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깎기의 정석 - 장인의 혼이 담긴 연필 깎기의 이론과 실제
데이비드 리스 지음, 정은주 옮김 / 프로파간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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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연필을 손에 쥔 적이 있던가?

쉽지 않은 질문일 것이다. 연필을 쥐기에 우린 너무 앞서 나갔으니, 이제 그 손에는 스마트폰이나 마우스가 쥐어져 있을 뿐이리니.

 

최초로 연필의 장문인이 된 사람은 문자 그대로 <연필>을 썼던 건축공학자 헨리 페트로프스키였다. 페트로프스키? 그래, 공학자인지 작가인지 도무지 구별이 안되던 그 분. 그가 연필의 전생애를 뒤집고 펼치고 분석하는 방법을 취했다면, 데이비드 리스는 한 자루의 연필이 함축하는 본성과 형질, 그리고 그 심리상태(연필이 살아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리스의 말을 따라 듣다 보면 흡사 그런 것 같다)를 들여다 본다. 그에게 연필은 인생을 목도하는 하나의 눈이며, 연필을 깎는 행위야 말로 시각으로 인식되는 세상으로 출정하는 예배와 같은 것이리라.

 

저자가 지나치게 과장된 몸짓을 한다고 여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 그게 첫 눈에 대면하는 이 책의 솔직한 민낯이다. 

과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게 만들거나 끝내 혀를 차게 만든다. 이거 왜 이래 이 양반이.. 이를테면 이런 대목을 만났을 때 말이다.

 

"향나무 연필을 전동 연필깎이의 목구멍 속으로 집어넣는 것은 공기인형과 성교를 나누는 것에 비할 만큼 치욕스러운 일이라고 하면 과장일까?" (p.132) 13장 전동 연필깎이 사용법에 나오는 각주의 설명 부분이다. 그런데 이 장이 진짜 '전동 연필깎이를 잘 쓰는 법'을 말하리라 짐작한다면 어이없는 오산이다. 그렇게 순탄하려면 이 책을 뭐하러 썼겠는가?


애초에 그의 준비물은 나무 망치와 보안경이었다. 이제 챙 넓은 모자까지 잘 차려입은 한 사내가 마을 순찰에 나선다. 친절한 사진들은 정색을 한 그가 거침없이 창문을 통해 난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전동 연필깎이를 단죄하기 위해서, 아니 그 집을 불길한 물건으로 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정교한 과정을 거쳐 6단계 작업 착수. 이제 보안경을 쓴 그는 있는 힘껏 망치로 그 미물과 작별을 고하리라. 친절한 마지막 부연도 값지다. "만일 나가는 모습을 동네 아이들 한테 들켰을 경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선물로 연필을 깎아주겠다고 회유하면 된다." 

 

때로 짐짓 위악적인 체취를 풍기는 이 책의 즐거움은 작심하고 펼쳐놓는 다 큰 어른의 진지함이다. 한 자루의 연필은 어느덧 그 쓰임새 조차 위협받는 유년의 분신 혹은 유물 같은 것으로 남았으나, 저자에게 연필은 이미 글자를 생산하는 도구가 아니라 자기 바깥의 세계와 교감하는 사색이고 성찰이다. 그걸 농담으로 받아들이거나 쇼로 치부한다면 저자에게 모욕이리니, 애초에 이 책을 내려놓는 편이 낫겠다. 연필을 깎기 전, 준비운동으로 몸을 푸는(몇가지 단계가 사진으로 설명된다) 경건함을 이해 못한다면 당신에게 연필은 한낱 흑연을 품에 안은 100원 짜리 필기도구일 따름이다. 

 

추천사를 쓴 어느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이 저자가 연필 한 자루를 깎아주고 받는 '장인 정신의 사례비'는 35달러다. 

아니, 연필도 몽땅 땔감에 보태서 방을 덥히거나 지우개 수프라도 끓여 먹어야 할 판에. (위의 작가의 표현이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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