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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 문학동네 시인선 57
윤희상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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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을 보니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시집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는 것을.
좋다.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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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問 라이브러리 2
도정일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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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위기, 위기의 한국: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생각(혹은 비판)할 준비되셨습니까?

  나는 이 책을 2008년 9월 8일 발행 초판으로 서점에 직접 찾아가 6800원 정가를 주고 샀다. 그리고 한 원고를 다 읽었을 쯤 우연한 계기로 사인을 받은 뒤 다시 읽지 못한 채 책꽂이 구석에 꽂아두었다. 그렇게, 이 책에 사인 받은 지 벌써 횟수로 2년이 지났다. 읽는다고 마음 갖은 지도 횟수로 2년이 지났다. 하지만 읽으려고 할 때마다 급한 일이 생겼고, 무엇보다 제목의 압박이 책과의 거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을 터.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성숙해지고, 지천명(地天命)의 나이가 되지 않았어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넓어지고 깊어지는 법이다.(물론 지천명의 나이가 넘어도 세상을 편협하게 보는 게 요즘 시대의 인간이다) 나는 문(問)라이브러리에 맞는 질문할 시선을 어느 정도 갖추게 됐고, 이제야 이 책을 완독해 이렇게 글을 쓴다.

 아아, 다른 독자들은 걱정하지 마시라. 생각했던 것보다 재미있고 쉬운 책이니 일찍 읽으면 읽을수록 좋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1.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개그콘서트의 박성광은 관객과 시청자 앞에서 외친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그렇다. 세상은 1등만을 기억한다. 왜냐고? 한국은 1등에게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기 때문이다. 우리는 1등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며 환호한다. 그리고 한편으론 생각한다. “와, 1등은 인기도 얻고 돈도 얻는구나”라고. 2등 외 나머지는? 당연히 찬밥이다. 우리는 이 개그대사에 폭소한다. 그것은 마음 한편에서 나타나는 씁쓸함을 감출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한 집단의 1위가 아닌 이상 평범한 우리를 기억해주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1등을 부러워하고 동경한다. 아니, 우리라는 말보다 한국이라는 말이 어울리겠다. 한국은 “1등=부자=권력자”라는 등식을 당연시하고 계층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욕망하도록 한다. 그리고 시장전체주의 마천루에 올라섰을 때 인간에게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줄 듯 유혹한다. 하지만 이것이 옳은 사회의 모습일까? 작가 도정일 선생에 의하면 답은 "NO"다. 
 

  한국은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다. 끝없는 자본 경쟁 속에서 사회는 성장하고 성숙해진다. 그리고 그 사회는 인간에게 짭짤한 자본을 선물한다. 자본주의에 대해서 조금 언급하고 넘어가자면, 자본주의는 애덤 스미스가 처음 주장할 때만 해도 하나의 국가 안에서만 경제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실행했다. 하지만 가축하는 양이 많아지면 울타리는 좁아지고 풀은 모자라듯, 국가는 성장할수록 자본의 순환이 한정되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국가를 넘은 수요로 나아가고 조금 더 값싼 공급을 위해 제국주의를 택했다. 그들은 문명이라는 이름하에 식민지를 통치하여 자원을 수탈하고 수요를 늘리면서 그들은 성장했다. 하지만 제국주의는 지구라는 울타리 때문에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은 항복, 반성, 변화 등의 방식으로 다음 시대로 넘어갔다.(탈식민화) 그렇게 해서 지금의 21세기가 왔다. 그런데 시대는 변했지만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어두운 면은 ‘문화’와 ‘세계화’라는 또 다른 이름의 가면을 쓰고 한국에 들어왔다. 그들은 돈 안 되는 전통이란 것을 밟고 올라 돈 되는 세계문화를 전파하고 있다. 도정일 선생의 언급한 그대로, 우리나라는 돈 되는 축제만이 남길지도 모른다.

