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어떻게 있느냐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스럽다. (6.44)
회의주의는, 만일 그것이 물음이 있을 수 없는 곳에서 의심하고자 한다면, 반박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명백히 무의미한 것이다.
왜냐하면 의심이란 오직 물음이 존립하는 곳에서만 존립할 수 있고, 물음이란 대답이 존립할 수있는 곳에서만 존립할 수 있으며, 또 이 대답이란 어떤 것이 말해질 수 있는 곳에서만 존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6.51)
비록 모든 가능한 과학적 물음들이 대답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삶의 문제들이 여전히 조금도 건드려지지 않은 채로 있다고 느낀다. 물론 그렇다면 과연 아무 물음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대답이다. (6.52)
삶의 문제의 해결은 이 문제의 소멸에서 발견된다.
(이것이, 오랫동안의 회의 끝에 삶의 뜻을 분명하게 어디에 있는지 말할 수 없었던 이유가 아닐까?) (6.521)
실로 언표 불가능한 것이 있다. 이것은 스스로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6.522)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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