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장인지 한 번도 세어본 적이 없지만 어림잡아 천 장 정도의 레코드 판을 가지고 있다. 이십 대를 거치면서 나는 절망할 때마다 그만큼의 레코드 판을 샀다. 레코드 판의 숫자는 내 절망의 크기와 정확할 정도로 같다. 천 번이나 천 장 정도의 절망, 결국 그것이 나를 시인으로 살아가게 만든 까닭이 된 셈이다.
지난 겨울에 일제 중고 턴테이블을 구하게 되어 다시 LP 판에 손이 자주 가기 시작했다. 레코드 판에 바늘을 올려놓고 스탠드 불빛 속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그때나 마찬가지로 마음이 참 편해진다.
가끔 누렇게 빛이 바랜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들춰보기도 하는데 너무 오래되어서 책장을 넘길 때마다 텁텁한 종이 냄새가 난다. 시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했던 책이다.
그 첫 장을 열어보면, 1902년 늦가을이었습니다. 저는 비엔나 근교에 있는 육군사관학교 정원의 고목이 다 된 밤나무 밑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하고 시작된다. 그는 릴케의 시집을 읽고 있었다. 100년이라는 세월이 어느 순간에 오고 가는 듯하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내게 남아 있는 것들로부터 내가 위안을 받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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