  다시 언급하지만, 이 책에 쓴 글은 21세기가 도래하기 마지막 날들에 작성한 기록물이다. 그리고 이 글들이 지금에 와서는 단순한 책이 아닌 예언서에 가까운 내용을 가졌다. 도정일 선생은 누구보다 한국의 문제점에 대해 냉철하게 파악하고 질문을 던졌던 사람이다. 자본만 쫒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비판하고 국가, 문화, 교육, 인문학까지 아울러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시장전체주의와 문명’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장전체주의가 팽배해진 한국의 인간은 자본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든다. 자본으로서 가치 없는 것이라면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자본을 무시할 만큼 한국사회는 관대하지 않는다. 책 안에 말 그대로, 자본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이 책은 자본만을 쫒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말자고 충고한다. 자본에 집착할수록 욕망은 커지고, 커진 욕망은 행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그가 말한 세상의 진리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혹시 지금하고 있는 일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선택이 아니라 어수선한 사회에서 안정적이고 돈을 많이 주는 일을 택한 것은 아닌가.


  2. 직업도 권력이다: “니 아버지 뭐하시노!?” =니 아버지 돈 잘버시노!? 

  영화 <친구>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의 볼을 잡고 때리기 전에 말하던 대사다. 그 장면에서 장동건이 “저희 아버지는 국회의원(혹은 검사, 군인, 경찰, 의사 등의 화이트칼라)입니다”라고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당연히 선생님은 그에게 가정교육․환경을 들먹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조용히 볼을 놓고, 나중엔 어깨를 털어주며, “그러게 왜 그랬어, 다음부터 조심해”라고 끝났을지도 모른다.(특정 직업에 대해 욕하고자 쓴 의도는 아닙니다) 그렇게 직업을 통한 권력에 모두가 기죽고 동경한다.

  이와 관련해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덧붙이겠다. 그저께 할머니의 제사에 다녀왔다. 큰집에는 친인척이 모여 북적거렸다. 그런데 제사를 마치고 식사를 할 때쯤, 셋째 큰아버지가 나에게 말을 건넨다. “요즘 무슨 일하냐?” 나는 특별히 어떤 대답을 드리지 못했다. 나는 지금 하는 일이 없다. 그저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공부하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큰아버지의 말이 이어진다. “얼른 정신 차려라. 돈도 안 되는 짓 하지 말고.”(참고로 셋째 큰아버지의 아들은 소위 명문대 중에 명문대를 진학하였으며 지금은 휴학하고 공익생활을 하는 말랐지만 근육도 있는 멋진 동생다. 공익 중에서도 쉬운 일로 배치 됐을 때 친인척에게 어찌나 자랑하시던지.) 물론 큰아버지는 나에게 진심어린 충고를 한 것이다. 앞으로 나는 돈을 사용할 일이 많을 것이고, 앞날을 위해서 준비해두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까. 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대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지금 특별한 직업을 갖고 있지 않지만 어떤 사람에게 해를 준적도 없고, 공부는 잘하지만 길에서 만난 친척한테 인사 안하는 사촌동생처럼 행동한 적도 없다.  

 

  자본의 우선시 되는 논리는 열심히 일한 아르바이트생보다 빚을 지면서 카지노에서 잭팟을 터트린 실업자를 칭찬하는 것과 같다. “돈 잘 벌면 됐지”라는 말처럼 무서운 게 또 있을까. 잘못된 행동이라 해도 자본이 많으면 장땡인 사회라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후자의 상황을 노력이 없다며 비판한다.(정작 자신이 로또가 됐다면 큰 소리 내는 것이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번듯한 직업을 가지고 카지노의 잭팟을 터트렸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어떠한 비판도 하지 못한다. 그저 “있는 놈이 더 한다”는 식의 푸념만 내뱉을 뿐. 화려한 직업은 자본을 갖는 것을 인정하고 비판을 방어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한 감각이 마비되어 모든 것을 당연시 여기는 노예로 전락하고자한다. 결국 우리는 직업이라는 권력에 얽매이고 자본이라는 욕망에 얽매여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로봇과 다를 것이 없어진다. 나아가 자본을 등에 업은 권력은 부패하기 쉽다. 매일 뉴스에서 비리 공직자가 적발되고 대기업 회장이 비리에 연루되는 모습을 보면, 한국이 이 문제에 대해 얼마나 신경 쓰지 않고 무시하고  있었는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한다. 썩을 대로 썩은 고름은 짜내야 하는 게 세상의 이치다. 이제 우리의 사회는 직업으로 하나의 권력을 만들려는 행동에 대해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지금의 우리는 어떤 일을 하시는가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일을 하시는가에 집중해야한다.

