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14 - 그리스도의 승리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4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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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권의 목차를 보면 이 책의 구성이 이전과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2부까지는 전편과 마찬가지로 황제들을 기준으로 나뉘어졌지만 3부는 일개 성직자가 이들을 제치고 이야기의 한 가운데에 나선 것이다. 바로 겉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가 그 주인공이다. 그가 주교로 있던 23년 동안 교회에 군림하며 어떻게 황제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그 결과 로마제국은 어떤 모습으로 변모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이번 권의 주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이 시기에 그의 영향력이 미치는 가운데 기독교의 세력이 제국 내에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기 4세기는 대세의 향방이 외줄타기를 하다가 마침내 한쪽으로 기울게 되는 전환점이 된 시기였다. 물론 이 책에서 소용돌이의 중심은 기독교회라 할 수 있지만 정치, 사회, 문화 다방면에서 변화를 겪고 있었으며 이 모든 것이 후기 로마제국의 성격을 규정지었다고 볼 수 있다. 변화의 원인을 간단히 말하자면 외적으론 게르만족의 대이동 그리고 내적으론 기독교의 세력 확대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게르만족의 이동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제정 이후 로마와 게르만족 사이에 접촉이 늘어나 한편으로는 전쟁을 다른 한편으로는 교역이 이루어졌다. 이 둘 사이의 관계에 변화가 있긴 했지만 중기까지는 어느 수위에서 균형을 이루었고 근본적인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위기의 3세기'를 거치면서 마침내 게르만족은 제국 깊숙히 침공하는데 성공했고, 로마가 이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황제의 전제군주화, 자영농의 농노화, 군대의 게르만화 그리고 제국의 분할 통치 등 제국 후기에 나타난 주요 변화들은 게르만족의 침입과 관련이 있었다. 계속해서 가해지는 게르만족의 압력에 제국이 마침내 손을 들기 시작한 것이 378년 아드리아노플 전투이다. 서고트족에게 대패하고 발렌스 황제마저 전사했을 정도로 큰타격을 입은 로마는 결국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고트족의 이주를 허용함으로써 쇠퇴에 가속도가 붙었다. 이제 로마는 게르만족을 몰아낼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테오도시우스는 기독교를 제국의 국교로 정한 황제다. 기독교도가 되면 황제조차도 교회의 간섭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암브로시우스는 유능한 자였기에 이 때에 이르러 기독교의 세력이 타종교보다 우위에 서게 된다. 밀라노 주교가 황제가 잘못을 저질렀다며 용서를 빌라고 요구하면서 테오도시우스를 교회 앞에 세워놓고 기다리게 했던 사건은 중세에 있었던 '카노사의 굴욕'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 책에는 시대의 흐름에 맞섰던 인물들도 있다. 바로 율리아누스 황제와 수도장관을 역임한 심마쿠스가 그들이다. 각각 '배교자'와 '이교 로마의 자랑스러운 마지막 불꽃'이라는 말을 들은 것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당시 시대상의 변화에 굴하지 않고 전통을 지키려 노력했다. 과거 '로마다움'을 상징하는 모든 것들이 흔들리는 와중에 사람이라고 변하지 말란 법은 없다. 하지만 이런 시기에조차도 불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 소신을 지킨 이들이 있어 역시 정체성이란 것은 그리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율리아누스는 14권에서 제일 매력적인 인물이다.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면서도 올바른 정신과 철학적 사고력, 자제심을 유지했고 막판에 큰 실수를 저지르긴 했지만 군사적 재능도 가진 문무를 겸비한 훌륭한 군주였다. 애초부터 기독교도가 아니었던 그에게 '배교자'라는 경멸스런 별명은 사실도 아닐 뿐더러 그의 업적까지도 무시해버린 잘못된 호칭이다.

이 책의 말미에는 자신의 신념을 지켰던 사람들의 마지막을 담담히 소개하고 있다. 397년 암브로시우스가 기독교의 기반을 단단히 다진 후 눈을 감았고, 그와 논쟁을 펼치며 역사에 이름을 남긴 심마쿠스 또한 5년 뒤 생을 마쳤다. 새로운 시대의 막이 올랐지만 활력보다는 애수가 더 느껴지는 결말이다. 이미 황혼기에 들어선 로마제국의 운명을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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