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찾아 산티아고
정효정 지음 / 푸른향기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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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정말 산티아고 책이 넝쿨째 나에게 굴러들어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도서와 방송으로 참 많이도 만났다. 올해의 마지막 산티아고 책, 그리고 어쩌면 나에게 마지막 산티아고 책이 될 <남자 찾아 산티아고>를 읽었다. 누군가는 인생을 찾아서 순례길에 오르고, 또 어떤 이는 삶의 방향에 대한 물음을 떠안고 순례길에 오르고, 또 다른 사람은 진정한 나를 찾아 순례길에 올랐다. 그런데 이 작가, 이렇게 솔직해도 되나 싶게 남자 찾아 산티아고로 떠난다고 했다. 그래서 반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고 오히려 그런 솔직함이 거창한 이유를 들먹이는 것보다 마음을 흔든 것도 사실이다. 궁금했다. 그래서 남자를 찾았을까? 진짜 산티아고에 괜찮은 남자가 있었나? 여행길의 간지러운 로맨스 같은 것을 기대하며 책을 펼쳐들었다.

산티아고에 가본 적은 없지만 산티아고를 걷는 상상은 수없이 많이 해봤다. 나는 어떤 물음을 안고 길을 걸게 될 것인지, 길 위에서 무엇에 감동하게 될지, 만나고 헤어지는 일에 쿨하지 못해 얼마나 괴로울지, 외로울지 같은 것들. 물론 상상의 끝에 답을 얻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길 위에서 매일 외로워 울게 될 것이라는 것은 정확히 알 것 같아 산티아고로 떠나는 일이 늘 무서웠다. 그래서 여전히 물음만 붙잡은 채 누군가의 경험에 의존한다. 여러 사람들의 경험이 내게 얕게 쌓여 반가움과 감동이 밀려와 복잡한 기분이 들지만 책에 나온 곳곳이 낯설지 않아 알은체를 하며 웃었다. '순례길을 걷는다' 똑같은 주제로 어쩜 모두 이렇게 다른 글을 쓰는 것일까. 방송 작가의 좋은 필력도 한몫했겠지만 이 책을 읽으며 여러 감정이 밀려온 덕분에 향유한 모든 것이 좋았다.

비슷한 나이의, 비슷한 고민을 던지는 우리의 길 끝에 과연 정답은 있을까?

복잡한 미로 속을 열심히 헤매는 이 순간들이 언젠가 정답에 가까운 힌트라도 주긴 하는 것일까?

물음을 끌어안고 순례길을 걷는다. 걷는다고 우리는 모두 끌어안은 모든 것의 정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모두들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다. 왜 그렇게까지 걷는지 이해가 되지 않던 순간들이 이제는 조금 이해가 될 것도 같다. 매일 조금씩 걷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또 걷는다. 때로는 서로를 의지하며,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기도 하며 길을 걷는다. 길 위에서 처음 만나 어쩌면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들에게 최대한 담백하게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길에 쏟아낸 이야기를 모래 털 듯 툭툭 털어내고 또 걷고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하고 또다시 걷기를 반복하는 800km 동안 이미 정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일이 순례길의 목적이 아닐까 생각했다.


만약 세상 모든 남녀에게 ‘자신만의 바다‘가 있다면 어떨까? 그리고 연애 상대는 그 바다에 찾아오는 물고기들인 것이다. 연애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물의 온도와 속도 등 바다가 가진 조건과 물고기의 습성이 맞아야 한다. 그렇다면 의문이 든다. ‘나의 바다는 어떤 바다일까?‘ - P13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숫자가 앞으로 전진하는 것 외에는 경우의 수가 없다. - P32

그리고 이 오래된 서사는 오늘날 길을 걷는 순례자에게 녹아들어, 새로운 이야기로 쓰여진다. 빠르고 편한 차를 놔두고 굳이 고집스럽게 이 길을 걷는 평범한 사람들이 쓰는 서사시다. 우연히 만난 피터가 전해준 ‘신은 사랑이지만, 사랑은 신이 아니다.‘라는 말은, 그가 길을 걸으며 쓰고 있던 젊은 날의 서사시 중 한 대목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그 옆을 걷고 있던 내게 전해져 내 인생에 더해진다.

두 번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그 한국인 여행자가 이 글을 보고 있다면 꼭 말해주고 싶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냥 걷기만 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이 길을 걷는다는 것은 천 년 동안 쓰여진 이야기와 앞으로 쓰여질 이야기 사이를 걷는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깊이 속에서 자신만의 서사시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 길의 매력은 시대를 뛰어넘는 풍부한 이야기인 것이다. - P68

"인생을 미로라고 생각해봐. 그리고 네가 새라고 생각해봐. 네가 고민한 내용은 위에서 바라봤을 때는 ‘작은 헤맴‘일뿐이야.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네가 원래 어떤 사람이냐는 거야. 어차피 너라는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지금의 너의 마음, 너의 정신, 너의 순수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네가 향하는 길은 하나일 거야." - P158

바다를 마주하고 생각해봤다. 버릴 것이 있는가? 버릴 것은 하나도 없었다. 미련도 없었다. 남자를 찾겠다며 소풍 오듯이 와버린 순례길이었지만, 삶에서 답을 찾고자 이곳에 온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이 내 스승이었다. 원래 의도에서 많이 벗어나긴 했지만, 여행 자체는 이보다 완벽할 순 없었다. - P242

"행복이라는 말에 강박을 느낄 필요 없어. 행복을 찾다가 인생 끝날 일 있어? 그냥 가슴속에서 순간순간 느껴지는 깊은 기쁨(deep joy)에 집중해. 그리고 그때 네가 가슴 떨림을 느낀다면 너에겐 신의 심장(heart of God)이 있다는 거야. 그 신의 심장을 뛰게 해봐. 그걸 놓치지 않는 삶이 진짜 삶이야." - P244

모든 여행은 경계를 넘는 것에서 시작한다. 모든 것이 당연했던 견고한 내 세계를 떠나 이방인이 되면서부터, 우리는 수많은 다름과 부딪힌다. 다름 사이에서 내 기준점을 낮추기도 하고 끌어올리기도 하며, ‘이것이 나‘라고 생각했던 것에서 벗어나 자신의 기준점을 다시 조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낯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떠다니며 나를 증명하는 것이 여행이다. 그리고 새로운 땅을 밟고 돌아가는 이는 기존의 자신이 아니라 기준점을 다시 맞춘 확장된 자신이 된다. 경계를 넘어선 순간 나를 둘러싼 언어는 다시 써지는 것이다. 이렇게 여행은 한 인간이 사유를 지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한다. - P254

그렇게 우리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누군가를 만나 마음을 전하기 위해 길을 잃었다.

불교에는 ‘시절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인연은 때가 되어 만나고 헤어진다는 뜻이다. 햇볕, 온도, 수분, 토양과 같은 조건이 갖추어져야 씨앗이 싹을 틔울 수 있듯이, 때가 무르익어 만나고 헤어지는 인연은 꽃처럼 피어나 인생에 향기를 남긴다. 그때야 나는 알게 되는 것이다. 그날 길을 잃은 이유를. 모든 헤맴에는 이유가 있음을.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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