 

  3. 합격의 신으로 변장한 시장의 신: 국가는 기업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회가 이렇게까지 자본의 노예로 전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그 이유에 ‘국가’라는 커다란 체제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군부정치가 끝을 맺으면 민주정치의 밝은 햇볕이 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들어온 빛은 인공적으로 생성되는 전짓불이었다. “세계화”, “변해야 산다”라는 식의 외침은 ‘시장화’를 가속화시키는 현상을 초래했다. 예전보다 더 많은 것을 욕망했고 나라의 기둥들이 흔들리며 경제는 갈수록 심각해졌다. 최근에는 ‘국가경쟁력’을 외치며 희망을 심어주지만 작가가 언급한대로 이 용어는 현재 상황과 맞지 않는다. 경쟁은 어떠한 사람을 밀어내고 더 높은 위치에 서는 양육강식의 논리다. 물론 기업이야 무능력한 사원을 해고하고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국가는 국민을 해고하거나 버리지 못한다. 모두를 안고 (그들이 그토록 외치는)세계시장에 도전해야만 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외치는 경제는 ‘국가=기업’이라는 CEO 사고에 맞는 것으로 한 나라의 대표로서 자처해야할 것은 아니라는 게 작가의 말이다. 진정으로 국가경쟁력을 외칠 것이라면, 국가기관을 시장원리에 따르지 않으면서 지금의 사회가 부익부 빈익빈으로 치닫는 상황에 대처하는, 더불어 경쟁만이 살길이라는 식의 강요를 해서도 안 된다.

  시장전체주의는 교육문제에서도 문제를 들어낸다. 최근에 방영한 <공부의 신>이라는 드라마에서 변호사역은 맡은 김수로는 이렇게 외친다. “일류 대학 보내면 학교도 살고 애들도 잘되는 것 아닙니까?” 이 말에 지금의 사회가 고스란히 베여있다고 해도 다름없을 것이다. 대학교 진학이 좋을수록 우수한 학교로 채택되고 사람들이 몰린다. 우리 학교가 대학 입시의 올바른 길 인양 현수막을 붙이고 홍보한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이 올바른 학생을 만드는 길이기까지 할까? 그것은 생각해볼 문제이다. 요즘의 사회에서 바라볼 때 학교는 학원가기 전에 쉬는 곳, 혹은 일류 대학을 위한 통로. 대학교는 일류 취업을 위한 통로 그 이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인성과 성실성을 길러야할 학교에서 오직 돈과 점수라는 수치 가능한 계산에 얽매인다는 것은 큰 문제이다. 교육기관은 어떤 것에도 얽매여선 안 된다. 작가가 걱정하는 만큼, 기초학문은 돈이 안 되므로 없앤다는 것은 기초 없이 응용부터 하겠다는 무책임한 발상과 같다. 게다가 이 문제에 대해 묵과하고 있는 교수진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그들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진정으로 자신의 학문을 사랑하는가. 인문학의 종말은 비판의 종말의 다른 말이다. 이젠 지금까지 그랬듯 계몽시켜주겠다고 말하는 위선을 단순히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비판하며 진보해야한다는 생각하는 것이 이 시대의 위기를 헤쳐 나가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라는 거대한 체제에서부터 사람이라는 작은 개인까지 같이 출발해야만 가능하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일본의 유명 지식인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문학의 종언������(조영일 역, 도서출판b, 2006년)을 통해 한국문학의 종언을 고했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문학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무엇인가에 대해 종언을 고한 것이나 다름없다. 넓게 보면 인문학이고, 더 넓게 보면 한국사회이다. 
 

  과도기에는 병자가 나타나는 법. 허무주의에 빠지고 자살 등의 극단적인 탈출구를 선택하는 자가 속출하고 있다. 게다가 돈 없고 빽 없으면 생존하기 힘들다고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희망 없는 삶의 명을 부여잡고 있을 수는 없는 법. 한국사회에서 생존할 것이라면 우리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힘을 내야한다. 물론 시장의 신의 노예로 전락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은 위기이다. 작가는 우리에게 어떠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그저 10년이 지난 이 원고들을 책으로 내놓은 것은 한국사회가 어떤 것을 중요시해야 옳은 것인지 알고 성찰하길 바랄 뿐이다. 다만 작가가 운영하는 ‘책 읽는 사회문화재단’과 같은 사회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필자는 조심스레 언급해본다.

