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모양
이석원 지음 / 김영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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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까지만 해도 가족이라면 당연히 이렇게 해야된다는, 이 당연함의 무게에 허덕이며 살았었다 장녀로 살아서 그저 가족 일이라면 당연히 내가 나서야 된다는 생각도 있었겠지만 사실은 '착한 딸'이라는 강박을 못 벗었던 것 같다 스스로 만든 강박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서른을 맞이했을 때, 나를 지켜보던 지인은 말했다 가족과 좀 멀어지면 어때? 가족은 멀어질 수록 애틋해지는 거야


그런 말을 듣고도 나는 여전히 가족과 멀어지지 못했다

그러니까 지금껏 여행을 떠나지 않고서야 부모님과 떨어져 살아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이제는 그만 독립할 때 아니냐고 누군가 물어보면 예전에는 딱히 이유를 못 찾아서로 끝났던 변명이 지금은 부모님만 두고 못 나가겠다는 말로 이어진다 나이를 먹을 수록 왜 이렇게 마음이 짠해지는지

그래서 그런지 나는 평소에도 나를 비롯한 가족들의 죽음에 대하여 자주 생각한다 슬픔이라는 것이 반복할 수록 무뎌지는 것도 아니고 학습한다고 괴롭지 않은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는 새 죽음 앞에 놓여있었다 어차피 상상으로는 진짜 슬픔의 근처에는 가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얼마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랑 내내 아쉬워 한 것이 있다 지척에 있는 할아버지 집에 한 번도 못 모셔갔던 것 세계적인 대역병이 가로막고 있기도 했지만 요양원 시스템이라는 게 우리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았고 할아버지 몸도 예전같지 않았다 우리만 보면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던 할아버지 눈빛이 계속 마음에 남아 눈물이 났다



이석원 작가 특유의 담백하게 쓰여진 솔직한 문장이 자꾸 눈앞을 흐리게 했다 가족에게 갑자기 닥친 죽음의 그림자와 누군가를 잃는다는 두려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선택의 기로에 놓인 가족들, 그리고 나의 자리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숨이 막혔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난 일말의 이야기들이 까맣게 나를 뒤덮었다 전철에서 몇장 읽지도 못하고 책을 덮고 숨을 고르느라 한동안 책을 펼치지 못했다 용기가 없어서 책장이 이렇게나 무겁나 싶었다 결국 나중에는 맨 뒷장의 결말부터 읽고 나서 조금 편하게 이어 읽게 됐는데 문득, 나는 모르는 사람의 죽음에도 덜덜 거리는 사람이라 자꾸 죽음 앞에 놓이는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부모님과 함께 살다보면 꽤 많은 것들이 잔상처럼 남는다 그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럼에도 내내 기쁨과 후회가 반복되는 일상을 누리고 있음에 안도하는 매일이길 바란다 상상만 하던 일이 내게는 영영 닥치지 않을 것처럼 그렇게 말이다



난 왜 여전히 몰랐을까. 삶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남들이 나와는 다른 결정을 하고 행동을 하는 데에는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 P44

내게는 내 솔직한 마음을 전하는 것보다 당장 누군가와 불편해지지 않는 게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 P49

살면서 뭐든, 실망하지 않기 위해 기대조차 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줄곧 고수해 온 나는, 이번만큼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 매 순간 기도하고 바라고 꿈꾸었었다. 하지만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여지없이 다가온 익숙한 실망감 앞에 나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 P76

어쩌면 그런 노력과 정성은 사랑이라기보다는 그저 두려움의 소산인지도 몰랐다. 언젠간 부모와 영원한 이별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워서, 그 공포의 감정이 엄마와 보내는 모든 순간을 이토록 특별하게 만들어버린 건지도 모른다고, 나는 자주 생각했다. 그리고 드디어, 내가 평생 두려워하던 순간이 기어이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무너진 거다. 예상보다 훨씬 더. - P108

가족이니까. 가족은 슬퍼할 만해서 슬픔을 느끼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랑할 만해서 사랑을 주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저 가족이기 때문에 모든 게 가능한 사람들이니까. - P120

슬펐다.
너무 슬퍼서
누가 슬픔이 어떻게 생겼는지 물어보면
설명이라도 할 수 있을 만큼. - P121

아버지가 당신의 소원대로 집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끔 그때까지만이라도 온전한 삶을 누리실 수 있도록 하늘이 조금만 도와준다면 좋으련만 그게 왜 이토록 힘든 것인지. 죽는다는 건 이러나 저러나 비극이었고 그리로 가는 과정에서 그 어떤 것도 수월하거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그게 바로 죽음의 길이었다. - P274

하지만 죽음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 주는 고통은 결코 어떤 의미를 갖거나 교훈일 수 없는 일이었다. 죽음은 그냥 죽음이었다. 우리가 태어나고 살아가고 지지고 볶았던 모든 일들이 다 그랬듯이.
-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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