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어떻게 있느냐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스럽다. (6.44)
회의주의는, 만일 그것이 물음이 있을 수 없는 곳에서 의심하고자 한다면, 반박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명백히 무의미한 것이다.
왜냐하면 의심이란 오직 물음이 존립하는 곳에서만 존립할 수 있고, 물음이란 대답이 존립할 수있는 곳에서만 존립할 수 있으며, 또 이 대답이란 어떤 것이 말해질 수 있는 곳에서만 존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6.51)
비록 모든 가능한 과학적 물음들이 대답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삶의 문제들이 여전히 조금도 건드려지지 않은 채로 있다고 느낀다. 물론 그렇다면 과연 아무 물음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대답이다. (6.52)
삶의 문제의 해결은 이 문제의 소멸에서 발견된다.
(이것이, 오랫동안의 회의 끝에 삶의 뜻을 분명하게 어디에 있는지 말할 수 없었던 이유가 아닐까?) (6.521)
실로 언표 불가능한 것이 있다. 이것은 스스로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6.522)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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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남 혹은 인연

    공복자 우리들의 만남은 가지가지입니다 학교로 인한 만남 종교로 인한 만남 부모 자식과의 혈육의 만남 필요에 의한 계모임 동호인의 만남 사이버로 인한 만남 그저 스쳐 지나가는 만남 혹은 인연은 간직하고픈 이에게 의미를 두고 싶어 합니다 잠시 스쳐가는 인연 또한 소중하기에 불교에서는 억겁을 운운하지 않나? 첫 만남은 전율이 날 수도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만남은 물론 사람과의 만남도 있지만 신과의 만남 학문과의 만남도 있을 것입니다 어디 사람만이 전율이 일까? 새로운 세계의 경이로운 것 여타(餘他)를 물문(不問)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습관적으로 변할 때 권태로움을 느낍니다 만남은 끝없는 배려와 사랑이라지만 자신과의 신념과도 같지 않을까요? 매사에 잘 식어 버리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생길 때 바르르 떠는 전율이 있었다면 왜? 쉽게 망각할까요? 망각이란 신이 준 또 다른 은총이라지만 쉽게 잊어만 가고 새로운 것을 탐닉하는 것에 발맞추어 자동차의 신형 디자인이나 우리가 흔하게 쓰는 휴대폰이 그 예겠지만 사람은 아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우리의 만남이 덕(德)이 되는 사람 손실을 가져 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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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의미들을 조금씩 잃어버리지만 사랑하는 마음만은 잃지 않아야 한다.
사랑 속에 살면서 그 사랑을 무심코 잊고 살아가기도 하는데, 사랑해야 할 시간이 따로 있는 것처럼 늘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 아닌가?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은 사람을 희망하게 할 것이고,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은 그 삶이 사랑의 모습으로 닮아갈 것이다.
<황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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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당신이 있습니다. 내 부족함을 채워주는 사람 - 당신의 사랑이 쓰러지는 나를 일으킵니다. 내게 용기, 위로, 소망을 주는 당신. 내가 나를 버려도 나를 포기하지 않는 당신. 내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는지, 나는 정말 당신과 함께할 자격이 없는데, 내 옆에 당신을 두신 신에게 감사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내 삶의 커다란 힘입니다.


장영희의 <생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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