  더불어 사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저 어려운 것이 돕고 같이 나누면 가능하면 된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보자. 우리는 왜 사는가? 무엇을 하며 살아야하는가? 그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정으로 우리가 행복한 길은 무엇인가? 
 

 

문화의 몰락을 방지하는 일은 비판력이 살아 있는 건강한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비판적 사회, 그것은 시민사회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자본이 사회적 비판세력을 혐오하고 비판력을 마비시키기 위한 타락한 방식의 전략을 채택하는 이유는 거기 있다. 앞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현 발전 단계가 시민 사회의 성숙을 적극 저해하는 요소를 갖고 있다고 말했는데, 비판력과 비판세력을 마비시키기 위한 자본의 이해관계는 바로 그런 저해 요소들의 하나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비판적이고 이성적인 시민사회의 성숙을 도모해야 한다는 절실한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다. - <문명의 야만성과 세계화 비전> 중에서

입시경쟁에 하루 24시간 내몰리고 자나 깨나 ‘성적’ 걱정을 해햐 하는 아이들의 정신적 고통도 보통 문제가 아니다. 아직 영글지 않은 어린 영혼들이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우울증을 앓고 자살 충동으로 내몰린다. 그런데 어째서 한국인은 이 집단적 고통을 거부하지 못하는가? 사회는 어째서 이 고통을 강 건너 원두막 불 보듯 하는가? 정부는 또 어째서 막심한 국민 고통과 막대한 자원 낭비를 뻔히 눈으로 보고 매일 확인하면서도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는가? 한국은 참 이상한 나라다 - <경쟁력, 수월성, 창의성의 비극> 중에서

 

 요약  

 

  한국은 ‘세계화’라는 이름하에 시장전체주의를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지나가는 누구를 잡고 물어보든지 자본과 권력의 유혹에 뿌리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당연히 나라도 흔들릴 것이다) 하지만 자본과 권력이 모든 것을 대체할 수 있는가. 당신의 행복이 자본과 권력에서 나온다면 당신은 이미 시장의 신에게 세뇌당한 것이다. 우리는 자본 없이는 살 수 없는 동물이다. 하지만 자본만 있어서는 살 수 없는 동물이다. 세상에 대해 한 번 더 의심하고, 진정으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행복이 무엇인가.

  좋은 일만 있길 바라는 자들이 인간이다. 나도 그중 하나다. 하지만 좋은 일만 있길 바라되 욕심을 버려야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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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달래는 순서 창비시선 296
김경미 지음 / 창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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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정신줄을 놓친다. 팽팽하게 당겨진 줄을 놓쳐 나란 놈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찾으려면 나란 세상을 한참동안 뒤져야 한다. 편집기능이 고장난 것일까.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필름이 지 멋대로다. 조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정말,,,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다. 힘들어 죽겠다. 내가 살아도 내가 사는 게 아니다. 그렇지만, 사실, 세상 사는 게 다 그런 것 아닐까. 알면서도 참 답답한 세상이다. 세월은 쌓여가는데 나는 한갖 바람만 맞고 있다. 

 

김경미의 <<고통을 달래는 순서>>가 나를 달래준다


아아, 비가 보고싶다. 비를 맞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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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우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8
샤를 보들레르 지음, 윤영애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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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기 전부터 표지그림이 들어왔다. 한 여인의 모습이 그려진 이 그림의 제목은 에드가 드가의 <압셍트, 카페 안의 소녀>. 그녀의 표정에서 알듯 모르듯 풍기는 분위기는 책을 읽지도 않은 나에게 보들레르의 느낌을 느끼게 해줬다. 그런 여인을 빤히 쳐다보는데 굉장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책장을 넘겼다.

지금까지 배워 알고 있듯이 산문시로 이루어진 『파리의 우울』은 보들레르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댄디즘의 빠져있던 그의 삶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작품은 파리라는 그 시대의 대도시를 풍경으로 하고 있다. 작품이 발표된 때의 파리는 예술의 도시로, 많은 예술가들이 서로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받는 곳이었다. 그런데 보들레르에게 있어 파리 안에서 언제 어디서나 일어나는 상황은 그저 그런 ‘권태’라는 단어로 설명된다. 도시에서의 삶은 특별할 것 없는 일들의 연속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도시에는 가난한 자들과 어린 아이, 늙은이들이 즐비 하는 곳이면서 유혹적인 것들도 즐비하는 곳으로, 그들의 있다는 것이 사회적으로 특별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평범한 하루는 인간이라는 동물을 ‘죄 없는 괴물’로 만들었다. 결국 시간을 낭비하며 살아가는 ‘괴물’은 세상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어 이유도 모른 채 알 수 없는 우울(멜랑꼴리)에 휩싸이게 된다.

