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보 로망, 누보 시네마 동문선 현대신서 143
클로드 뮈르시아 지음, 이창실 옮김 / 동문선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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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클로드 뮈르시아는 '프랑스 근현대 문학', '문학과 영화'의 관계를 살피는 전문가로서 현재 파리7대학에 재직하고 있다. 본서는 누보 로망과 누보 시네마에 대해 "비교연구적 관점에서 동일한 심미적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기반으로 결합시킨 첫 시도"(10쪽)라는 점에서 연구의 독창성이 있으며, 누보 로망에 대한 총론격의 분석서/이론서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중요한 입지를 가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영역의 예술이라 여기며 누보 로망과 누보 시네마에 대한 비교연구가 거의 이뤄지고 있지 않았던 상황에서 누보 시네마를 누보 로망의 문학적 탐구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파생된 '이행'으로 해석하는 점이 비교연구가 가능했던 중요 포인트라 여겨진다. 이는 단순히 누보 시네마의 작가로서 마르그리트 뒤라스, 알랭 로브그리예, 알랭 레네 등이 대표적이기 때문이 아니고, "존재의 불가능한 통일성, 불가능한 진리, 삶의 불가능한 파악"(151쪽)을 위해 문학의 글쓰기로는 불가능한 지점을 영화 언어를 통해 해결하려는 의지가 그들에게서 발견되었다고 보는 게 적절할 것이다. 이는 영화 매체가 지닌 예술적 잠재성의 중요한 부분을 다시 고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책에 따르면, 이러한 누보 로망과 누보 시네마는 새로운 세상과의 관계를 탐구했던 사회학자인 에드가 모랭의 이론적 작업(예컨대, <복잡성 사고 입문 Introduction à la pensée complexe>(에코리브르,2012[1990]))과도 관련성이 있다 볼 수 있을 것이다.

"단편화된 진술, 다양한 관점, 세상의 직접성 속에 침몰된 주관성이야말로 제어력을 상실케 함으로써 인간을 미혹에 빠뜨리는 표지들이다. 이질성과 불연속성에 기초한 누보 로망의 이야기들에서 사용되는 텍스트상의 전략들은, 일반적으로 세상을 그 당혹스런 복잡성 속에서 포착하도록 한다. 복잡한 사고는 현실의 신비를 고갈시키지 않고 그 불확실성과 모순들을 떠맡으면서 "오로지 앎을 풍부히 하고 인지의 무의식적인 모든 훼손에 맞서 싸우고자 한다."라고 에드가 모랭과 마우로 체루티는 밝힌다."(142쪽)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사회는 기존의 전통적인 의미의 근대사회를 지나 다른 차원의 근대사회로 변모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변화의 축적은 60~70년대 다양한 정치적 문화적 풍경으로 세계사에 기록되어 있다. 바로 그 변화를 예민하고 정확하게 인지하면서 출현한 누보 로망과 누보 시네마는 '현재의 역사'를 이해하려는 모든 이가 반드시 한번쯤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는 '필수통과지점'이 되었고, 본서는 바로 그러한 통과 지점에서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본서의 단점으로 지적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누보 로망과 누보 시네마라는 다른 영역을 비교 분석하면서 총론을 제시한다는 책의 목적에 비할 때 압축적인 서술과 변주이되 반복적인 내용, 다소 길지 않은 분량(150쪽 내외) 등을 들 수 있겠으나, 정확한 이해에 바탕한 훌륭한 번역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런 부분을 잊게 만들지도 모른다.


"텍스트는 세상이 생기는 장소가 된다"고 한 블랑쇼의 말은, 문학에서 모더니티가 이루어 놓은 대변혁을 강조하다. 이제 택스트는 텍스트에 앞서 존재하는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 자조적 세계, 그 자체로서 가치를 지니는 세계를 창조할 책임을 진다. 허구는 이제 자체만을 준거로 삼음으로써 지시 대상은 힘을 상실하고, 작품은 재현의 성격을 상실한다. 이렇게 해서 누보 로망과 누보 시네마에 의해 형식에 대한 상당한 작업이 이뤄지며, 문체에 큰 중요성이 부여된다. 또한 이렇게 해서 로브 그리예는 본질주의 문학의 ‘진지성‘에 ‘유희의 이데올로기‘를 대치시킨다. 이 이데올로기는 작가를 ‘세상으로부터의 피신처‘에 데려다 놓기는커녕 그 창의성에 의해 양자를 모두 변모시킨다. - P103

