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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나의 자서전 - 김혜진 소설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4
김혜진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3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의 제목으로만 보았을 때는 불과 관련된 내용인가 싶었지만 다 읽고 나서야 왜 제목 제일 앞에 작가가 ‘불’이란 단어를 사용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만큼 경계를 허물어버리고 싶은 소설 속 ‘나’의 의지가 강함을 알려 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소설을 읽는 내내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대구에서 자란 나 역시 소설 속에서만큼은 아니지만 ‘동구’와 ‘수성구’의 경계를 경험하며 자랐다. 집은 수성구에 있긴 했지만 동구와 경계에 있다시피 했다. 겨우 수성구라고 부를 수 있는, 수성구의 영역 끝에 있었다.
엄마는 나를 수성구에 있는 고등학교에 보내야 괜찮은 대학교에 갈 수 있을 것이라 여겨서 내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수성구에 있는 고등학교에 보내기 위한 준비를 해나갔다. 집에서 꽤 먼 곳에 있는 수성구 중심가에 있는 학원에 보냈다. 엄마는 수성구에 있는 고등학교에 가려면 수성구에 있는 학원이 더 잘 가르칠 것이고, 미리 수성구에 있는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과 어울려두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중학교 2학년 때 우리 집은 동구에 있는 아파트를 분양 받아서 수성구에서 동구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엄마는 학교에 주소를 써낼 때 예전 집 주소(수성구로 시작하는)로 쓰라고 내게 신신당부를 했다.
그 덕에 나는 수성구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을 할 수 있었고, 고등학교 2학년이나 되어서야 실제 살고 있는 주소(동구로 시작하는)를 썼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도 엄마는 안심이 안 되었던 모양이다. 고2가 되고 난 뒤에야 주민등록상의 주소지를 실제 살고 있는 동구로 옮겨주었다. 그제서야 나도 그동안 학교에 거짓말하는 꺼림칙한 기분을 떨쳐낼 수 있었다. 대구의 강남이라고 불리는 수성구에 있는 학교를 다니고 수성구에 있는 학원을 다녔다. 그 당시 나와 비슷한 아니 똑같은 아이들이 우리 집 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사설 승합차를 이용하여 수성구에 있는 학교까지 통학하거나 버스를 2번씩이나 갈아타고 학교에 다녔다. 소설 속에서처럼 ‘남토’니 ‘남민’이라고 불려지거나 놀림거리가 되진 않았지만, 대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암묵적인 모두의 목표는 같은 것이었다. 어떻게든 ‘수성구’학군에 소속되어 ‘수성구’의 인프라를 누리며 소위 좋은 대학에 가고 그들의 ‘리그’에 끼일 수 있다는 것.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조금은 달라졌을까?!
올해 초 15년간 살았던 부산을 떠나서 부모님이 계신 대구로 이사를 가려고 집을 알아보았던 적이 있다. 네이버 지도를 통해서 대구시 이곳 저곳을 살펴 보았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근처, 동대구역이 가까우면서 대구 중심가로 접근성이 좋은 곳 등등 직접 발품을 팔 수 없는 상황이라 더 지도를 열심히 보았다. 그러면서 여러 커뮤니티 게시판 등에서 사람들이 어떤 동네나 어떤 아파트에 대해 평판을 올린 것들도 같이 읽어 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처음 알았던 사실들도 많아서 적잖이 놀랐다. 흔히들 이야기 하는 ‘초품아’라고 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라는 말은 워낙 많이 들어서 이제 새롭지도 않았는데 ‘수동구’라는 단어가 있어서 놀랐다.
즉, 대구의 강남인 ‘수성구’와 수성구와 인접한 ‘동구’를 합친 말이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수성구이고 그 반대편은 동구인 것이었다. 동구에 새로운 아파트가 곧 분양예정인데 행정구역으로는 동구이지만 길 하나만 건너면 수성구이기 때문에 집값도 수성구보다는 싸면서 수성구의 편리한 인프라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인 것이었다. 내가 대구에 살고 있을 때만 하더라도 들어보지 못한 단어였다.
‘수동구’라고 불릴 수 있는 지역에 있는 아파트는 수성구에 있는 아파트보다는 싸지만 같은 동구에 있는 다른 아파트보다는 훨씬 비싼 값에 나와 있었다. 아, 나의 학창시절 때보다 수성구를 향한 사람들의 욕망은 더 심해졌구나. 달라지지 않았구나.
소설 속에서 주인공 ‘나’의 유년시절과 ‘수아’를 통해 한 번 더 겪는 중앙동과 남일동의 경계, 구분 짓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이런 상황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적극적인 ‘주해’의 모습을 보고 통쾌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방인으로 들어와 어떻게든 그곳에서 정착하며 살아가기 위해 변화를 시도하고 노력하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이면서도 안쓰러웠다. 과연 얼마나 바뀔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수아’의 초등학교 입학과 함께 더 이 악물고 맞서 싸우다 재개발로 한껏 희망에 부풀었다 정점에 다다랐을 때 ‘주해’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사건이 생겨버리자 ‘주해’는 그만 모든 걸 포기하고 도피를 선택한다. 이 부분에서 나 또한 너무 아쉬웠고 사람들은 정말 쉽게 변하지 않구나. 쉽게 도움도 주지 않구나 싶었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 주인공이 불을 지를 때는 그만 다 타버려라. 아주 활활 다 타버려서 동네가 아주 그냥 사라져버려라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 그 동네가 없어지는 거니까 더 이상 경계를 구분짓지 않아도 되겠지. 싶었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래도 주인공은 재개발이 이루어지는 시작점을 보고 소설이 끝난다. 몇 십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던 동네가 변화를 추구하던 ‘주해’가 떠난 뒤에야 허물어지는 모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결국에는 개인 하나만의 노력으로는 경계를 허물 수 없고 변화를 일으키기 힘들다는 것을 표현한 것일까?!
경계를 만들고 선을 긋고 구분하는 것은 사람이며 그것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것 또한 사람이다. 누가 함부로 선을 그어버리고 규정해버리는 것일까?! 지리적인 경계를 토대로 사람을 미리 평가하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라 생각한다. 저 사람은 어느 지역 출신이니까 이럴 거야. 아, 어느 지역 출신이라서 무조건 안 돼. 가 아니라 그 사람 하나만을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마음이 따뜻하고 긍정적인 사람이구나, 혹은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어려운 사람을 잘 돕는 사람.이 더 눈에 띄고 높이 평가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내가 이렇게 경험했고 내가 이렇게 자랐으니까 내 아이들만큼은 이렇게 되지 않아야 한다 하는 마음으로 조금씩 바뀌어나가면 좋겠다. 무조건적인 다들 같은 목표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다양성을 인정하고 개성을 인정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이를 좋은 학교에 진학시키고 싶어하는 부모의 마음이야 다 같겠지만 그로 인해서 지역을 구분짓고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본인도 상처를 받거나 힘든 일이 계속 되는 것이 세대를 넘어서까지 이어지지 말았으면 좋겠다.
소위 ‘SKY’라 불리는 대학교에 가지 못하더라도 아이의 취미와 개성을 잘 살려서 그것을 살려주는 학교에 진학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취업도 어느 정도 보장이 된다면 이만큼 혹은 그만큼 우리는 어느 지역에 살고 있는가에 집착하지 않아도 될지 모르겠다. 또 우리 나라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일자리가 고루 분포되어 있고 누릴 수 있는 환경이 비슷하다면, 그럴 수 있다면 집에 대한 고민은 지금보다 훨씬 더 줄어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