여기서 우울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울이라는 것은 대상상실로 인한 병이다. 쉽게 말하면, 왜 우울한지를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병이다. 왜 우울한지 안다면 그것은 애도(哀悼)라고 본다. 이렇게 어떤 대상을 상실했다는 면에서 인간이란 참으로 나약한 괴물로 보이니, 보들레르의 말에 수긍이 간다. 우리가 주기적으로 겪는 우울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 알 수 없으니 그것을 찾아가는 것이 우울증을 없애는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권태와 우울은 도회인들이 느낀다는 면에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으며, 보들레르는 작품을 통해 밝혀내고 있다.

권태와 우울에서 벗어나기 위해 보들레르는 퇴폐적 에로티시즘이라는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소비시킨다. 퇴폐적인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소비함으로써 파리라는 도시사회에서 일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우울과 권태의 원인은 도시라는 근대적 산물 때문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도시에 등장하는 인간은 반복되는 일상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자들이다. 때문에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에 대한 통찰을 강조한다. 그는 퇴폐적이고 에로티즘적인 모습 속에서 도시의 일탈을 꿈꾸고 있다. 자신을 탕진하고 소비하는 것은 괴물이 인간으로 돌아가는 기회이다. 퇴폐적인 것은 술과 마약(여송연, 대마초)으로, 성적 욕망은 쾌락을 넘어서 죽음의 충동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니체의 ‘디오니소스의 도래- 보들레르도 바그너를 좋아했다'와 바타이유의 ‘에로티시즘’을 관련지을 수 있겠다. 길게 설명할 것 없이 작품의 한 부분을 말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이제 취할 시간이다! ‘시간’의 학배받은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취해라! 술이든, 시든, 덕이든 무엇이든, 당신 마음대로 - 33. 취해라


이렇게 보들레르는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붙이면서 도시 속의 우울을 비통하고 서글픈 삶을 끊임없이 강조하였다. 나는 그가 남긴 작품 속에서 작은 휴머니즘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그 누구보다 인간의 존재에 대한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고민 끝에 실행한 자이다. 지금까지 적어본 거와 같이 보들레르의 문학적 위치는 중요하다. 그는 어두운 세상 속 하나의 등불, 아니 담뱃불이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그의 열정에 박수가 나온다. 그리고 아무 것도 못하는 나는 나도 모르게 도시의 다를 것 없는 권태에 물려 구역질을 한다. 그래서 보들레르가 좋다...

그의 마음을 알고 에드가 드가의 작품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의 앞에서 압셍트 한잔 같이 마시고픈 심정이다. (나도 똑같은 도회인인데 내가 아니면 누가 그를 위로하랴! - 꽤 많을 것으로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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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외인종 잔혹사 - 제1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주원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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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한국사회는 진정한 저질화가 된 것 같다.”

  작년 가을쯤, 조촐한 술자리에서 한 평론가에게 들었던 말이다. 저질 자본주의사회에 사는 인간답게 우리는 자본과 권력에 이끌려 한 인간의 내면을 바라보지 않고 외부적 상황만을 통해 기계적으로 계산하고 있다는 게 그가 그렇게 언급한 이유였다. 나는 그의 말에 크게 공감했다. 요즘 사회는 필자 같은 백수를 신경 쓰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이가 우리뿐만이 아닌 것 같다. 이러한 소재는 문학에서도 두루 사용되었다. 근대문명이 시작한 이래, 도회는 물질만능주의가 되어가는 사회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특히나 사회주의 대표인 소련의 붕괴 이후에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과 같은 극단적인 제목의 논문까지 나올 정도로 자본주의는 어떠한 방해 없이 전 세계로 팽창하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졌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으로 올바른 사회를 구축하는 길인가? 필자는 오랜만에 읽는 한국소설을 하나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책 제목은 󰡔열외인종잔혹사󰡕(한겨례출판).


