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선교의 혁명
K. P. 요하난 지음, 임승환 옮김 / 예영커뮤니케이션 / 200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K. P. 요하난은 인도 사람이다. 그는 불교의 발상지이지만 지금은 힌두교가 국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에서 태어났다. 6형제 중 어머니의 기도로 유일하게 주님의 일을 하게 된 사람이라고 한다. <세계 선교의 혁명>은 그가 만든 아시아복음선교회(Gospel for Asia)의 선교 보고서이자 그의 제2/3 세계 중심의 선교사관이 응축되어 있는 책이다. 지금까지의 선교사(宣敎史)가 기독교 선진국 중심의 선교사관(宣敎史觀)이었음을 볼 때 그의 관점은 혁명임이 분명하다.

   선교의 어려움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더욱이 인도와 같은 기독교 소수 지역에서의 그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 요하난은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인도에서 또 해외에서 하나님만 의지하여 정진(精進)해서 많은 영적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자국(自國)인 인도의 사역에서보다도 초청을 받고 미국을 방문해서 보고 느낀 것에서 선교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제기하고 있다.

   그는 먼저 물량주의 선교사관을 비판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은 물질적 풍요와 개인주의로 집약할 수 있다. 미국 사회가 대표적인 나라이다. 그들의 경제적 풍요에서 오는 낭비는 주님 앞에 죄 짓는 일임을 그는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함의 축복을 그는 빈곤한 나라 국민과 나누라고 주문하고 있다. 아시아의 미전도 종족들을 위해 미국의 성도들이 깨어 기도하고 물질로 도우라고 호소하고 있다.

   두 번째로 그가 지적하는 것이 교회의 세속화이다. 세상 풍조를 따르는 교회의 흐름이 복음을 상실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신앙의 본질이 훼손되고 있는 세계 기독교의 현실을 그는 마음 아프게 걱정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예가 사회복음의 문제이다. 그는 사회복음이 종교적인 옷을 입고 기독교 단체 내에서 사역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영적인 전쟁을 육적인 무기로 싸우는 우를 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지적한다(122쪽). 사회복음에 대해 그가 이런 경계의 의견을 내어놓는다 해서 약자에 대한 그의 마음이 닫혀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는 많은 성경 말씀에 기초해서(레 19:18 ; 사 1:17 ; 58:10-11 등) 궁핍한 자들을 향한 긍휼과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위한 사회 정의를 매우 중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134쪽).

   요하난의 시각은 냉정하다. 지금 우리에게는 부흥이나 개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임하는 기독교적 혁명이 필요할 때라고 말한다. “참된 복음의 길로 되돌아가자!”는 구호로 대변되는 혁명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그들을 지옥불로부터 구해 내는 일에 최우선을 둘 때 열매를 거둘 수 있게 된다(153쪽).

   요하난은 전통적 선교, 즉 백인 선교사들이 피선교지에 파견되어 주님의 일을 하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단언한다. 선교는 그 나라의 현지인에게 맡기라는 것이다. 아시아 아프리카의 많은 현지인 선교사들이 그 역할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시대가 왔고 또 그렇게 훈련 받고 있는 사실의 중요성에 그는 주목한다. 그렇다고 미국 등 선진국들의 할 일은 없는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 즉 재정적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176쪽). 사역은 현지인들에게 맡기되 아무 조건 없이 물질적 필요를 채워줄 수 있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것이 미국 등 선진국이 할 역할이라는 것이다.

   K. P. 요하난의 문제 제기는 미국을 위시한 신앙 선진국에 던지는 목소리이긴 하지만 우리라고 그의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왜냐하면 세계 선교 대국(미국에 이어 2위)으로서 신앙 선진국의 선교 양태와 신앙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문제 제기가 되는 것이다. 자국(自國) 중심의 선교사관, 물질적 풍요 속에 세속화로 치닫고 있는 교계 분위기, 개인주의에 매몰되어 신앙공동체적 사랑이 사라지고 있는  점 등이 바로 1세기 전 신앙 선진국의 풍토를 그대로 이식해 놓은 듯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오늘 우리에게 주는 경고가 담겨 있는 것이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자세를 새롭게 가다듬게 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 주는 의미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나바행전
이강천 지음 / 푸른초장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나는 중요한 책을 읽을 때는 겉표지를 싸서 보는 습성이 있다. 주로 이론서들이 이에 해당되는데, 이 책들은 되풀이해서 읽어야 하기 때문에 책을 보호하는 마음에서 그런 것 같다. 이론서는 아니라 할지라도 정말 소중한 책들은 꼭 싸서 읽곤 한다. 책 내용의 소중함 이상으로 책도 소중하게 여겨져 혹 그 책에 작은 상처라도 가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에서이다.

