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
김이듬 지음 / 열림원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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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제외하곤, 김이듬 시인의 이전 두 산문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난다 출판사의 '걸어본다' 시리즈는 개인적으로 애정하는 총서임에도, 파리라는 어찌보면 클리셰가 되어버린 도시에 대한 국내 작가의 글을 더 이상 읽기가 꺼려졌다. 슬로베니아란 도시는 내 관심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너무도 간단한 이유로 그의 글은 아직 저편에 머물러 있다.


시대는 달라졌고, 세상은 변한다. 전국에서 하나 둘 늘어가면서 그 기능과 역할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가운데, '동네책방' 혹은 '독립서점'은 김이듬이란 시인을 통해 '책방 이듬'으로 탄생하였고, 그는 파리의 한가운데서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셰익스피어앤컴퍼니' 같은 서점을 꿈꾸며 '책방 이듬'의 문을 열었다고 한다. 이 산문집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책방 이듬' 시즌1을 마치며" 그가 기록해나간, 시인이 아닌 '책방주인' 김이듬으로서의 일상 분투기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애초 그의 예상보다 훨씬 버거운 현실 속에서 그는 거짓 긍정이나 자기 위안 등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의 시가 그렇듯, 현실을 그다운 문체로 철저하게 우리의 인식 위에 아로새긴다. 그것은 예의 어떤 관조나 성숙을 가장하지 않는다. 그의 감각을 뚫고 지나가는 현실은 그대로 그의 언어를 통해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언어로, 하지만 아름답게 우리를 눈뜨게 한다. 그의 문체에서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연상되는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TV 대담에 나와서 글인지 말인지 분간할 수 없는 결을 지닌 표현을 하고, 그 표현은 다른 누구에게도 듣기 힘든 종류의 것임을 직감하게 하는.


그가 철저하게 기록한 실패의 목록들은 '전기적 환상'에 사로잡힌 글이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성공적인 삶에 대한 반테제이자 사람이 곧 글인 형식의 어떤 경지를 담담히 보여준다. 그는 말한다. 서점을 운영하면서 많이 바뀌었다고. 원형 탈모와 남모를 도움 같은 현실적 어려움의 증상을 겪으면서도, 결코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람을 만나게 되면서 어느새 사람을 좀더 향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이런 기록이 문학적이지 않다면 무엇이 문학적일 수 있을까.



일종의 자기 파괴일까? 시 창작을 등한시한 채 문학을 말하는 거, 낭독회와 북 토크, 인문학 특강 등을 여는 거, 동네 사람들과의 소소한 독서 모임을 이끄는 거. 심지어 책을 팔고 차를 팔다니. 어쩌면 문단에서 미끄러져 창작을 폐기하고 문학과 예술을 향유하는 경계의 가장자리에서 나를 작동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다. 하지만 나는 후회나 자기 연민의 시기를 통과했어. 고귀하고 관능적이며 황홀한 문체도 잊어버렸어. 무력감의 잉여적인 느낌이 든다. - P125

한 인간은 우주 같아서, 서로 부딪힐 때 그 내면에 팡팡 터질 준비를 하는 위선과 오만, 광기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안다. - P266

책방이 성장 혹은 발전하는 것까지는 바랄 수 없다. 모쪼록 꾸준히 지속될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처럼 위태롭지 않게, 기왕이면 신나게, 다른 사람들도 따라 하고 싶어질 만큼. - P270

누군가를 만나 자신이 예전과 다른 사람이 되는 것. 한 편의 시를 읽고 예전과 다른 사람을 꿈꾸는 것. 마치 드라이아이스가 하얀 연기로 변하는 것처럼 물리적 변화를 경험하는 것. 그것이 가능할까? 나는 그 변화의 가능성을 믿는다. - P278

시인은 말한다. 오늘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아름다운 언어, 감동적인 말, 자유로운 소통이 불가능했던 어린 시절의 탓으로 돌리기엔 무참하다. 아직 나는 시인이 아니다. - P295

노점상에게도 일용직 노동자에게도 독서할 여유가 주어지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과속하고 추월해서 우리를 사고로 몰아가는 세상이 아니기를 바란다. 버스를 운전하다가 신호에 걸렸을 때, 떠오르는 시 구절 하나를 메모하는 패터슨이 나오려면 일한 만큼 최소한의 휴식과 임금은 보장되어야 한다. - P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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