누보 로망 작가들은 지난 세기의 사실주의 미학 자체-그 미학을 산출한 사회와 완벽한 일치를 이루었던-를 비난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비난하는 것은 변화된 사회 및 지식에 걸맞지 않는 이데올로기 체계에 따른 소설 미학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글쓰기 형태가 그 애초의 활기와 힘, 격렬함을 잃었을 때, 또 그것이 천박한 처방이 되어 버렸을 때, 즉 추종자들이 그 필요성에 대한 질문조차 제기하지 않으면서 단지 일상의 습관이나 게으름으로 존중하는 아카데미즘이 되어 버렸을 때, 이제 죽은 형식들을 고발하는 현실이 되돌아온다. 그리고 바통을 이어받을 수 있는 새로운 형식들을 추구하게 된다." ‘예술은‘ 끊임없는 탐구이자 ‘꾸준한 문제삼기‘의 ‘삶이기‘ 때문이다. - P104

인과 관계의 연속성에 지배되는 선형의 이야기, 사건의 연대기적 나열, 이데올로기적 전제에 따른 사건의 보존과 위계 질서화, 이 모두를 몰아내고 누보 로망 작가들과 누보 시네마 영화인들은 자신들의 세계 이해와 부합하는 불연속적이고 단편적이며 파열된 이야기를 들려 주게 된다. - P108

그 구조와 이데올로기적 토대가 파괴된 이야기는 자체의 확신과 형식적 의미론적 통일성 및 종합적인 관점을 상실한다. 여러 모순된 담론의 유희로 상대화된 모든 진실은 무효화되고, 대신 활짝 열린 감각이 들어선다. 그렇다고 구조적 파편화가 구조의 부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누보 로망과 누보 시네마의 이야기들은 일반적으로 아주 튼튼한 구조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왜곡된 논리적 모델들과, 기꺼이 다른 표현 양식들로부터 취해진 비논리적 원칙들을 따르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 P119

고전적인 사고는 시간에 대한 체계적이고 위계질서화된 표상을 제시한다. 그러나 누보 로망 작가들과 누보 시네마 영화인들은 이처럼 합리적인 시간 개념-이야기의 연대기적 전개와 시간의 카테고리화(과거,현재,미래)를 포함하는-을 거부하였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들은 그와 맞서는 주관적 시간성을 받아들였다. 심리적 동기가 거의 동시에 받아들이는 인상들의 풍요로움과 부조화 및 그에 따르는 인식의 혼란을 존중하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보다 진정한 현실의 이름으로, 시계가 알려 주는 확고한 시간이 해체되고 당혹스러운 ‘사적인‘ 시간성이 구축된다. - P131

오직 신에게만 가능한 포괄적인 관점을 흉내냄으로써 세상에 대한 제어력을 확보하는 총체적 인식의 부재로 인해, 소설은 이제 일의적인 충만한 의미에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항상 시간과 공간에 위치한 개별적 의식과 연관되어 현실은 단편적이고 구멍이 숭숭 뚫린 이질적 못브으로, 손에 잡히지 않고 달아나는 모습으로만 드러날 따름이다. 세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인간으로서는 총체적 면모를 포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 P142

시공간적 좌표의 해체, 등장인물의 마멸, 인간적 속성의 부수화, 인과 관계의 논리에 지배당하는 서술 원칙의 폐기, 형식에 대한 탐구의 우선시 등에 의해 누보 로망의 이야기들은 독자에게 의미의 공백이라는 실망스런 느낌을 야기시킬 수도 있다. 전통적 이야기에는 독자가 기대하는 바들이 여기선 좌절되고 만다. 독자는 효율적인 서술이 가져다 주는 쾌락을 맛볼 수 없으며, 심리적 정치적 도덕적 형이상학적 차원의 ‘진실‘에 접근할 수도 없다. 텍스트가 궁극적인 의미의 제시를 거부하면서 그저 하나의 자생적인 물음으로 제시됨에 따라, 누보 로망은 필연적으로 실망을 야기한다. "예술의 기능은 결코 이미 알려진 하나의 진실-혹은 하나의 물음-을 예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여러 물음들(어쩌면 대답)을 세상에 던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더 이상 유혹하거나 안심시키거나 확신시키거나 증명코자 하지 않으며, 반대로 불안에 빠뜨림과 동시에 수많은 의미를 향해 작품이 개방되도록 한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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