이강천 목사의 <바나바 행전>은 후자에 속하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의 제목을 왜 하필 <바나바 행전>으로 정했을까가 처음 좀 궁금했다. "행전(行傳)"은 신약 사도행전의 바울과 베드로의 사역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복음을 전하면서 당하는 고통의 이야기에 붙이는 이름이다. 또 몇 년 전 아는 집사님을 비롯해서 몇 명의 평신도가 쓴 <일곱 집사 전도행전>이란 책도 그들이 전도하면서 겪은 애환들을 정리해 놓은 글이었다.

이 ‘행전’들에서의 공통점은 어렵고 힘든 고통 속에서 복음을 전하면서도 그들은 주님의  동행을 믿고 기쁨으로 그것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이강천 목사의 신앙 간증기인 이 글에 ‘행전’이란 이름을 붙인 것도 기발한 아니 아주 적절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바나바는 왜인가? 이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그가 전력(全力)하고 있는 목회자 재교육 훈련센타인 ‘바나바 훈련원’에서 따온 것일 것이다. <바나바 행전>, 고전미와 신앙적 안목 그리고 현대에 어필하고자 하는 책의 이름이지만 이름에 값하기는 그 내용을 읽어야 제대로 알 수 있다.

그는 이 글이 어떤 장르에 속할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이건 분명 수필의 범주에 속하는 글이다. 어떤 영역이건 개인의 인생 역정을 가감 없이 붓 가는 대로 써내려 간 글을 수필이라고 한다. 여기서 ‘가감 없이’와 ‘붓 가는 대로’에 강조점이 두어져야 할 터인데, 이강천 목사의 글은 여기에서 단연 앞자리에 위치해 있다. 왜냐하면 인생의 솔직성에다 신앙의 진실성까지 합쳐져 있어 ‘가감이 없기’ 때문이고, 문단까지 무시하고 문장 중심으로 글을 이끌어 갔기 때문에 ‘붓 가는 대로’의 자유를 맘껏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것은 젊은이들을 겨냥한 배려가 아닌가 싶다.

이 글은 어떻게 보면 보잘것없는 한 목회자의 수기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우리는 이 시대에 고고하게 서 있는 한 영성의 대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강천 목사는 건강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체력이 약한 사람이고 또 어렵지만 녹록치 않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며 지적 수준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 목회자이다. 하지만 그는 아주 겸손한 사람이다.

우리는 가끔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권력을 가진 자가 그렇고 재력가를 만날 때도 또 대중이 선망하는 연예인들을 만날 때 우리의 부족함으로 인해 조금은 위축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자들이 이강천 목사 앞에서는 한 없이 약해짐을 느낀다고 한다. 왜인가? 그의 고고한 영성 이외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영성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힘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책에서 특별히 관심 있게 읽은 부분이 있다. 그가 하나님과 영적 대화를 나누는 부분이 그것이다. 또 중요한 사역 뒤의 감동을 운문으로 덧붙인 시들이 그것이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과 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영성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며 또 고비 고비마다 놓치지 않고 감동과 은혜를 시로 표현한다는 것은 이미 시인이 되어 있어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단숨에 읽었다. 문학 작품까지 정독을 하는 나로서 하루 저녁에 책을 독파한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십여 쪽을 읽고 있더니 눈 깜짝할 사이 백 몇 십 쪽을 일고 있었으며 또 잠시 후 보니 이백 쪽의 뒷부분을 읽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용을 간파하지 않는 건성의 독서는 절대 아니었다. 언뜻 성령이 함께 하시나? 라고 생각할 정도로.... 모르긴 해도 이강천 목사의 대쪽같은 신앙심에다 문학적 재미까지 그리고 인간의 진솔성이 나도 모르게 이 책에 녹아들게 한 것 같다.

