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리처드 오버리 지음, 류한수 옮김 / 지식의풍경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이미지가 주로 영국과 미국 대 독일의 전쟁으로 각인되어 있는 우리나라에서 독일과 소련의 전쟁은 경시되는 경향이 있다. 즉, 2차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를 거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전투로 단연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또 독소전쟁에서 그토록 막강한 독일군이 패배한 원인을 과거 나폴레옹이 겪었던 것처럼 매서운 러시아의 추위로 돌리는 식의 차라리 신화에 가까운 잘못된 통념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인 양 통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인 리처드 오버리는 이 두가지 통념을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점은 크게 두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연합국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두번째는 전쟁 이후 소련은 어떤 모습을 갖게 되었는 가를 살펴보고 있다. 한동안 2차 세계대전에서 독소전의 평가가 왜곡된 것은 전후 냉전시대에 접어들면서 서구와 소련 사이의 철의 장막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측 역사가들은 소련의 전쟁수행 노력을 경시했고, 소련은 독소전의 진상을 담고 있는 자료들을 은폐했다. 그리하여 이 전쟁은 전후 냉전이라는 시대 상황 속에서 잊혀지고 뒤틀려졌다. 하지만 글라스노스트 이후 감춰졌던 많은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독소전에 대한 그동안의 평가는 잘못되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 책도 각종 통계자료를 비롯한 새로이 밝혀진 여러 자료들을 통해 전쟁의 진실에 좀더 다가가고자 하는 저자의 노력이 드러나 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소전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가는 이 책에 수록된 자료만 보아도 분명해진다. 만 4년의 독소전 기간동안 소련의 사망자 수는 어림잡아도 2700만 명으로 연합국 전체 사망자의 60%를 차지한다. 특히 스탈린그라드와 쿠르스크 전투 두 달동안 죽은 소련군 수가 대전 전 기간에 사망한 미영 연합군 수의 합과 맞먹는다. 독일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뤘다. 대전 중 독일군 사상자의 80%가 독소전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이 보여주는 통계자료이기도 하지만 독소전이야말로 2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좌우한 중요한 전쟁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흔히 전쟁의 전환점으로 알려진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동부전선의 전세가 이미 소련측으로 기울어진 후의 일이었다.

저자는 소련이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을 전쟁을 치르는 동안 소련 지도부가 경직된 체제를 좀 더 유연하게 바꾸었고, 또 소련 국민들이 비록 전쟁은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통해 체제의 성격이 바뀔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게 했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유연성이 종전과 함께 끝난 것은 소련은 물론 이후 소련의 영향 하에 들어간 동유럽 여러 국가들에게는 비극이었다. 사회는 다시 경직되었으며 스탈린 체제는 전쟁 전보다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전쟁기간 동안 큰 공을 세운 장군들과 지도자들이 스탈린의 잠재적인 위험이 될 수 있다는 이유때문에 내쳐지거나 죽음을 당했고, 소련인과 국내의 여러 소수민족은 억압에 시달려야 했다. 전후 소련인들의 희망은 여지없이 좌절된 것이다.

이 책은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 소련의 전쟁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그리고 멀리 시베리아에 이르기까지 전쟁으로 인한 사람들의 삶과 고통, 의지가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또한 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의 중요성을 분명히 함과 동시에 전후 소련의 비극에까지 관심의 폭을 넓힘으로써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적인 시각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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