  1부- 당연한 사회에서 당연한 충격이 잔혹하게 낯설다.

  󰡔열외인종잔혹사󰡕은 11월 24일, 단 하루 동안 코엑스에서 일어난 총기난사사건을 중심인물들의 시선을 통해 서술한 책이다. 작품의 중심인물은 각 세대를 대표하는 네 명이다. 학교는 일찌감치 관두고 되는대로 살자는 PC방 죽돌이(?) 기무(10대), 보통 사람들처럼 하라는 거 다 했는데도 취업 못한 된장녀 윤마리아(20대), 부도난 용역회사와 바람난 아내 덕분에 서울역으로 신세를 지는 4년차 노숙자 김중혁(40대?), 이놈의 사회는 죄다 빨갱이라며 탑골공원 마이너 연설을 하는 전직 월남파병 군인 장영달(70대?). 그들은 이 네 중심인물은 그들의 성격을 최대한 드러내면서 활동한다. 사회를 “냉정하고 비루한 현실”(51쪽)이라고 바라보고, 모든 것은 “시간의 지루함”(71쪽)과 결부되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인간인가”(75쪽)라는 비관론까지 펼치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중심인물의 직업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그들은 그 어떤 곳에도 소속감을 지닐 수 없는 주변인이며 하위주체이다. 하지만 동질감을 느끼기보다는 “자리는 죄가 꿰차고 앉아 20대의 장밋빛 진로를 철저히 봉쇄”(51쪽)한다며, 혹은 “일도 안하고 빈둥거”리는 “이런 밥버러지 같은 인간 말종들”(79쪽)이라고 서로를 욕하고, 한편에선 “거칠고 상스러운 가사로 무장한”(44쪽) 갱스터랩을 통해 반항하기도 한다. 그들은 책의 제목에 나왔듯이 그저 열외인종일 뿐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들이 낯설지가 않다. 나도 백수이기 때문일까?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진정한 답은 설명한 앞의 상황이 이미 실현가능한 -아주 현실적인 판타지가 가미될 경우- 사회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중심인물들은 우리가 사회를 자세하게 들여다본다면 어디서든지 볼 수 있는 흔한 인물들이다. (못 믿겠다면 작품 내 인물들의 출발지를 찾아가보시길)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하든 “그저 하나같이 피곤하고 잔인할 만큼 억눌린 얼굴”을 한 채 “경이로운 무관심”(71쪽)으로 대하거나 “에이 썩은 짬뽕 같은 호로새끼”(142쪽)라고 욕한다. 하지만 실제 가능한 일을 이 책을 읽으며 접했을 때, 우리는 당연한 사회인 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연한 행동과 충격에 잔혹한 낯섦을 느낀다.


  2부 - 소통의 부재 속에선 가장 친근할 것이 가장 강력한 적이다

  계속되는 사건 속에서 그들은 그렇게, 우연히, 자신만의 특별한 이유로 11월 24일에 코엑스홀로 모였다. 게임 이벤트, 종교의 카니발, 있지도 않은 고서 외전의 예언, 또 어떤 이는 삼류 예언가의 예언(혹은 알바)이라는 얼토당토않은 필연성이 그들을 묶은 것이다. 양 머리에 연미복을 입은 테러집단은 코엑스홀 안에 많은 사람을 가두곤 총으로 반동자를 죽이는가하며 일장연설을 하는 등을 자행한다. 이 부분 속에서 중심인물 네 사람은 각기 자기 자신의 생존과 이득을 위해서 움직인다. 기무는 보스를 죽이고자하고, 윤마리아는 끝까지 취업을 붙잡고자하고, 김중혁은 살고자하고, 장영달을 빨갱이를 다 죽이고자하는 모습은 처절하면서도 재미있게 느껴진다. (이때 작품은 속도감 있게 진행된다. 가속도가 붙어 더욱 더 빨라진다) 그러면서도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테러단(혹은 쿠데타 집단)의 모습에 잠깐의 의아함을 느껴졌고, 잠시 뒤 테러단의 두목의 등장과 동시에 윤마리아와의 대화에서 이 사회의 단면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고 결말에 가까워질수록 소시민의 모습은 부각되고, 그들이 양머리가 되는 식의 정신착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현실을 비난하고 진정한 구원이 있길 바라는 모습은 절규에 가까웠다. 속도감을 따라서 사회에 대한 의심도 금방 지나가고만 있다. 그리고 김중혁이 코엑스의 불을 밝혔을 때, 시스템을 파괴하는 과정에서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모습은 소영웅이라기보다 구원자였다. 어느덧 결말. 양머리의 그들이 아무 소통도 하지 못하면서도 시나리오대로 움직였듯이, 기무는 시나리오를 보지도 않고 구원자, 메시아 혹은 새 두목에서 총을 쏘았다. (많은 이들이 통쾌함보다는 공허함을 느꼈을 것이다) 결국은 세대를 넘어 서로가 이해하고 소통하는 공동체를 만들지 못하고, 자기 자신과만 소통하는 열외인종으로 남는 결과가 나타났을 뿐. 그 이상, 그 이하의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아무 것도 아닌 듯 살아간다. 그저 기무의 총기발사가 양이 아닌 사람을 죽였을 때의 모습이 참혹할 뿐이었고, 서로 잘 이해하고 가장 친근하게 지낼 것 같은 것이 가장 강력한 적으로 드러났을 뿐이다.