이강천 목사도 책에서 이야기했듯이 ‘인생은 60부터’이다. 나는 이 책이 이강천 목사의 완결된 신앙 간증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나바 행전>은 아무 에필로그 없이 붓을 놓은 아쉬움이 없지 않다. 아마 그는 지금까지 해 온 사역보다 앞으로의 사역이 더 소중하게 주님의 일에 쓰임 받을 것이다. 이렇게 붓을 뚝 떨어뜨린 것은 그의 남은 사역을 기대해도 좋다는 선언 같이 받아들어져 도리어 후속 편을 고대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같아 좋다. 마치 재미있는 연속극이 더 많은 시청자를 모으기 위해 클라이막스에서 막을 내리듯이 말이다.

나는 요즘 책 선물을 더디 하게 된다. 바쁘다는 핑계로 많은 책을 섭렵하지 못하는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권할 만한 좋은 책이 많지 않다는 것이 더 큰 이유인 것 같다. 자신 있게 선물할 책을 발견했다는 것, 이것은 나에게 또 하나의 기쁨이 아닐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라딘 사은품] 2008 알라딘 머그컵
알라딘 이벤트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선물, 책과 무관한 공책 수준. 큰 기대에 받은 더 큰 실망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알라딘 사은품] 2008 알라딘 머그컵
알라딘 이벤트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선물, 책과 큰 관계가 없는 공책 수준, 큰 기대 더 큰 실망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길선주 - 부흥의 새벽을 열다
길진경 지음 / 두란노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한국 초대교회사를 공부하다 보면 안타까울 때가 있다. 그 사람의 시대적 역할에 비해 연구가 너무 미진한 경우가 그렇다. 영계(靈溪) 길선주(吉善宙)도 그러한 사람 중 한 분이다.

우리나라 최초 목사 중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평양 대부흥운동의 주역으로서 그는 한국 교회사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목회 초창기 때는 사회운동에도 관심이 많아 독립협회 평양지회 조직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나아가 1919년 3.1운동 때는 민족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의 목회 나아가 민족운동에 대한 공과는 따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지만, 그는 20세기 초반 우리 나라의 역사에서 간과되어서는 안 될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연구는 아주 미진한 상태이다. 본격적인 연구 단행본이 없고 논문도 그 수를 손 꼽을 정도이다. 1970년대 그의 저작이 부분 정리된 적이 있지만 그가 쓴 글 뿐만이 아니라 그에 대해 쓴 글들도 한 자리에 모아 길선주를 역사적 인물로 자리매김하는 데 도움을 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1980년에 영계의 아들인 길진경이 <영계 길선주>라는 책을 낸 적이 있다. 가장 지근 거리에서 본 아버지에 대해 쓴 글이라는 강점이 있긴 하지만, 전기(傳記)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료 가치는 다소 떨어진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워낙 자료가 빈약한 관계로 길선주를 연구할 때 많이 인용된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이 절판되어 쉽게 접할 수 있는 길이 없던 터에 이번에 [두란노]에서 <길선주>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판된 것은 다소 늦은 감은 없지 않지만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길선주 나아가 한국 초대교회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자신의 신앙을 바로 세우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나온 책은 순전히 교양 도서로 제작되었다. 한자 말을 거의 한글로 바꾸었고, 문맥도 젊은이들에게 친근하도록 부드럽게 다듬었다. 중간 중간 넣은 사진은 읽는 이들에게 눈의 피로를 덜어주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 그런 탓으로 길선주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에들에게는 다소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겠다. 내용 파악을 위해 한자 말이 필요한 경우에 일일이 찾아 대조해야 하는 것 등이 그렇다.

이번 책의 재출간을 계기로 길선주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어 그가 역사에 끼친 공과가 잘 정리되기를 바란다.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지만 완벽을 향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가가 그를 평가하는 잣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길선주도 이러한 점에서 재평가를 필요로 한다. 그에 대한 연구가 다각적으로 진행되어 단편이 아닌  총체적 평가를 내릴 때 그가 후대인들에게 객관적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교양 도서로 널리 읽힐 뿐만 아니라 길선주 연구의 지평을 넓히는 데 이바지하기를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