하되, 표결은 도시 별로 행해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비상총회는 로마가 실력자로 등장하면서 대외 정책이 점차 중요하게 되자 도입된 듯하며, 로마인의 존재가 그리스 국가들 내의 통치 원리와 관행을 변화시켰다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100년 남짓한 기간 동안 아카이아 연방은 그리스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폴리비오스는 그 성공 요인을 자문한 뒤, 이상주의적인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이 우연의 소치라고 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중략~~ 이 경우, 그 이유는 대충 다음과 같다. 아카이아인들 사이에서 더 나은 평등, 언론의 자유, 즉 요컨대 민주주의에 더 유리한 정치제도와 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많은 펠로폰네소스인들이 자발적으로 이 제도에 참여하려 하며, 설득과 논증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그들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적절한 시기에 강제로 가담했던 자들도 속히 태도를 바꾸어 타협하게 되었다. 처음의 회원들에게 아무런 특전도 주지 않고, 모든 신규 가입자들을 대등하게 대함으로써, 평등과 인도주의라는 두 개의 강력한 요인의 도움을 받아 동맹은 설정했던 목표에 신속히 도달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펠로폰네소스의 지금과 같은 번영의 출발점이자 원인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의 낙관적인 태도는 연방의 진정한 취약점을 무시하고 있다. 중요 결정이 모든 성년 남성이 참여하는 총회에서 내려졌던 만큼, 아카이아 연방은 정치적으로는 민주적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관직들은 몇몇 도시에 근거한 아주 소수의 가문에서 배출되고 있었던 것 같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아카이아 연방의 취약성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아카이아인들 사이에 소요가 있었다. 도시들은 반란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평민들은 토지 분배와 부채 말소를 바라고 있었다. 또한 도처에서 지도급 인사들은 아라토스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아라토스가 마케도니아인들을 펠로폰네소스에 끌어들인 데 대해 분격했다>

따라서 아카이아 내부의 도시 중에서도 폴리비오스가 주장하는 만큼 연방에 충성스러운 도시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이런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왕국들에 둘러싸인 상황 속에서도 아카이아와 아이톨리아 연방국가들은, 그리스인들이 여전히 새로운 정치적 도전에 새로운 해결책으로 대응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만약 로마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연방제는 여러 국면에서 좀더 발전적인 성과가 나타났을 지도 모른다. 연방제는 개개 도시 국가(폴리스)가 지닌 규모와 상대적인 취약성의 한계를 뛰어넘을 가능성을 제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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