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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성석제는 후기에서 돌로 쌓는 성벽으로 언감생심 자신을 비유한다.
어디쯤에선가 그가 진짜로 성벽을 쌓는 중이라면, 도시락을 싸들고 가서라도 말려야 한다. 대략 웃다가, 대략 농담 나누다가 어느덧 부실시공의 나락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충분하므로. 이 책을 읽기 직전에 읽었던 산문집이 <즐겁게 춤을 추다가>였다.
맞다. 즐겁게 춤을 추다가 갑자기 와락 달려들거나, 얼음장이 되거나 뭐 그런게 세태 아닌가.
즐겁게 성을 쌓다가 성석제는 이런 말을 할 지도 모른다.
이 성이 아닌가 보네..
커버에는 분명 소설이라고 쓰여 있는데, 대체 228쪽의 한뼘 키를 지닌 책에 어떻게 소설 32편을 우겨 넣는단 말인가.
아무래도 좋다. 소설이든 소설 아니든.
소설과 수필 사이에서 길을 잃은게 틀림 없긴 하지만, 그냥 모른척 읽기로 한다.
얼토당토 않은 책이므로 뒤쪽 작가의 말 부터 읽기로 했다.
내 인생은 순간이라는 돌로 쌓은 성벽이다. 어느 돌은 매끈하고 어느 돌은 편편하다. 굴러내린 돌, 금이 간 돈, 자갈이 되고 만 돌도 있다. 아래쪽의 넓적하고 큰 돌은 오래된 것들이고 그것들이 없었다면 위쪽의 벽돌들 모양이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중략)
순간이여, 알아서 쌓여라. 누구든 나를 대신하여 쌓아다오. (중략)
나는 안다. 내 성벽의 무수한 돌 중에 몇 개는 황홀하게 빛나는 것임을. 또 안다. 모든 순간이 번쩍거릴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겠다. 인생의 황홀한 어느 순간은 인생을 여는 열쇠구멍 같은 것이지만 인생 그 자체는 아님을.
아마도 성석제는 글을 잘 쓰기 훨씬 전에 말을 잘 했을 것이다.
당신이 굳이 성석제를 몰라도 좋다. 길을 걷다가 혹은 어딘가 무심코 앉았다가 누군가가 갑자기 말을 걸어 올 때가 꼭 있다. 당신이 궁금해 하지 않아도 그 '누군가는' 이런저런 말을 흘린다. 그 말은 딱히 소용되지도 않고 딱히 감명 깊지도 않다. 그저 두런두런, 수런수런 건네지는 말. 사람 좋은 얼굴에서 내비치는 안도감. 어느 틈인가 당신의 말이 '누군가'의 말과 얽혀들어 흠칫 놀란다.
성석제는 이 책을 그렇게 썼다.
묘한 것은, 그의 말이 눈부시게 신선한 법이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맞닥뜨린 상황은 주의력이 좀 없어서 그렇지 우리가 드물지 않게 만나게 되는 상황이다. 그 이야기를 성석제는 능청스럽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처럼 풀어낸다.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웃겨서. 아니 대개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 또 당했다. 그의 초기 소설집이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였다. 그가 선점한 황당함의 영토는 대체 어디까지란 말인가)
내가 성석제 보다 더 웃길 수 있다고 강변하고 싶지만,
그 이전에 성석제 같은 친구가 있다면 마음의 무채색이 얼마쯤 옅어질 거 같다.
(솔직해 지자) 아니, 그냥 쫓아 다니면서 밥 먹여 가면서 웃긴 얘기 하나만 해 달라고 조를 거 같다.
질식 권하는 사회에서 숨을 쉬고 싶다면, 이 오십대의 중후한 '남자 세헤라자데'를 불러야 한다. 천일야화든 만일야화든 당신의 수중에 들어 온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