  이 시대의 광록(狂錄) 그리고 우리

작품은 끝났지만, 작가는 세세한 특이점으로 작품의 주제를 부각시켰다. 그 중의 하나가 종교문제. 종말론을 가진 마이너 종교 데이비드교라거나 만리교. 로버트 퍼시그는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하고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끈질긴 핍박 속에서 살아남은 승자(메이져) 종교에 자본과 권력을 덧붙여 신봉하는 자들이 지금의 현대사회에 인간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 작가가 숨긴 의도가 아닐까.
  그리고 또 하나는 김중혁의 친구 광록. 나는 그의 이름이 왜 광록인 지 읽었다. 미칠 광(狂)에 기록 록(錄). 미친 것들에 대한 기록, 혹은 미친 기록. 뭐, 어쨌든 이정도만 봐도 한 명의 철학자가 떠오른다. 그는 바로 미셸 푸코. 그리고 그의 저서 󰡔광기의 역사󰡕. 그의 관점에 본다면 위 작품은 역사에 쓰지 못할 역사를 기록한 책이고, 중심인물들은 에피스테메의 밖에 존재하는 인물들이다. 특히 코엑스의 정전 속에 돌아다니는 양머리들(양하면 마르크스․엥겔스가 생각나는 건 이 작품에선 어쩔 수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은 ‘감시와 처벌’을 떠올리도록 한다. 특히 김중혁이 시스템을 파괴하는 양상을 보이나 같은 존재자에게 소멸되는 것을 모두 수긍함으로써, 게다가 다음날 모든 것을 은폐하는 매체를 보고 의심 또은 격분함으로써 에피스테메에 속하는 현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시키기엔 아직 불가능한 시대라고 해석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하위주체’ 방식으로 보는 것도 또 그것만의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옥선녀가 예언한 “위선자”라는 말이 마음 한 구석에 걸린다. 위선자. 어쩌면 나도 양의 탈을 쓴 위선자는 아닌가. 더 나아가 우리는 모두 위선자가 아닌가. 기무도 윤마리아고 김중혁도 장영달도 모두 대화하려고 들지 않듯, 우리도 모두 말로만 소통해야한다고 언급할 뿐인 건 아닌가. 어쩌면 사회의 권력과 자본을 동경하고 굴복하며 살아온 것은 아닌가.
시국이 어수선하다. 비록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소설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사회에 필요한 소설은 아닐까(필자가 별로라고 다 나쁜 것이 아니듯)하여 이렇게 글을 쓴다.


“갖다 붙이면 그만이겠지, 그만일 수도 있고, 카니발일 수도 있어. 그렇지만 중요한 건 말이야. 우린 지극히 평범한 서울의 소시민들이었어. 4대 보험에 가입한 직장에 다니며 아침 8시 반이나 9시쯤 출근해서 7시가 넘어 퇴근하고 접대 명목으로 폭탄주를 부어대던 평범한 직장인들, 아님 학교에서 수능 준비하던 수험생, 모여서 집값 대충 때문에 한숨만 푹푹 내쉬던 가정주부, 은퇴하고 하릴없이 탑골공원이나 쏘다니던 노인들이 바로 우리들의 본래 모습이었지.”(263-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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