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거리의 찻집을 나서다가 문득 어디론가로 떠나고 싶을 때 '아직 살아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보면 슬픈 일이다. 겨울에는 그런 충동이 부쩍 잦아진다. 이유는 알 수가 없으나 조금 더 젊었을 때는 겨울이 눈과 크리스마스로 만들어진 판화처럼 느껴지곤 했다. 지금은 잃어버린 지도의 흐리멍텅한 꿈 같기만 하다.
거리로 눈이 내리면 내 가려는 그곳의 창가에 램프를 밝혀주오
그 불빛 속에서 눈발은 더 많이 퍼부을 것이고
나는 그 겨울의 창가에 당도하여 안심하리라
회색빛의 엷은 구름이 생각 속에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겨울이 왔는 모양이다. 겨울이 왔다는 그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사랑해야만 할 것이다. 겨울은 너무나 길고 춥기 때문이다. 다시 하나의 나이를 더 추가하고 한 번도 보지 못한 봄이 올 때 더 이상 도망 다니지 않기 위해 사랑해야 한다.
겨울에는 몇 번이고 기다리는 희망으로 눈이 내린다.
서로에게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하지만 아직도 나를 그리워하고 있는 누구에게도, 내가 그리워하고 있는 어떤 사람들에게도 눈은 분명한 이유로 내린다.
낙엽 탓인지 불빛 탓인지 알 수는 없으나 쓸데없이 거리를 나돌아다니다 보니 가을이 끝나버린 것 같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떨어져 어디론가 흘러가버린 낙엽이나, 빈 방의 재깍거리는 시계 초침 소리를 들으며 눈을 껌벅거리는 것이 전부였던 시간들 탓은 아니다.
한 번의 가을이 지나갈 때마다 내가 간직했던 연애 편지나 수첩 속의 전화번호 따위들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것들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람들은 저마다 떠나고 누군가는 아직도 나를 그리워하고 있다.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열심히 도망 다니다 그 끝에 도달하고 보니 겨울인 것이다. 그리고 나이를 한 살 더 먹을 뿐 아무 것도 아니었다.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는 텅 빈 기분이다. 그렇다고 차디찬 바람이 모서리 휘돌아 코트를 찌르는 겨울의 거리에 오래 서성거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런 의미가 없어도 무더웠던 지난 여름에 살아남은 것처럼 이 겨울도 나는 무사히 지나가야만 할 것 같다.

<황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